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154)
망나니학 개론-154화(154/300)
#154
“…….”
잠시간 우리 사이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평소라면 실없이 웃으며 농담거리를 내뱉을 그는 손가락 하나 꿈틀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런 베르너를 바라보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방 안은 부산스러운 밖과 다른 세계인 것처럼 숨 막힐 듯한 적막감이 이어진다.
베르너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듯 몇 번이고 입을 열었지만,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힘 빠진 한숨만을 내뱉었다.
“…형님의 일은 유감이다.”
먼저 그 적막을 깬 것은 내 쪽이었다. 아무래도 아직 무언가 속에 있는 것을 말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듯 망설임이 보였기에 조금 숨통을 틔워주고 싶었다.
“…그래.”
하지만 베르너는 도리어 우울해진 낯빛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설마 형님께서 저들과 손을 잡으셨을 줄은 몰랐어. 그토록 강하셨던 것을 보니 꽤 오래된 일이었겠지.”
주먹 쥔 그의 손톱이 살갗을 파고든다. 상처에서 새어 나온 핏방울이 바닥 위로 뚝뚝 떨어졌지만, 나는 안타까운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베르너의 형, 메르센은 마인과 손을 잡았다.
물론 이용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때 보였던 메르센의 힘과 그 상황은 그 본인이 모든 일의 주모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설사 이용당했다고 하더라도 상당 부분 깊게 관여한 것일 터.
“도대체 내가…….”
그는 쥐어짜 내는 듯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책망할 대상이 없는 절규가 메아리친다. 달빛에 반사된 그의 눈동자에 한 줄기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고, 꽉 쥔 두 손은 어느새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베르너, 너는 잘못한 것이 없다.”
나는 몸을 돌려 침대 밖으로 두 다리를 내밀었다.
발끝에 닿는 양탄자의 껄끄러움이 오늘따라 더욱 낯설게 느껴진다. 닫힌 방의 공기는 폐부를 짓누르는 듯했고, 입안은 바싹 메마르기 짝이 없다.
‘…씨발.’
같잖은 핑계를 대며 자신을 속였지만, 그것은 눈앞에서 일어난 일에서 회피하고 싶어 일어난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스스로에 대해 환멸감이 일어난다. 아버지를, 형을 잃은 친구를 눈앞에 두고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채 연신 허공만 움켜쥐고 있었다.
결국, 그가 그렇듯 나 역시 누군가를 잃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겨우 그가 했던 것처럼 목소리를 쥐어짜 피투성이가 된 베르너의 손을 붙잡았다.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래를 보았다며. 네가 본 미래에는 지금의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
“이번 회합부터 원래는 없던 일이었다. 애초에 미래가 많이 바뀌었어. 나조차도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이 되지 않을 정도로.”
물론 큰 줄기들까지 바뀌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지만 마족의 출현이나 마인 세력의 음모는 그것들을 교묘히 빗겨 지나갔다. 그 말은 디테일한 요소들에서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예측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일이 이렇게 된 것도…….”
베르너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모르진 않았기에 나는 작게 한숨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네 형이 그렇게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것 역시 가정일 뿐이다. 분명 너에겐 가혹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직시하는 걸 기피하면 안 돼.”
베르너는 그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 역시 실언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비틀어 반쯤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게 바로 너의 첫 모습이었지.”
지금껏 어울리던 친구가 아닌, 어딘가 냉소적인 적의가 깃든 얼굴. 그것이 향하는 시선에 내 몸은 경직되었다.
“애초에 일이 이렇게 된 것도 모두 내가 어리석었던 것이겠지. 너희란 족속은 모두 같은 걸.”
“…….”
“항상 자신의 말에 따를 것을 원하며 그들에겐 무언가의 희생을 강요하지. 그것이 비록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그 말에 나는 주먹을 쥐었다. 베르너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도대체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했다는 것인가.
“가혹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피하면 안 된다고. 네 약혼녀인 페트라가, 아니, 앨리스가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그 말을 떠올릴 수 있겠나?”
“베르너.”
나는 그것에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홀로 형님의 시신 앞에서 눈물을 훔친 것인지, 그의 눈가가 살짝 부어 있다.
아직 사고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일 터. 그렇기에 난 그가 선을 넘기 전에 말을 막았지만, 베르너는 가볍게 고개를 저은 채 말을 이었다.
“아니, 너는 몰라. 잃어본 적이 없으니까. 항상 남의 일이니 편하게만 생각했겠지. 언젠가부터 너에게서 느껴지는 느낌이 그랬어. 네 눈은 주위를, 우리를, 이 세계를 바라보고 있지 않아.”
너에게 이것들은 그저 장난에 불과한가?
베르너의 말에 나는 숨을 삼켰다.
그것은 언젠가 커다란 달을 올려다보며 들었던 생각과 같은 것이었기에.
하지만 나는 그때 나 스스로 무언가의 답을 내렸고, 그 신념에 따라 의지를 가지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오답이었던 것일까. 내 앞에 선 베르너는 내가 잘못되었음을 말하고 있었다.
비수가 날라와 가슴에 꽂힌다. 틀리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비록 비틀거릴 지라도 내가 걸어가는 길이 맞다고 생각했다.
알로켄이라는, 그레모리라는, 아가레스라는, 바포메트라는 강적을 만나도 꺾이지 않았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말해봐.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네가 우리에게 무엇을 숨기고 있으며,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
그것에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사실 이들과 친해질수록 고민이 들기도 했다.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까.
