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18)
망나니학 개론-18화(18/300)
#018
떨리는 손을 들어 가까스로 수락을 눌렀다. 그러자 현이 끊기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티르빙의 목소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후······.”
머릿속에 끼었던 안개가 개인 기분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허탈한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노인이 두꺼운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왔다.
“그간 고생이 많았구나.”
파르시를 제외하곤 처음 듣는 따뜻한 음성이었다.
아니, 그녀조차 내 슬픔과 고통에 공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그 목소리에 나는 무언가가 울컥 솟아올랐다.
하지만 나이 서른 살 먹고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나는 이를 악물고 감정의 편린을 주워 담았다.
“…노인장은 누구요.”
겨우 눈물을 삼키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노인에게 물었다.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을 숨길 수 없었는지 그는 인자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나는 요하넬, 당대 검성이라 불리는 자다.”
검성 요하넬.
세계관 최강자로 거론되곤 했던 인물이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 * *
“······.”
어둠만이 자리하는 연무장. 그 가운데 나는 우두커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날이 늦었으니, 내일 다시 오마. 그동안 몸을 추스르고 있도록.
휙휙 뒤바뀌어 가는 상황에도 나는 움직일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만약 지금 상황이 소설의 한 장면으로 쓰였다면 주인공이 주도적으로 행동하지 못한 채 너무 주위에 휘둘린다며 악플이 달리겠지.
“…하하.”
천성이 작가인지, 아니면 편집자의 버릇이 남아 있는 것인지 생각 대부분이 그쪽 계통으로 이어졌다. 내가 생각해도 우습기 짝이 없다.
“읏차.”
언제까지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몇 번을 휘청거렸지만, 연무장의 벽을 잡고 겨우 바로 섰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방금 일어난 일의 장면은 뚜렷하게 눈과 머리에 남아 있었지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그저 푹신한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한적한 복도를 걸어가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는 내 방에 당도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파르시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저, 전하. 탁자 위에 있던 책이 갑자기 스스로 찢어졌습니다.”
“뭐?”
그녀의 말에 시선을 돌리니 티르빙이 의태한 고서가 맹수가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거칠게 찢겨 있었다.
책이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조금만 힘을 주면 쫙하고 찢어질 것 같다.
‘아, 모르겠다.’
침대가 눈에 들어오자 책이고 뭐고 상관없다. 파르시에게 괜찮으니 이제 돌아가 쉬라는 말과 함께 침대에 몸을 던졌다.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자니 그녀가 조심스레 이불을 내 위로 덮어준다. 곧이어 불이 꺼지고 그녀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내 방을 떠났다.
짹짹짹.
얼마를 그렇게 누워 있었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창밖으로 눈 덮인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작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후······.”
기절한 것인지 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제의 탈력감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몸엔 힘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가슴 한편엔 무언가 뻥 뚫린 것처럼 허무한 감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그 한쪽에 걸터앉아 어제의 일을 복기했다.
“상태창.”
[상태창]이름- 레이오스 폰 리베라
종족- 인간
종교- 무(無)
칭호
-리베라 제국 삼 황자
-저주받은 사생아
-창녀의 아이
무예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 / 비활성화)
전투의 꽃(Fiore di Battaglia)
-4 클래스 (마스터 / 비활성화)
스킬
-진실의 눈 (A / 비활성화)
-초회복 (A / 비활성화)
*장막의 저주에 걸려 있습니다.
그래, 피오레류.
그것을 수련하던 중 갑작스레 피오레류를 활성화하겠냐는 물음이 떠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것을 수락했지만, 그것이 원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눈앞에 생겨난 궤적에 검 끝을 싣자 마치 누군가 내 몸을 조종하는 것처럼 그 흐름을 타고 저절로 움직였다.
나는 천천히 그 흐름을 외워 나갔다. 검술에 통달한 달인이 펼치는 것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휘둘러지는 검을 기억하려 애썼고 눈도 깜빡거리지 않은 채 보는 것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순간 기세가 뒤바뀌었다.
단순한 검술일 뿐이었던 움직임이 내 정신을 뒤흔들었다. 검과 나의 구분이 희미해지고 이질적인 감각들이 전신을 뒤덮어갔다.
