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147)
망나니학 개론-147화(147/300)
#147
약간의 보복성이 담긴 대련이 끝났다. 마나를 사용하진 않았지만, 혹독하게 몰아친 탓일까 데시아는 그대로 실신해 기절했고, 베르딘은 탈진 직전의 상태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괜찮은데.’
나름 작정하고 공격한 것인데 둘 다 생각보다 잘 버텨주었다. 특히 몇 번이나 치명타를 허용한 데시아와 달리 베르딘은 끈질기게 버티고 버텨 멀쩡히 의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산점을 주고 싶었다.
“끝인가.”
하지만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 여기까지가 한계인 듯했다. 혹시나 다시 일어서는 근성을 보여줄까 싶어 가벼운 도발을 던지니, 그는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겠습니다.”
그러곤 땀에 흠뻑 젖은 얼굴과 함께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팔로 검을 들어 올린다. 그 모습에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내게 인상을 심어주려고 일어난 것이면 합격이다.
그러던 차, 저 멀리서부터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기운이 느껴졌다. 웬 불청객인가 싶었지만, 어딘지 모를 그 익숙한 기운에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앨리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원을 비추는 은은한 달빛과 어우러진 주홍빛 드레스. 그 위로 솟아난 흑발과 검은 눈동자는 어두운 밤과 어울려 묘한 매력을 주었다.
‘저 모습을 보는 건 오랜만이네.’
성국에 갔을 터인 그녀가 어째서인지 회합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렇게 한껏 치장하고 온 걸보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 터.
며칠 만에 보는 앨리스가 반가워 손을 들어 올릴 차, 그 사이로 턱이 빠지도록 입을 벌리며 그녀를 바라보는 소년이 한 명 있었다.
“……?”
베르딘은 조금 전, 데시아가 페트라에게 청혼했을 때의 표정과 같은 얼굴로 털썩 무릎을 꿇으며 바로 앞까지 다가온 앨리스를 향해 말했다.
“처, 첫눈에 반했습니다.”
나는 그것에 내 귀를 의심했다.
설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잘못 들었는가 싶어서 두 눈을 찡그리고 바라보자니 베르딘은 얼굴에 짙은 홍조를 띤 채 재차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나에게로 다가오던 앨리스는 뜬금없이 고백을 받자 당황한 표정으로 얜 뭐 하는 놈이냐며 소리 없이 물음을 던졌다.
“…이 새끼들이.”
절로 얼굴이 일그러진다. 난 손에 있던 목검을 휘둘렀고, 무방비하게 뒤통수를 가격당한 베르딘은 짤막한 비명과 함께 게거품을 뿜으며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장내. 드레스의 양 끝자락을 들어 올려 성큼성큼 걸어온 앨리스는 잘했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쓰러진 베르딘의 옆구리를 발끝으로 툭툭 쳤다.
“갑자기 첫눈에 반했다기에 정신 나간 줄 알았어.”
“정신은 내가 나갈 지경이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은 데시아는 몰라도 냉소적인 베르딘은 상대적으로 정상일 거라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성국에 있을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그것보다, 내 드레스 어때?”
앨리스는 내 물음에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몸을 돌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그것에 난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잘 어울려. 여기 있으니 요정 같네.”
“요정?”
그 말에 그녀는 기쁘단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냉큼 내 팔을 붙잡으며 옆으로 붙어왔다.
“연회장까지 에스코트해 주라.”
“음…….”
하지만 난 그것에 침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내 약혼자는 페트라로 알려진 상황. 그것에 에스메랄다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과 이런 친밀한 모습을 보인다면, 나뿐만 아니라 그녀들을 욕보이는 것이 되었다.
“뭘 걱정하는 건지 알고 있으니까. 정원 밖으로 나가면 놓을게.”
앨리스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눈에 살짝 물기가 어린 것은 내 착각일까. 사람들의 이목이 있는 곳에선 이러지 않겠다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 체 그녀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아, 쟤들은 저대로 내버려 둬도 돼?”