세계가 어찌 될 거란 말은 사실 전부 핑계에 불과했다.
내가 그들과 다른 것이 알려지게 된다면 배척하진 않을까.
아니, 이런 미래를 홀로 알고 싶다는 욕심이었을까.
“…….”
잠시간 눈을 감고 있던 나는 이윽고 생각의 정리를 끝냈다.
천천히 눈을 뜨자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베르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안타깝다.’
그나 나나 잘못한 사람은 없다.
다만, 잘되지 않았을 뿐이다.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가슴 한편에서 일어난다. 그랬더라면 베르너가 증오할 대상을 찾지 못해 그 화살을 내게 돌리진 않았을 텐데.
“그런가, 그게 네 답인가.”
내 표정에서 대답을 읽은 것인지 베르너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린다. 그러곤 거침없는 걸음으로 문가까지 걸어가 그 앞에서 멈춰 섰다.
“…아이작은 내가 죽이겠다. 그전까지 우리가 만날 일은 없겠지.”
아니, 이제 만날 필요가 있을까.
살짝 문을 민 채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가에 들려온다. 그것에 나는 몇 번이고 입을 열었지만, 결국 한마디도 내뱉어낼 수 없었다.
이윽고 베르너는 방 밖으로 나간다. 천천히 사라져 가는 그 기척 속에서 나는 어중간하게 뻗은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아.”
원작의 내용 중에서도 몇 번인가 이런 상황이 있었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서, 사상의 차이로, 종교의 문제로.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동료였던 이들이 떠나갔고, 사라졌다.
그것을 읽을 때는 시큰둥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다. 그 외의 조연은 그저 상황과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이루어줄 뿐인 장치였으니까.
하지만 베르너가 떠나가니 무언가 허무한 감각이 손끝을 스친다. 그렇게 얼마간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두 손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저 끝에서부터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레이오스?”
매력적인 붉은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서 흔들린다. 살짝 열린 방문 사이로 안쪽을 향해 얼굴을 들이민 인영은 다름 아닌 페트라였다.
“잠이 조금 안 와서.”
그것에 난 쓴웃음을 지으며 침대 한쪽을 두들겼다. 페트라는 잠옷 차림이었지만, 거리낌 없이 방 안으로 들어와 천천히 침대 위에 앉았다.
잠시간 말없이 나와 함께 앉아 있던 그녀의 두 눈이 가늘어진다. 보통 사람이라면 밤의 어둠에 속아 보지 못했겠지만, 그 눈썰미는 양탄자 위에 떨어진 핏방울을 놓치지 않았다.
“…베르너 군이 다녀갔군요.”
“그래.”
거짓말할 것도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당신이 다시 잠들고 다들 저녁을 먹었었거든요. 베르너 군 역시 겨우 마음을 추슬렀는지 식당에 나왔지만…….”
“거기서도 소란이 있었다고?”
“네, 가족이 그렇게 됐으니 다들 이해는 했지만요. 다만, 앨리스 양이랑 조금 말싸움이 일어나서 분위기가 안 좋게 되었어요. 참고로 그 주제는 당신에 관해서였고요.”
“…대충 상상이 가는군.”
아무렴 그 말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의 상황처럼 사람들 가운데서 말을 했다고 하면, 당연히 분위기가 안 좋아질 터. 앨리스는 그런 것을 참는 성격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말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베르너 군은…….”
“베르너는 떠났다. 제 아버지와 형의 복수를 할 때까지는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하더군.”
나는 그대로 몸을 뒤로 뉘었다.
어차피 상황은 이제 내 손에서 벗어났다.
그는 그렇게 결정을 내렸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을 따름이다.
지금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 베르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애원할 생각은 없었다.
“읏차.”
착잡한 마음을 지우고자 어두컴컴한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페트라가 침대 위로 올라온다. 그러더니 내 머리맡에 자신의 무릎을 가져왔고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람과 사람이 언제나 맞을 수만은 없는 거예요. 죽마고우도 한순간에 원수가 될 수도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예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런 이야기니까요.”
얼굴에 수심이 드러났던 것인지 페트라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날 위로해 온다.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는 그 손길이 따뜻하다. 그것에 나는 착잡했던 마음 한편이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꼈다.
“페트라.”
“네.”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나 자신도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물음. 그녀 역시 알고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페트라는 가벼운 미소를 머금으며 내 뺨에 손을 가져왔다.
“제 말이 정확하다곤 할 수 없지만.”
그러곤 내 귓가에 얼굴을 가져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적어도 제가 보기엔 당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최선을 다하고 있다라.”
“네, 누구보다 오래 생각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어차피 당장 결과가 나오는 일이 아니니 지금 당장에 충실하며 미래를 준비하면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 말에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페트라 역시 나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을 것이라.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저 나를 위로해 왔다.
내 마음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흔들린다. 결국엔, 두 눈을 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페트라, 사실 나는…….”
“그렇다고 무리할 필요 없어요.”
하지만 이내 말이 막히고 말았다.
내 입술에 가볍게 손가락을 올린 그녀는 장난치듯 가볍게 내 귀에 바람을 불어 넣으며 말했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되요. 저는 언제까지고 당신 옆에 있을 테니까.”
그러곤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다시 베게 위로 내려놓는다.
천천히 내 침대에서 벗어나는 그녀의 모습에 조금 외로움이 느껴져 함께 자자고 말할까 싶었지만, 잠깐의 변덕으로 그녀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겨우 말을 삼켰다.
“그럼, 좋은 밤 되세요.”
페트라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내 방을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