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139)
망나니학 개론-139화(139/300)
#139
풀어헤친 에스메랄다의 머리카락이 허공에 나부낀다.
검성의 것을 물려받은 잿빛 색으로 보통은 칙칙한 느낌을 줄 수 있었지만, 그 안에서 번뜩이는 새빨간 홍옥 같은 눈동자는 그녀의 성격이 보통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과연, 오라버니의 약혼녀가 되실 만하네요. 외모만으로는 저를 제외하고 적수가 없으실 것 같아요.”
에스메랄다는 페트라의 면면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상대에 대해 모욕이 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녀의 치기 어린 표정과 귀여운 몸짓에 페트라는 작게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꼬마 아가씨는 저를 라이벌로 의식하는 듯한데요.”
“…꼬마라니요. 저도 내년에 바이에른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다고요.”
에스메랄다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반박한다. 그 말에 페트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또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16살이었어요?”
“하긴, 조금 작아보이긴 하지.”
검성의 체구를 생각한다면 나중에 키가 클 가능성이 컸으나 아쉽게도 그녀는 운동을 비롯해 필요 이상의 힘을 써서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했다.
오죽했으면 검성의 손녀임에도 불구하고 검을 배우지 않고 마법을 수련했겠나.
“저는 이제 한창 성장기라고요. 언니 정도는 금방 따라잡을 거예요.”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주눅 들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 성장기인 것은 페트라도 같았지만, 여기서 더 놀렸다간 정말로 울 것 같기에 나는 작은 미소와 함께 말을 돌렸다.
“그런데 오늘 장난은 평소와 달리 조금 어설픈걸. 원래 해왔던 대로 생각하면 기사들이 들이닥쳐서 나를 연행하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텐데.”
“사실 정말로 그러려고 했지만…….”
그녀는 뭔가 불만이 담긴 시선으로 제 뒤에 선 기사들을 흘깃 바라본다. 그러자 그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아무리 장난이라 해도 소드 마스터께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저한테는 예전처럼 까불기 무섭다고 변명해 놓고 잘도 돌려 말하네요.”
에스메랄다는 어이가 없단 표정으로 그들을 흘깃 노려본다. 기사들이 모른 척하며 시선을 피하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우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여튼 마중 나왔어요. 설마 약혼녀분과 함께 계실 줄은 몰랐지만요.”
“바늘 가는 데 실도 같이 따라와야 하는 법이지.”
그렇게 맞받아치자 페트라가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찔러온다. 슬쩍 그쪽을 바라보니 사람들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다며 붉어진 얼굴로 째려봐 왔다.
‘은근히 재밌는데.’
처음엔 나도 살짝 적응하지 못해 쑥스러웠지만, 그녀의 반응은 언제나 다채로워서 놀리는 맛이 있었다.
“빨리 가요.”
다만, 에스메랄다는 그런 우리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술을 삐쭉 내밀며 몸을 돌렸다.
* * *
검성의 저택은 그 위명답게 커다란 규모를 자랑했다. 얼핏 보기에 내 궁보다 더 클 정도로 카리우스의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먼저 검성이 기다리고 있다는 연회장으로 향했다. 회합은 내일부터 시작된다. 그곳에 있던 것은 아마 우릴 환영하기 위해서 그런 것일 터.
가는 동안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이들에게 인사하면서 연회장으로 들어서니 화려한 만찬과 더불어 이 영지의 주인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요, 못된 손녀가!”
“아으으, 잘못했어요!”
물론 검성은 제일 먼저 우리를 안내한 에스메랄다의 머리를 부여잡고 가볍게 비튼다. 그것만으로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비명을 질렀지만, 검성은 쉬이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공문서위조는 귀족 사이에서도 엄하게 벌하는 사항인 건지 몰랐더냐. 오죽했으면 책임자가 나에게 직접 와서 하소연까지 했으니!”
“으으으으-!”
에스메랄다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슬쩍 내 쪽을 향해 시선을 보낸다. 도와달라는 눈짓인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것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이 나이 먹고 머리가 비틀리긴 싫은 걸.’
소드 마스터에 이르렀다고 해도 검성에 비하면 아직 보름달 앞에 반딧불이다.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상대였기에 나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그녀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라이프치히의 페트라가 검성을 뵙습니다.”
의외로 그것에 도움을 주고자 나선 건 페트라 쪽이었다. 그녀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귀족 영애의 인사법은 보통 치마의 양 끝을 살짝 잡고 들어 올려 예의를 표하는 것이었지만, 치마보단 바지를 즐겨 입는 페트라는 그 모습이 더 자연스러웠다.
“흠, 라이프치히가의 영애인가.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만나 김에 하나 충고를 해줘도 괜찮겠는가.”
“경청하겠습니다.”
그녀의 인사에 에스메랄다를 속박하던 두 손을 푼 검성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든다. 그것에 페트라는 눈을 반짝이며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검성 정도의 되는 인물이 해주는 충고. 그것은 검을 든 이라면 누구나 바랄 것이기에 한 글자라도 놓치지 않고 새겨듣고자 그녀는 귀까지 쫑긋 세워 정신을 집중했다.
“한시라도 빨리 네 옆에 있는 남자에게서 벗어나거라. 저건 폭풍의 핵이야. 지금 당장은 조용하지만 어중간한 각오로 곁에 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갈려 나가고 말 거다.”
“…….”
하지만 생뚱맞은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페트라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입을 벌리며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나를 바라볼 뿐.
오직 그 옆, 형벌에서 겨우 탈출한 에스메랄다만이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공감을 표하고 있었다.
“아니, 본인을 앞에 두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을 폭탄 취급하는 말에 조금 불평을 드러내자니 검성은 껄껄 웃으며 제 수염을 쓰다듬었다.