앞으로 가던 중, 앨리스가 슬쩍 바닥에 엎어진 두 소년들에게 눈짓한다. 그것에 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심하게 맞은 것도 아니고 앞으로 몇 분 후면 털고 일어날 거야. 제 몸은 알아서 챙겨야지.”
“매정하네.”
귀찮아서 내팽개치겠다는 내 말에 그녀는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나저나 예정보다 더 빨리 이곳으로 왔네. 난 회합이 끝나고 몇 주 후에 이쪽으로 오라고 연락하려 했는데.”
“볼 건 다 보고 왔어. 애초에 대부분 종교 시설이라 그쪽 계통을 믿지 않는 사람이면 오래 있을 이유도 없고. 떠난다니까 실비아만 조금 아쉬워하더라.”
“그 녀석, 친구가 별로 없으니까.”
어차피 내년이 되면 바이에른 아카데미로 오니 괜찮지 않을까 싶다. 성국의 성녀라는 타이틀과 더불어 가진 외모나 능력이 출중하니 금세 인기인이 되겠지.
더군다나 우리 쪽 일행과 친하니 아카데미 생황을 하는 데 어려울 것도 없을 터.
“회합이 끝나면 내 영지로 돌아갈 생각인데, 다른 사람들은?”
“다 같이 왔어. 지금 연회장에서 놀고 있을걸? 페트라 언니한테 당신은 어디 있냐고 물으니까 정원 쪽으로 가는 걸 봤다고 해서 나만 뒤따라온 거고.”
다 같이 왔다니 마침 잘된 소리다. 그러면 이곳으로 온 일행과 더불어 디아크와 베르너만 데리고 가면 될 터.
“…그나저나 이곳으로 어떻게 들어왔지? 원래는 관계자 이외에 출입이 되지 않을 텐데.”
“당신 이름 대니까 금방 들여보내 주던걸.”
즉, 내 이름을 팔았다는 소리다. 기가 막힌 이야기에 실소를 내뱉으니 그녀는 권력이 좋긴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합이 끝나고 다들 일정 없지? 전부 내 영지로 초대해서 방학 동안 같이 수련했으면 좋겠는데.”
“합숙? 합숙 이벤트야?”
“뭐, 그렇…….”
그렇게 말하면 비슷하겠다며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찰나, 나는 등골이 싸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아르테니아 대륙의 평범한 사람이라면 방금 앨리스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함이 맞았다.
하지만 나는 현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무심코 맞장구칠 찰나, 그것을 깨달았다.
“…….”
슬쩍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보자니 재밌을 것 같다며 신난 표정만 지을 뿐. 내가 어떻게 그런 뜻을 알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나 의심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깜빡했네.’
최근 들어 앨리스와 무언가를 하는 비중이 줄어들었다. 대부분 사건이 있을 때마다 페트라와 동행했기에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앨리스는 나와 같은 지구인으로, 그 알맹이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이참에 확 말해 버릴까.’
아카데미 초기, 시시각각 달라 붙어오며 날 방해했던 절대적인 개연성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다.
처음엔 내가 주인공에게 이 세계의 비밀을 밝혔다가 엉망이 되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 걱정이 들었지만, 이미 많은 요소가 뒤바뀌어 버렸다.
설사 여기서 나 역시 너와 같은 곳의 사람이며, 편집자로 일하다 레이오스 몸에 빙의한 것이라 말해도 더 나빠질 것이 있을까.
“앨리스, 사실 나는…….”
[절대적인 개연성이 작용합니다.] [SYSTEM: 해당 내용을 발언하는 데 필요한 동화율이 부족합니다.] [현재 동화율 25%.]혀가 말려 들어가는 익숙한 감각. 텁텁한 공기가 입 안을 가득 채우며 내 말을 막는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떠오른 상태 창의 메시지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뭐?”