만약 누군가 그것을 멈추지 않았더라면.
“······.”
서늘한 느낌에 절로 목을 쓰다듬었다. 고개를 흔들어 그런 기분을 쫓아낸 나는 어젯밤 만났던 노인을 떠올렸다.
검성 요하넬.
이 세계관의 최강자를 꼽자면 항상 거론되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출연 비중이 높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장식한 에피소드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SSS급 이세계 절대자는 총 3부로 구성되었다.
주인공의 성장이 주된 시점인 1부.
제국에 반기를 든 국가들이 연합해 대륙이 전쟁에 빠져든 2부.
그리고 마계가 침략한 3부.
검성 요하넬은 2부의 끝과 3부의 처음. 그 사이를 이어준 인물이었다.
제국이 왕국 연합과 피 튀기는 싸움 가운데 있을 때, 그 홀로 유일하게 세계의 이변을 눈치챘다.
일그러지는 공간, 위대한 존재들의 맹약이 깨어져 나갔고 마계는 지상계를 침공했다.
그 입구가 열린 곳이 바로 제국의 국경이었다. 왕국 연합과의 전쟁 가운데 제국은 그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렇기에 검성은 홀로 그곳으로 향했고 마계의 군세와 동귀어진 함으로써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
레이오스는 그런 검성을 보며 탄식했다.
검성은 위선자다. 위선자가 자신의 정의를 위해 목숨을 버렸으니, 그것만큼의 위선이 어디 있겠는가.
모순에 모순을 거듭한 말이었지만, 나 역시 그것만큼 검성을 잘 표현한 말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인물은 레이오스 폰 리베라였지만, 가장 명장면을 꼽자면 요하넬이 마계 대공과 군세를 막아 세우는 장면이었다.
모든 병력과 사람을 뒤로 물리고 한 자루의 검과 함께 그 어두운 물결을 향해 걸어갔다.
휘둘러 베고, 찌르고, 부쉈다.
자신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자신의 운명이 멈출 때까지.
자신의 검이 막힐 때까지.
그리고 그는 승리했다. 수만에 달하는 군세를 홀로 멸절시킨 검성은 최후에 마계 대공과 공멸(共滅)했다.
수많은 도시, 수십, 수백만의 사람을 살린 끝에 그의 검은 꺾였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국가와 종교를 상관하지 않고 애도의 물결이 퍼져 나갔다.
신성 왕국의 ‘교회’는 검성의 희생을 기려 당대의 성인으로 받들었고 그의 유해를 수습해 성자(聖子)의 오른편에 안치했다.
제국은 왕국 연합과의 전쟁을 멈춘 채 마계와 맞서 싸울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솔직히 그 장면을 읽고는 펑펑 울었다. 다들 그런 경험이 있지 않나.
물러설 수 없는 길 위에 선 검성의 담담한 독백, 그리고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음에도 불러서지 않는 당당한 기백. 그것은 실제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아, 또 눈물 나려 그러네.”
하지만 의아한 점이 있었다. 검성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카데미 편이 끝난 이후다. 그전까지는 그렇게 비중이 없을 텐데 어째서 내 앞에 나타난 것일까.
“…울고 싶은 것은 난데.”
“뭐?”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익숙한 인영이 나를 반겼다.
“…티르빙?”
탁자 위에 앉아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티르빙이었다. 다만, 그 꼴이 아주 참혹했다.
“대체······.”
온몸에 난 무수한 자상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왼쪽 눈을 지나는 것과 오른쪽 옆구리에 그어진 상처였다.
쿨럭.
그녀는 피를 토했다. 바닥에 묻지 않고 허공으로 산화되긴 했지만, 기분 탓일까 비릿한 피 내음이 코를 찌르는 것 같았다.
“어제 그 영감탱이.”
그녀는 상처가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 영감탱이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뭐?”
티르빙은 나와 연결되어 의식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를 다치게 했다는 걸까.
“어제 네가 폭주한 이유를 나로 착각했을 테지. 씹어 먹을 노인네. 다음에 만나면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
“······.”
그녀의 말에 나는 입을 닫았다. 갑작스러운 폭주. 그것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터다.
그리고 지금 가장 범인일 가능성이 큰 것은 티르빙이다. 아니, 까놓고 말하자면 그녀밖에 없었다.
