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216)
망나니학 개론-217화(217/300)
#217
남은 방학이 절반 조금 더 넘게 남았을 때가 돼서야 나는 다시 내 영지로 돌아왔다.
아쉽게도 원하는 각성은 이루지 못했지만, 언젠가 도래할 그것을 위한 경험치 축척은 대충 끝난 것 같았다.
내가 자릴 비운 동안 다들 열심히 수련한 것인지 한층 더 성숙한 기운으로 날 반겨주었다.
검성의 영지에서 거칠게 구른 탓인지 온몸의 삭신이 쑤셨다.
실비아 덕에 상처는 전부 치료됐으니 환상통에 불과할 터지만, 실제로 몇 번이나 잘려 나갔다가 다시 붙었으니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 레이오스.”
오랜만에 돌아온 방을 정리하고 있던 찰나, 누군가 날 불러왔다.
고개를 돌리니 막 수련을 끝낸 차인지 지친 표정의 레이시스가 문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네.”
“왔으면 인사라도 해주지 그랬어요.”
“수련 도중인데 방해하는 것도 그렇잖아.”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니 그녀는 작게 웃으며 제 몸이 클리어 마법을 걸었다.
그러자 땀에 살짝 젖은 옷들이 절로 말라가며 몸에 붙어 있던 불순물들이 정화되었다.
“그것도 그러네요.”
어깨를 으쓱인 그녀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와 침대 가장자리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가벼운 인사를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낼 줄 알았기에 의아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리자, 레이시스는 살짝 머뭇거리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사실 가문에서 연락이 왔어요. 지금 돌아가는 정세가 심상치 않은 것 같으니 당신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전해달라며.”
“…그런가.”
그녀의 아버지인 셰필드 백작 역시 권력의 중추에 자리했다. 그러는 만큼 황궁에 감도는 비정상적인 분위기를 감지한 것이겠지.
임시로 국정을 맡은 카리우스와 재상이 애써 사실을 감추며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였지만, 귀족들의 눈치가 어디 보통인가.
슬슬 잡음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에게는 내가 답장을 해놓을게. 그것보다 다른 아이들을 식당에 모아주겠어?”
“알겠어요.”
내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군말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황궁에서의 묘한 기류는 곧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와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칠 터.
그렇다면 그 전에 먼저 이들을 휘어잡아야 했다.
곧 식당에 아이들이 전부 모였다는 이야기에 나는 살짝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곳을 향했다.
며칠 만에 보는 얼굴들이었기에 다들 반가운 표정이 훤했다.
다만, 나 때문에 고생했던 실비아만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눈을 흘기고 있었고, 유리아 쪽 역시 그저 가만히 입을 다문 채 이쪽을 바라보았다.
유리아와의 문제는 아직 풀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도망치고 있다고 해야 할 터.
언젠가는 풀어야 하는 이야기지만, 다음에도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 없기에 선뜻 말을 걸기 힘들었다.
나는 그런 착잡한 속내를 숨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먼저 말하자면 내 아버지, 그러니까 황제가 며칠 전을 기점으로 의식을 잃었다.”
쿠웅.
모두의 얼굴을 보자니 그런 효과음이 딱 어울릴 것 같았다.
“아니, 그런 중요한 걸 뭐 그렇게 담담하게……!”
페트라 빼고 다들 놀람을 토해냈다.
황제가 쓰러졌다.
하긴, 생각해 보면 이들에게 마족이니 마계이니 하는 것보다 더 큰 파장으로 다가오겠지.
그렇게 웅성거리던 와중, 앨리스의 시선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태도로 조용히 앉아 있는 페트라에 향했다.
“그녀는 황실에서 전령이 왔을 때 나와 같이 있었어. 하여튼 요 근래 자리를 비웠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황제가 쓰러졌다는 사실은 이제 연기가 피어오르듯 스멀스멀 올라올 터.
그것을 신호탄으로 이제 대륙 각지에서 마계 세력이 날뛰기 시작할 것이었다.
