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140)
망나니학 개론-140화(140/300)
#140
소드 마스터 필립은 가정을 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성을 좋아하거나, 독신주의인 것은 아니다. 그도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고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불의의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원작을 읽지 않더라도, 영지 내에서 유명한 사실. 그는 아마 일평생을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며 살아가…진 않았고 마계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쯤 어느 귀부인에게 반해 식을 올렸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전까지 필립은 홀몸으로 매일 밤을 지새운다. 정상적으로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다면 에스메랄다 정도의 자녀가 있었을 터. 그렇기에 그는 제 조카를 친딸처럼 이뻐하며 아꼈다.
‘다만, 이럴 줄은 몰랐는데.’
“에스메랄다의 마음을 얻기 전에 나를 넘어야 할 것이야!”
무슨 깐깐한 장인어른처럼 눈에 쌍심지를 켜면서까지 노려봐온다. 그것에 어이가 없어 검성을 바라보자니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뭐, 그 마음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
“…….”
제 아들을 옹호하는 듯한 말에 나는 그제야 잊고 있던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검성 역시 손녀에 대한 사랑이 지극정성이었다. 오죽했으면 그녀가 원한다는 한마디에 검 따윈 내팽개치고 솜씨 좋은 마법사를 거금에 모셔올 정도였으니.
“마스터가 되어서 밑의 사람에게 대련을 신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상대 역시 마스터가 되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겠나?”
“끄응.”
여지를 주지 않는 그 말에 나는 도움을 구하는 시선으로 검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재미있겠다는 듯 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제자의 일이라곤 하지만, 마스터 간의 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결자해지란 말이 있지 않더냐? 서로 간에 쌓인 앙금은 당사자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맞는 것이겠지.”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으며 부추기기까지 해왔으니 거절할 수도 없는 형국.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잘 이용해 먹자고 생각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마스터 간의 대련은 흔치 않은 것이니.’
필립도 말은 저렇게 했지만, 내심 나와 싸워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리라. 에스메랄다는 구실에 불과하겠지.
쿵.
필립의 전신으로부터 무지막지한 기세가 뿜어져 나온다. 그것에 연회장 전체가 흔들렸고, 숨 막힐 듯한 압력이 나를 짓눌러 왔다.
“장소를 옮길까.”
…구실에 불과한 건 아니려나.
* * *
“뭐, 마음껏 싸우도록 해라. 서로 즉사만 하지 않는다면 어지간한 상처는 우리 치료사들로 고칠 수 있으니.”
우리는 저택의 연무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나와 필립이 대련한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영지 내에 소드 마스터를 비롯해 쟁쟁한 기사단의 단장들과 요직에 앉은 실력자들이 한데 모였다.
아무렴 나는 검성의 제자라고 소문난 상황. 거기에 용사라는 타이틀의 이야기까지 알음알음 퍼지고 있었으니 오는 것이 당연할 터였다.
거기에 소드 마스터의 회합이 당장 내일 일이었기에 영지에 찾아온 외부 인사들 역시 이 대련을 보고 싶어 했지만, 검성은 나를 배려하여 그것을 불허했다.
‘낯익은 얼굴들도 많네.’
원래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터인 이야기에 수많은 사람이 모이니 무게감이 달라진다.
더욱이 이들은 각자 경지에 오른 이들로 일부는 나조차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강자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제국의 전력 5할 이상이 모인 것이 아닐까 싶었다.
“검을 뽑아라, 선공은 양보하도록 하지.”
필립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나에게 말한다. 그것에 나는 허리께에 있는 검을 잡았지만, 이내 손을 거두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리버.”
[네, 마스터.]파아앗-!
눈부신 광채가 내 손안에 서린다. 밤의 어둠을 몰아내는 그 찬란한 빛에 주위에 있던 이들이 술렁이며 내 쪽으로 이목을 집중했다.
“…그것이 그 위명이 자자한 엑스칼리버인가.”
곱게 뻗은 새하얀 검신의 자태에 필립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모두 감탄을 자아냈다.
엑스칼리버는 내 각성 이후 성국에서 소실되었던 힘 대부분을 회복해 제 형태를 되찾았다.
이젠 이 세상의 어떤 명검이나 보검이 와도 꿇리지 않겠지.
탁.
엑스칼리버를 손에 쥔 나는 신중하게 한 발을 내디뎠다.