“하, 너까지 나를 의심해? 내가 아무리 네 몸을 빼앗으려 했지만, 그런 강제적인 각성은 원하지 않아. 그건 네 안쪽에서 일어난 무언가의 작용이지 결코 내 탓이 아니야.”
자신은 몇 번이나 나를 멈추려 했다며 티르빙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을 하는가 싶었지만, 시야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어젯밤 생겨난 수많은 상태창의 알림에는 그녀의 필사적인 경고도 섞여 있었다.
“그 노인이 아니었더라면 넌 오늘 아침을 맞이하지 못했을 테지. 하지만 그래도 용서가 되질 않아. 그동안 어떻게 회복했는데 나를 다시 이 꼴로 만들다니.”
검성은 아마 자신이 품고 있는 마기(魔氣)에 반응한 것이라며 그녀는 투덜거렸다.
“너는 내 의식 속에 자리하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지?”
“그 노인네는 괴물이야. 극에 달한 검사는 무엇이든 벨 수 있지.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든 마음이든.”
즉, 심검(心劍)의 경지인가.
무협지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다. 베고자 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베어버리는 검술의 극한.
아마 이기어검술을 뛰어넘는 경지로 알고 있는데 검성이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긴, 그러니까 마계 대군과 동귀어진을 할 수 있었겠지.’
“나는 한동안 수면에 들어갈 거야. 이 꼴로는 아무것도 못 하니까.”
“다시 일어나는 건?”
“글쎄, 저번엔 백 년이 조금 넘게 걸렸으니까 이번에도 비슷할 것 같은데?”
백 년?
터무니없이 긴 시간이었다. 그녀가 없다면 후에 있을 위기 상황에서 일어나는 두 번의 각성도 물 건너간다는 소리가 된다. 만약 각성하지 못하게 된다면 후반부에서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
“…나를 회복시킬 수단이 있긴 한데.”
그녀는 망설임이 서린 얼굴로 운을 띄웠다.
“알려줘.”
모 애니에서 나왔던 영령과 주인이 직접 연결되어 마력 공급을 해주는 방식이라면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다.
“날 만든 디렌이란 드워프를 찾아.”
“디렌?”
“아마 수백 년이 지났으니 본인은 이미 죽고 없겠지만, 드워프 장인의 이름은 그 후손이 이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어. 디렌의 후손이라면 분명 나를 고칠 방도가 있을 터.”
자신이 회복할 방법은 그뿐이라는 말을 끝으로 그녀는 눈을 감았다.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과 발끝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조금 뒤, 그녀의 모습은 전부 허공에 스러졌고, 볼품없는 철검 한 자루만이 그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것엔 신살의 마검다운 기품도, 베지 못할 것이 없는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티르빙?”
조심스레 다가가 검을 뽑으려 했지만, 검신에 녹이 슨 탓인지 뻑뻑하기 그지없다. 어떻게든 힘을 주어 검을 꺼내니 검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쇳덩어리가 나를 반겼다.
“······.”
그것을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어도 정작 내가 위험에 빠지자 제 몸을 사리지 않고 나를 막아 세웠다.
비록 그것으로 인해 검성에게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나는 은혜는 두 배로, 원수는 열 배로 갚는 것이 신조인 사람이다. 이미 그녀에게 받은 은혜가 적지 않다. 그러니 갚아야 하는 것이 도리겠지.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가벼운 노크가 들려왔다. 나는 들고 있던 검을 다시 검집에 넣고 침대 한쪽에 숨겨놓은 뒤 방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네.”
자글자글한 주름에 흰 백발이 흘러내렸지만, 그 눈빛만은 정정하기 그지없다. 자리를 비키자 검성은 실례하겠다는 말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몸은 좀 괜찮은가.”
그는 손에 보따리 하나를 들고 왔다. 무엇인가 싶어 그것을 바라보니 싱긋 미소를 지으며 탁자 위에 내용물을 풀어놓았다.
“포션?”
“어제 그 난리를 쳐놓고 몸이 정상일 리가 없지. 부족한 기운을 회복시켜 주는 비약이다.”
…아, 내 신조는 또 하나 있다.
오는 은혜는 막지 않는다. 남의 마음을 거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