앨리스는 걸음을 멈춘 채 의아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난 아직 절대적인 개연성이 주는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한 바. 몇 번 더 숨을 내쉬고는 그 주박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아니, 나중에 말해줄게.”
“뭐야, 싱겁게.”
그녀는 가볍게 내 옆구리를 찌르는 것으로 핀잔을 주며 어서 가자고 재촉한다. 그것에 나는 가늘어진 눈으로 눈앞에 떠오른 상태 창을 바라보았다.
‘설마 그걸 말하는 것도 막아버리다니.’
다행인 점은 아예 ‘불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상태 창에 표시된 메시지에는 그 발언을 하는 데 필요한 동화율이 부족하다고 했다.
내 상태 창에 있는 목록 중 유일하게 원작에 없었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지 못했던 요소. 황궁을 나올 때 10% 선에 있던 것이 어느새 25%까지 이르렀다.
‘상태 창.’
나는 앨리스와 함께 걸어가던 와중, 속으로 상태 창을 호출했다. 아카데미 생활을 하면서 시스템 어시스트 쪽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상태 창 쪽은 자주 찾아보진 않았다.
가끔 깊은 밤에 심심할 때나 살피곤 했었는데, 생각해 보니 소드 마스터에 이른 후엔 그것마저도 없었다.
[SYSTEM: 새로운 시퀀스에 따른 패치 중입니다.] [패치가 완료된 뒤에 상태 창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완료까지 32%.]‘얼라리요?’
하지만 오랜만에 호출한 상태 창은 침묵을 고수했다.
새로운 시퀀스에 따른 패치.
그것을 유심히 살피고 있자니, 문득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소드 마스터에 이르러서 그런가.’
그것과 상태 창이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연관을 찾으라면 가장 유력한 후보가 바로 그것이었다.
“…저기요?”
그러다 문득,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앨리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미안. 잠시 다른 생각 하느라.”
“…그건 살짝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인데.”
“회합이 끝나고 영지에서 수련한다고 했잖아. 너는 다른 애들보다 더 강하니까 내가 직접 가르쳐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거든.”
“직접?”
자신을 두고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렸다는 말에 살짝 기분이 상한 듯한 앨리스는 이내 활짝 웃으며 다시금 내 팔을 강하게 잡아온다. 그러곤 다시 조잘조잘 이야기하며 텐션을 올렸다.
이전에 여자 친구와 헤어지게 된 계기도 바로 이런 사소한 말싸움이 누적됐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느낀 위기에 전신의 말초신경이 곤두서며 지금 당장 짜낼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을 뱉어내었다.
다행히 그것은 정답인 듯 앨리스의 얼굴에서 기분이 상한 듯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후우…….’
그것에 난 무심코 한숨을 흘렸다.
* * *
회합의 첫날이 끝났다.
연회 자체가 저녁에 시작되었기에 종료될 때쯤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대륙 각지에서 모인 다양한 사람들.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저택 밖에 있는 숙소로 돌아가 내일 있을 행사를 준비했다.
똑똑.
어느 소드 마스터가 통째로 빌린 여관의 한 곳. 깊은 어둠을 뚫고 나타난 누군가가 뒷문을 두드린다.
벽엔 아직 기름이 남은 횃불이 주위를 밝히고 있었지만, 그는 머리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엔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끼이익.
곧 경첩이 신음을 내며 문이 열린다. 그는 물 흐르듯 안으로 들어갔고, 예정돼 있던 것처럼 거침없이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다.”
좌측 두 번째 방 앞에 선 그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을 뱉어냈다. 그러자 문이 천천히 열렸고, 마찬가지로 로브를 뒤집어쓴 채 먼저 자리하고 있던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륵.
방 안에 들어선 그가 로브를 벗자 잿빛 머리카락에 불투명한 눈동자를 가진 남자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그분께서 명령을 내리셨다.”
남자는 자신 앞에 선 한 명 한 명을 바라보며 의지에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회합 이틀째인 내일, 용사 암살 작전을 시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