물론 그 녀석들뿐만이 아니었다.
욕심 가득한 귀족, 뭐라도 하나 뜯어 먹을 것이 없나 눈치를 보는 승냥이, 그리고 암중에 숨어 양지로 나갈 틈을 보는 세력들까지.
그 자체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누구 뒤에 마인 세력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지 않나.
“앞으로 시끄러워지겠지.”
카리우스를 필두로 황궁의 세력이 중앙을 꽉 잡고 있으나, 제국은 넓고 그 주위 나라들 역시 욕심이 가득했다.
분명 끝에서부터 갉아먹어 올 테고 조금씩 균열이 생겨나는 일은 막을 수 없겠지.
아마 이 부분만은 원작 그대로 흘러갈 것 같았다.
“저희는 뭘 해야 하나요?”
유리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한 쌍의 투명한 눈동자가 날 향했다. 평범한 질문이었지만, 왜인지 그렇지 않은 분위기가 풍겼다.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네?”
예상한 대답이 아니었는지 그녀의 표정에 의문이 깃들었다.
유리아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랏일은 위에서 알아서 잘하겠지. 카리우스 형님이 아버지를 대신해 귀족들을 휘어잡고 있고, 재상이 옆에서 도와줄 테니.”
“…레이오스는 황제 자리에 욕심이 없나요?”
그러자 엘리시아가 화색을 띤 채 물어왔다.
…보통은 황제 자리에 욕심이 없으면 실망해야 정상이 아닌가? 왜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지금 당장은.”
물론 황제가 된다면 이점은 크겠지.
하지만 막중한 자리인 만큼 할 일도 산더미 같을 터. 국정에 서투른 나에겐 지옥 같은 나날이 아닐까 싶다.
거기에 굳이 귀찮은 상황이 된 가운데 내가 나서서 무언가를 할 필요가 있을까.
“솔직히 마족이니 마계니 하는 것이 끝나면 그냥 영지에 틀어박혀서 하고 싶은 거나 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 내 욕심인데.”
가끔 심심해지면 대륙 이곳저곳 돌아보면서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물론 마계 침공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으니 그저 희망에 불과했지만.
“우리가 나설 때는 마계와의 게이트가 연결되었을 때다.”
내가 처음부터 누누이 말했던 그날.
대륙 곳곳에 게이트가 연결되고 마계 군세가 쏟아져 나왔다.
제일 처음은 리베라 제국의 수도인 폴포아르텔의 근교. 제국이 다른 나라와의 분쟁에 신경이 팔린 틈을 타서 나타난 그것들을 막기 위해 검성이 희생되었다.
“이미 지금조차 내가 알던 미래랑은 많이 어그러졌어. 그러니 앞으로의 이야기들 역시 바뀐 것들이 많겠지.”
황제가 쓰러진 것이 일 년도 더 이르게 진행되었으니 마계의 침공도 머지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때까지 기다리면서 준비하면 되었다.
그런 면에서 아카데미는 좋은 방패막이가 되었다.
평소에는 크리스의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었고, 여차하는 일이 생겨도 그녀 본인이 나서면 어지간한 적은 어렵지 않게 격퇴해 낼 수 있으니.
“일단 여유가 있을 때 다들 고향에 내려가. 이정도 수준이면 전부 기본은 된 것 같으니.”
너무 내 영지에만 붙들고 있는 것도 미안했기에 그렇게 말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방학이 돼서 본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 보다. 다만, 앨리스만은 물끄러미 날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와 같이 지구의 출신으로 이곳에 연고가 없었다. 그렇기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여 왔다.
“오랜만의 고향인가. 이왕 이렇게 된 것 양가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야겠지.”
있었는지도 몰랐던 디아크의 말에 마리아가 부끄러움을 표하면서도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암울한 미래가 예상되는 클리셰 같은 대사를 내뱉은 것 같지만, 자기가 혼자 알아서 잘하리라 믿었다.
디아크와 마리아를 시작으로 전부 각자의 고향으로 내려갔다.
