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202)
망나니학 개론-203화(203/300)
#203
“…….”
담담한 태도로 시합장을 내려가는 에레이라의 모습을 본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기껏 불가시의 가호까지 건네주며 대비한 것이 무색해지게 그는 너무나도 순순히 기권을 선언했다.
마찬가지로 시합장을 내려온 페트라 역시 머쓱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에피타이저를 너무 즐기면 메인 디시의 맛이 퇴색하느니 뭐라네요.”
“나도 들으라는 듯이 대놓고 말하던데.”
그렇다고 지금 당장 움직일 기색은 없어보였다.
대체 뭘 준비하고 있는 걸까.
원작에선 일루전 필드를 이용해 거대한 미로를 구성하는데, 갖가지 함정과 적들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다.
엑스칼리버를 휙휙 휘두르며 지나가니 속절없이 무너지긴 했지만, 지금 나타나는 녀석들은 신성력에 내성을 지녔다.
‘앨리스라면…….’
마스터 직전에 다다른 농밀한 용사의 힘이라면 에레이라를 쓰러뜨릴 수 있을까.
이번 학술제의 목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앨리스의 각성이다. 그렇기에 마인의 습격이 일어나도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은 없었다.
“저는 결승 준비하러 가볼게요. 잠깐 휴식했다가 곧바로 진행한다고 하네요.”
“필드는 결정됐어?”
“아니요, 시합 시작 후에 결정되는 거라고 저도 듣지 못했어요.”
시합이 개시되기 전까지 그녀는 잠시 막사에서 대기하게 되었다. 그 틈에 내게 빌린 불가시의 가호를 다시 돌려주려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입고 있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하지만…….”
“됐어. 여기 나타난 마인이 모조리 덤벼들어도 날 어찌하진 못하니까.”
원작에서 페트라가 죽는 에피소드는 좀 더 뒤의 일이었으나, 일단 대비는 해놓는 것이 좋겠지.
곧 사수좌의 토너먼트 검술 부문의 결승이 시작되었다.
필드는 평범한 땅이었지만, 그들이 딛고 선 바닥이 가장자리서부터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아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저갱이다. 떨어진다면 곧바로 패배처리 되는 듯싶었다.
관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다들 환호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리 역시 아카데미 지정 특별석에 자리해 둘의 시합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이길 것 같아?”
“흠.”
데시아의 말에 베르딘이 침음을 내뱉었다.
시합 개시 직후 둘은 천천히 원을 그리며 대치를 이뤘다.
그녀들이 익히고 있는 검술은 내가 전수해 준 검성류 오의와 피오레류였다.
서로 대결을 많이 했었으니 각자의 공격 방식은 훤히 꿰고 있을 터.
“그래도 앨리스 선배가 아닐까. 당해봐서 잘 알잖아.”
베르딘의 대답에 루인과 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풍기 위원으로 있는 그들은 여유가 있을 때마다 대련이란 명목으로 호되게 당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만큼 앨리스의 강함을 잘 알고 있겠지.
“그래도 페트라 선배도 만만치 않으시더라. 위압감만은 앨리스 선배랑 비슷할 정도였어.”
“하긴 매번 둘이 대련할 때도 끝까진 거의 박빙이었으니까.”
곧 누가 이길지를 주제로 갑론을박이 일어난다. 그 와중에 누군가 옷자락을 잡아서 고개를 돌리니 에스메랄다가 의문 어린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이길 것 같아요?”
“…글쎄.”
아무래도 실력 면으로 보자면 앨리스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은 사실이나, 페트라도 나름대로 한 수가 있다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해오지 않았던가.
내가 작게 웃으며 입을 다물자 에스메랄다는 더욱 아리송해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바바밧-!
그와 동시에 둘은 땅을 박차며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그 탓에 땅이 부서지는 속도가 가속됐지만, 그들은 일절 신경 쓰지 않은 채 검을 휘두르는 것에 신경을 집중했다.
“…살벌하네.”
루인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한다. 그만큼 앨리스와 페트라의 공방은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마치 사생결단할 원수를 눈앞에 둔 듯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며 어떻게든 틈을 만들려 기회를 노렸다.
원래는 한 쌍일 터인 홍련과 백련이 서로의 목을 물어뜯었고, 그 긴박함에 시합을 지켜보고 있던 관객은 모두 압도되어 있었다.
“…….”
나는 팔짱을 낀 채 그것을 바라보았다.
페트라는 지금 제 전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몰래 더 노력했는지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월등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 경지는 분명 앨리스와 같은 익스퍼트 최상급이었다.
그녀 역시 설마 이렇게까지 쫓아왔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둘 사이의 차이는 아직 따라잡기엔 조금 먼 것이었다.
파바바밧.
이대론 안 되겠다 느꼈는지 페트라의 검 위에 서린 붉은 서기가 더 짙어진다. 동시에 그 주위로 장미잎이 휘날리며 화려한 광경을 펼쳐냈다.
척.
검 끝이 땅과 수평으로 눕혀졌다. 두 손으로 그것을 당긴 그녀는 이내 얼마 남지 않은 크기의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오의.”
그 나지막한 음성에 앨리스는 검을 기울여 경계하는 모습을 취했다.
얼핏 보면 검성류 오의의 검식인 것 같지만, 무언가 다른 것이 가미되어 있었다.
‘제 비전 검술을 섞은 건가.’
“Comets-.”
마치 혜성이 떨어져 내리듯 그 붉은 궤적은 기다란 꼬리를 그려냈다.
그 검식은 처음 보는 것인지 앨리스는 두 눈을 크게 떴지만, 곧 작게 웃으며 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피오레류.”
그녀 역시 내게 배운 검식의 자세를 취했다.