마스터 간의 싸움은 찰나에 결정된다. 호흡 한 번, 눈짓 한 번, 손가락의 꿈틀거림까지도 승부의 방향을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그렇기에 대련이 시작된 이상 단 한순간도 긴장을 풀어놓아선 안 됐다.
“훗.”
필립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양새. 아직 나는 내 기세를 드러내고 있지 않아 제대로 된 실력을 파악하지 못했을 터다.
정면에서 맞대응했다면 저렇게 여유로운 태도로 있지는 못했겠지만, 나는 차라리 힘을 숨긴 채 그 의표를 찌를 예정이었다.
‘이 연무장도 단단하고 말이야.’
과거 이곳에서 몇 번이나 검성과 대련을 했다.
무슨 처리를 한 것인지 그의 오러까지 버티는 그 강도에 혀가 절로 내둘러질 정도였다. 슬쩍 듣기로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해 만들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쐐애애액-!
엑스칼리버에서 솟구친 오러 블레이드가 공간을 채로 베어 가른다. 필립은 자신이 했던 말 그대로 내게 선공을 양보했고, 한발 물러선 채 내 검을 막아냈다.
“…….”
다만, 그 위력이 예상외의 것이었는지 이때껏 느긋하던 필립의 표정이 살짝 굳어진다. 하지만 아직 상정한 범위 안인지 사뭇 여유로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제법이구나. 갓 소드 마스터에 오른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힘에 취해 중심을 망각하거늘.”
“아쉽게도 그럴 틈도 없이 싸워대서 말입니다.”
필립은 이미 소드 마스터에 오른 지 몇 년이나 지나 완숙의 경지에 들어서 있었다. 필시 이 영지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일 터.
하지만 각성 이후 나 역시 수많은 상대와 싸워왔다. 그것엔 나와 비슷한 수준의 실력자도 있었고, 나를 뛰어넘는 강자도 있었다.
아마 현시점에서 각자 가지고 있는 전력으로 따지자면, 나는 필립보다 조금 더 우위에 있었다.
다만, 이 대련은 서로를 죽이기 위함이 아닐뿐더러 각자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한 것.
“…그런가.”
일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검성의 제자가 됐다느니, 성국에 인정받은 용사이니 하며 여러 소문이 퍼지긴 했지만, 아직 나에 대한 주된 인식은 망나니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것은 예부터 뿌리박혀 자리 잡아 온 것. 어떤 계기가 없는 한, 단숨에 그 인식을 뒤바꾸긴 어려웠다.
그렇기에 검성은 이번 회합을 기점으로 삼아 내 오명을 씻어내라고 이야기했지만, 지금 이 자리 역시 그 발판의 시초였다.
“…전력으로 부딪쳐 오너라.”
내 표정을 본 필립은 내가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해온다. 그것에 나는 가슴속에서 무언가 북받쳐 오르는 것을 숨기고자 깊게 숨을 내뱉고, 다시 검을 쥐었다.
기껏 이들이 마련해 준 자리다. 실망시키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겠지.
웅웅-.
그런 내 마음에 화답하듯 엑스칼리버의 위로 피어오른 작열하는 빛이 더더욱 선명해진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감탄이 더욱 커질수록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검 위로 일념(一念)만을 덧씌웠다.
검성류 오의.
검성에게 물려받은 검술이 내 검 끝에서 화려하게 빛을 발한다. 마치 은하수가 쏟아지듯 떨어져 내리는 검광에 필립은 웃음을 터트렸다.
“별 무리! 아버님의 검술이로구나! 좋다! 같은 계보를 이은 선배로서 능히 그것을 받아내 주리라!”
투다다다다-!
내 검에서 솟구친 별 무리가 그에게로 쇄도한다. 작심하고 펼친 그 공격에 물러날 법도 했지만, 필립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내 공격을 막아내었다.
콰아아아앙-!
일부 빛줄기가 그를 지나 연무장 바닥을 때린다. 그 단단하던 돌바닥 위로 균열이 쩍쩍 일어났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긴다. 하지만 그 정도에 주춤할 이는 이곳에 있지 않았다.
쐐애애액-!
필립이 내 공격을 막는 사이, 나는 땅을 박차고 그에게로 쇄도했다. 얼핏 보면 그 기습은 성공한 듯싶었지만, 별무리를 막던 필립의 두 눈동자는 똑똑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쾅-!
둔탁한 소음이 연무장 위로 울려 퍼진다. 검을 중간에 두고 나와 맞선 필립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대단하구나, 아버님께서 욕심을 내실 만 해.”