점심이 지났을 때쯤 대부분 저택을 떠났고, 남은 것은 나와 앨리스, 그리고 엘리시아뿐이었다.
“엘리시아.”
“아.”
막, 짐정리를 끝낸 듯 허리를 펴던 그녀는 내 부름에 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저번에 말했지. 네 아버지께서 날 보고 싶어 하셨다고.”
“아, 네. 바쁘다고 거절해 두긴 했었는데…….”
무언가 살짝 미련이 있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봐 왔기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브리튼에는 나도 동행할게.”
“정말요?!”
“…뭐야, 그러면 나는?”
엘리시아와의 대화 중간에 앨리스가 불쑥 나타났다.
난 이미 그녀의 기척을 알고 있었지만, 엘리시아는 움찔하며 가슴에 손을 얹고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놀랐잖아, 앨리스.”
“미안, 나만 빼놓고 뭔가 이야기 하길래.”
앨리스는 가늘어진 눈으로 나와 엘리시아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것에 나는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밀며 말했다.
“일 때문에 가는 거야. 그리고 너도 할 게 있어.”
“나도? 같이 브리튼에 가는 거야?”
“아니, 너는 검성의 영지로 가야지.”
“…뭐?”
“이제 막 소드 마스터에 올랐으니 죽어라 깨달음을 정리해도 모자랄 판국에 놀러 갈 생각을 했어?”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앨리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소드 마스터는 이제 막 시작일 단계이니.
나만 보아도 초입에서 이미 몇 단계는 건너뛰고 완숙에 이르렀다. 그래도 부족해서 힘껏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발악을 해도 아직 검성과의 격차는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니, 앨리스의 투정은 사치에 불과했다.
“…….”
시선을 내리깐 그녀는 마치 애처럼 볼을 부풀렸다.
그렇다고 속이 뻔히 보이는 수작에 넘어갈 리가 있을까.
“스승님께는 이야기를 해놓았으니까 잘 지도해 주실 거야. 실비아도 있으니까 심심하진 않을 거고.”
“…갔다 오면 이번에야말로 나랑 놀아주는 거다?”
“방학 끝날 때까지는 원 없이 놀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약속한 거야!”
그러자 앨리스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실비아가 그녀를 데리러 왔고, 둘은 함께 검성의 영지로 훌쩍 떠났다.
“레이오스 님, 짐의 정리가 끝났어요.”
“고마워, 이번엔 다들 얼마간 저택을 떠나 있을 것 같으니까 너도 이참에 휴가 다녀와.”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오라는 말에 파르시는 두 눈을 빛냈다.
“그러면 사흘 정도만…….”
“한 열흘 정도 있어도 괜찮아. 너 말고 다른 이들도 있으니까.”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밝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여오는 파르시를 뒤로 한 채 그녀가 챙겨준 물건들을 모조리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곤 저택 입구로 가자 기다리고 있던 엘리시아가 나를 맞아주었다.
“그럼 갈까요?”
그 옆에 서서 나란히 걷자니 그녀는 뭔가 쑥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해왔다.
“사실 요즘 이래저래 있었잖아요. 당신이랑 저랑 단둘이 있게 된 것은 오랜만이네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
하긴 한동안은 페트라와 붙어 다녔고, 엘리시아의 말대로 다른 이들과도 이래저리 일이 있었지만, 그녀와는 브리튼 이후 딱히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련할 때야 다 같이 있었고, 단둘이 뭘 할 시간이 없었지 않았나.
덥썩.
돌연, 엘리시아가 내 손을 잡아왔다.
그것에 살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그녀는 새빨갛게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 이 정도 투정은 부려도 괜찮겠죠?”
“그래.”
검을 든 엘리시아는 호쾌하기 짝이 없었다.
제 몸만 한 크기의 대검을 휙휙 휘둘러 힘으로 찍어 누르는 스타일이었으니.
하지만 지금 내 손을 잡은 그녀는 그저 가녀린 소녀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