“내 말이 맞지 않느냐.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래 네 인생이 조용했던 시기가 있었느냐?”
“…….”
그렇게까지 들으니 그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뚱한 표정으로 있자니 페트라가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쉽게도 이미 늪에 빠져 버려서 헤어 나오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제 몸도 마음도 전부 이 사람에게 주었으니까요.”
“호오.”
그녀의 확고한 태도에 검성이 감탄을 흘린다. 생각해보니 둘은 이 자리가 초대면인 셈. 그의 표정을 보니 좋은 인상을 심어준 듯싶었다.
“좋은 동반자를 구했구나.”
“제가 인복 하나는 넘치지 않습니까.”
검성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받아친다. 그것에 그는 크게 웃으며 제 손녀의 뺨을 꼬집었다.
“내 손녀는 아쉽게 되었구나. 연초에 처음 그를 본 뒤로 시집가고 싶다면서 종일 노래를 불렀는데.”
“흥, 사람 일은 어떻게 될 줄 모르거든요. 그리고 오라버니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부인 한 명만으로 만족하지 못할 거고요.”
그녀의 말에 페트라는 공감한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에스메랄다를 향해 말했다.
“그건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그러니 힘껏 노력해 보세요. 이 사람 주위엔 하나같이 쟁쟁한 여성뿐이니. 방심하면 한 번에 뒷방 신세가 될 거예요.”
“…더 있다고요?”
에스메랄다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봐 온다. 주위에 매력적인 여성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기에 슬쩍 시선을 피하자 그녀는 분한 얼굴로 두 주먹을 꽉 쥐어 왔다.
“이건 경쟁할 것이 아니네요. 언니랑 연합해서 어떻게든 공동전선을 펼쳐야…….”
“사람을 난봉꾼으로 만들고 있네.”
“변명할 생각 하지 말아요. 사실이니까.”
슬쩍 불만을 표했지만, 페트라는 그것을 날카롭게 잘라내었다.
“으하하하! 역시 내 제자답다. 과거의 내 모습을 보는 듯하구나.”
그 광경에 검성은 크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린다. 그것에 나는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과거의 내 모습은 무슨. 당신 한평생 한 명밖에 안 사귀어 봤잖아.’
검성에 대한 설정을 꿰고 있는 나에게 그런 허풍 따윈 통하지 않았다.
* * *
본격적인 회합은 내일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에 오늘은 간단한 환영식으로 이야기를 끝낸다고 했다.
만찬의 호화찬란함을 보자면 간단한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상대가 검성 정도의 인물이니 그렇게 생각하면서 넘어가도록 했다.
“그런데 내일부터 회합이 시작되는데, 스승님께선 이렇게 느긋하게 있으셔도 됩니까?”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낸 뒤, 우리는 티타임을 가졌다.
나야 손님인 입장이기에 적당한 포만감을 가지고 배만 두드리고 있으면 되었지만, 검성은 이 영지의 총책임자가 아닌가.
그것에 검성은 여유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어차피 이 늙은이는 얼굴 마담이 아니더냐. 잡다한 일들은 젊은이들이 알아서 해야지.”
“이럴 때만 늙은이 행세입니까.”
“어떡하느냐, 실제로 늙은이인 것을.”
그러니까 귀찮아서 밑의 사람들에게 전부 맡겼다는 소리군. 참으로 속 편한 이야기다.
페트라와 에스메랄다는 배가 부르니 잠시 산책을 다녀오겠다며 밖으로 떠난 상태다. 테라스 밖으로 정원을 거니는 모습이 전보다 훨씬 친밀해 보인다. 왜 갑자기 저렇게 사이가 좋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겠지.
“그래서, 내 손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또 생뚱맞은 소리를 한다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검성은 새침한 얼굴로 재차 말을 이었다.
“내 기질을 물려받았는지 손녀 아이는 한번 정한 걸 쉽사리 바꾸는 일이 없었다. 아마 너를 따라다니는 것도 그렇겠지.”
그것에 나는 머리를 긁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일만 생각하는 것도 벅찬 지경. 페트라와의 관계는 예전부터 생각한 것이기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 결론을 내릴 수 있었지만, 애초에 에스메랄다는 논외였다.
“뭐,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리라곤 하지 않으마. 다만, 때가 왔을 땐 확실하게 대답을 해주어라.”
“명심하겠습니다.”
진지한 그 태도에 나 역시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러자 검성이 슬쩍 기세를 피워 올리며 나에게 말했다.
“물론 울리면 나한테 죽는다.”
“…예?”
“거절해도 죽는다, 그러니 잘 데리고 살아라.”
“…아하하하하.”
나는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 딴에는 장난식으로 말하는 것이겠지만, 내 온몸을 쿡쿡 찌르는 절대자의 기세는 절대 장난 같지가 않았다.
…농담이겠지?
쿵쿵쿵쿵-!
검성과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밖의 복도로부터 거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진다. 곧 연회장의 문이 활짝 열렸고, 한 남자가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오스-!”
“…필립?”
필립은 검성의 아들 중 한 명이자, 에스메랄다의 삼촌뻘 되는 이였다.
그리고 나보다 더 먼저 소드 마스터에 오른 강자 중 한 명.
“들었다, 소드 마스터에 올랐다고.”
“아, 예. 뭐.”
나는 쑥스러운 얼굴로 뺨을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이곳에서 묵으며 그와 자주 대화를 나눴고, 수련에 대한 조언이나 도움을 받은 적도 있었다.
나름 내 성장을 위해 진지하게 도와줬던 사람 중 한 명이기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 하지만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나에게 소리쳤다.
“드디어 대련을 신청할 수 있겠구나, 이 개뼈다귀 같은 놈! 감히 내 사랑스러운 조카를 홀려!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