한계까지 검을 끌어당긴 뒤, 마치 화살을 쏘아 보내는 것처럼 날카롭게 그것을 찔렀다.
“Spen!”
일 섬의 찌르기와 혜성이 충돌한다. 그 중앙에서 눈부신 폭발이 일어나 장내를 휩쓸었다.
드드드드-.
그 충격의 여파는 관객석까지 도달해 흔들었고, 자욱하게 먼지까지 일어난 탓에 어떻게 상황이 결착이 일어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루인 녀석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눈을 크게 뜨며 안쪽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내 쪽은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내부의 상황이 훤히 보였다. 그녀들은 조금 전의 공격으로 결착이 나지 않았는지 시야가 제한된 상황에서도 육감에 의존한 채 서로 공방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곧 땅을 뒤흔들던 충격이 가라앉으며 들리는 소음에 둘의 싸움이 아직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관객들은 환호를 내지르며 누군가의 승리를 기원했다.
캉-!
순간 날카로운 한줄기 소음이 귀청을 때렸다.
그와 동시에 허공으로 붉은 무언가가 치솟아 올랐고, 이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홍련.”
붉은 검신을 가진 검이 덩그러니 그곳에 놓여 있다. 시합장 위를 바라보니 검을 놓쳐 주저 앉은 페트라의 목에 앨리스의 새하얀 백련이 겨눠져 있었다.
삐이익.
곧 승리자가 선포된다. 일루전 필드가 해제되고 페트라는 저 멀리 날아간 제 검을 주워 든 채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앨리스의 앞에 섰다.
“아깝네, 그래도 철렁하게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마지막엔 진짜 철렁했어. 설마 언니가 그런 걸 숨기고 있을 줄이야.”
앨리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정말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끔 검술 수련을 봐주긴 했지만, 홀로 그런 것을 연마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직 제대로 가다듬어지지 않아 정밀도가 떨어지긴 하는데, 숙련도가 조금만 높았으면 몰랐겠네.’
등 뒤로 감춘 앨리스의 손이 옅게 떨리는 것을 보니 그 기술을 정면에서 받아낸 충격이 작지 않은 듯싶었다.
검술 부문의 우승자가 선포되는 과정은 간략하게 끝났다.
어차피 시상식은 학술제의 마지막 날에 진행될 예정이니까.
“나 어땠어?”
많은 이의 축하를 받고 온 앨리스는 눈을 빛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것에 나는 거칠게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미소 지어 주었다.
“수고했다. 뭐, 당연히 우승할 거라곤 생각했지만.”
“그렇지?”
하지만 밝게 미소 지으며 말해오는 것이, 정말로 기쁜 듯싶다. 그것에 난 그녀의 귓가로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그렇다고 잊지는 마. 이후에 마인 녀석들이 어떤 식으로 수작 부려 올지 모른다는걸.”
“…알겠어.”
성국에서 흘러나간 정보 덕분에 그들의 이목은 나에게 쏠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용사의 힘이 내가 아니라 앨리스에게 깃든 것을 알게 된다면 순식간에 손을 써올 터.
사수 좌의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고 들떴다가 방심이라도 한다면 본전조차 찾지 못하는 것이다.
“내일부터는 마법 부문이 시작하지?”
“그래. 레이시스가 있는 이상 우승은 무리겠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지.”
이전에 그녀와 모의전을 했을 때 느꼈다시피 아직 마법을 사용해 싸우는 것엔 숙련도의 차이가 컸다.
유리아 정도면 어떻게 마나의 양으로 비벼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레이시스는 아쉽게도 규격이 달라 힘들 듯싶었다.
“뭐, 힘내! 나는 애들이랑 놀러 갔다 올게!”
제 할 일이 끝났기 때문인지 그녀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훌쩍 커버린 딸아이의 뒷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처구니없는 감상에 쓴웃음을 품은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
어딜 둘러보아도 페트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패자가 있을 곳은 무대의 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의 기운을 찾자니 회장 밖, 비교적 인적이 드문 구석진 곳에 홀로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
벤치에 앉아 있던 그녀는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린다. 그러곤 황급히 눈가를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게 티가 나지 않지만, 눈가가 살짝 불그스름하다. 페트라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몰래 나왔는데 또 어떻게 찾아오셨네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약혼자인데.”
당연한 것 아니냐며 어깨를 으쓱하니 그녀는 피식 웃었다.
“질 거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뭔가 분하잖아요.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니까 패배를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내가 약하다는 걸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고.”
“그래도 잘 싸웠어.”
“…그러니까 더 분해요. 그 차이가 눈에 보여서.”
다시금 눈을 닦은 그녀는 제 검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제일 먼저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그 나지막한 본심에 나는 가는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이토록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기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천천히 해,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조급해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 * *
한 가지 착각한 것이 있다면 이 이후의 전개도 전과 같이 원작의 큰 틀을 벗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 중간중간 세세한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변수가 생겼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라는 존재.
그리고 뒤바뀐 주인공의 존재.
그 두 가지 요소의 개입만으로 많은 흐름이 바뀌었으니.
하지만 이번만은, 정말 예상외의 것이었다.
파바바밧.
사수좌의 토너먼트 마법 부분 결승.
유리아를 꺾고 올라온 나.
그리고 에스메랄다를 꺾고 올라온 시니어 아카데미의 3학년을 가볍게 무찌른 레이시스.
그 둘의 대결 중 하늘이 갑작스럽게 어둠에 뒤덮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원작을 따라 마지막 날인 시상식 때 사건이 터질 줄로만 알았던 나는 일순간 사고에 혼란이 왔다.
‘절대적인 개연성의 효력은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 건가?’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것이 정리되기도 전에, 한 존재가 내 앞에 내려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