“덕분에 엄청 힘들어졌지만요.”
검을 맞댄 채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그는 큰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더니 제 우락부락한 근육을 꿈틀거리며 더욱 강한 힘으로 나를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성의 이름을 짊어지려면 그 정도론 안 되지. 아버님의 핏줄을 이은 자식 중 나보다 강한 이들은 몇이나 더 있으니.”
그는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검성의 이름을 잇거나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들로서도 직계 후손이 아닌 내가 검성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은 살짝 불편한 일일 터니.
하지만 이렇게까지 한 몸에 기대를 받는 형국이다. 나도 사람인 이상 그것에 보답해 줄 의무가 있었다.
“하아아압-!”
처음으로 토해낸 기합성. 나 역시 지금까지 전력이 아니었다는 태도로 거칠게 기세를 부풀린다. 이어진 싸움은 그야말로 찰나의 세계에서 벌어진 사투였다.
쐐애액-!
소리보다 먼저 검이 나를 향해 쇄도한다. 얼마나 빠른 것인지 그것에 베여 핏방울이 튄 뒤에야 검이 휘둘러졌다며 세상이 나에게 속삭이듯 말해온다.
하지만 이쪽 역시 마찬가지. 절대로 우위를 내주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끈질기게 공방에 임한다.
휘두르는 검을 쳐내고, 찌르는 검은 밀어낸다. 우리는 서로 짠 듯 일진일퇴를 반복하며 그 자리에서 끊임없이 검을 나눴다.
마법을 사용할까, 하는 욕심이 마음 저편 한구석에서부터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검으로는 완전히 호각인 상태까지 따라왔다.
여기서 조금만 변수를 준다면, 하다못해 간단한 마법이라도 기습적으로 사용한다면 승부의 추는 크게 기울어질 터.
“…아니.”
하지만 난 고개를 흔든 채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검성의 이름은 오롯이 검으로 만들어진 것. 다른 것들은 불필요한 요소에 불과했다.
그러니 온전히 검으로만 싸움에 임하리라.
어느새 연무장 바닥은 얽힌 핏방울들이 고여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서로 치명상을 내주지 않은 채 전신을 피로 칠갑하고 있는 상황.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모여 발목을 옥죄어 왔다.
철컥.
“…….”
나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아마 다음 공격이 서로의 마지막이 되리라는 감각이 마음을 지배한다. 그것에 나는 작게 한숨을 토해내며 작게 읊조렸다.
“Last Stardust.”
여기까지 온 이상 필립은 이쪽의 사정을 봐주지 않은 채 자신의 최대 기술로 공격해 올 터. 그렇다면 나 역시 내가 가진 가장 강한 공격으로 그것을 맞받아칠 예정이었다.
웅웅웅-.
엑스칼리버가 내 의지에 공명하며 큰 울음을 토해낸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교류했다.
파아아앗-!
곧 눈부신 빛이 양측에서 터져 나온다. 그것은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들이 서로의 진심을 담아 휘두른 검.
필시 누군가는 죽겠지만, 아무도 누구를 탓하지는 않으리라.
“여기까지가 좋겠군.”
쏟아지는 빛 무리와 그것을 베어가는 한 자루의 검.
그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저저적-!
그와 동시에 몇 번이고 봐왔던 개벽의 일 검이 세상을 가른다. 그것은 내 빛 무리를 갈가리 찢어발기며 필립의 검을 가볍게 튕겨 내었다.
“…후우.”
검성의 발검에 지금껏 치열하게 싸워왔던 우리의 기세는 거센 폭풍에 휘말린 종잇장처럼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사실 이쯤 그가 개입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렴 제가 아끼는 사람들이 다치는 것은 보기 싫었을 터.
내 힘을 증명하는 것도 이때까지의 싸움으로 충분했고, 굳이 더 서로 간에 피를 흘릴 이유는 없었다.
“…….”
필립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씩 웃으며 나를 바라봐 온다. 하지만 그 시선 속에 들어있는 다른 감정에 나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뭐지?
기분 나쁜 감각이 손끝에 서린다. 마치 짜인 극본에 당한 것처럼 식은땀 한 방울이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것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대련 중에도 느낀 적이 없던 기분. 설마 싶어 검성을 바라보니 그는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엄숙히 선포했다.
“레이오스 황자, 그리고 내 제자여. 네 의지는 잘 알겠다. 그러니 약속에 따라 내 손녀인 에스메랄다를 네 부인으로 맞이하는 것을 허락하겠노라.”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