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252)
망나니학 개론-253화(253/300)
#253
무아지경으로 마계 군세를 휩쓸었다.
일 검을 휘두를 때마다 수십, 수백의 마물이 잿더미가 되었고, 그때마다 다시 차오르는 힘에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강한 적이 내 앞을 막을수록 내 힘은 더 강해졌다.
얼마를 그렇게 홀로 독주했을까,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긴 뿔 나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을 때였다.
지천에 올라 있던 태양은 어느새 저 지평선 너머로 저물어 가고 있고, 전장엔 석양이 물들어 가며 스러진 이들의 몸을 덮었다.
자신을 무슨 휘황찬란한 이름의 장군이라 칭하며 앞으로 나선 마족의 목을 베는 것을 끝으로 나는 검을 내렸다.
“후우…….”
그렇게 날뛴 보람이 있는 것인지 마계 군세는 진군을 멈춘 듯하다. 시체를 딛고 서니 저 멀리 멈춰 선 채 진영을 구축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재밌었어.] [마스터, 괜찮으신가요?]쉴 새 없이 날뛰었음에도 여전히 신이 난 티르빙과 날 걱정해 주는 리버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체력이나 마나의 소모는 거의 없어.”
확실히 마검은 마검인 듯싶다.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회복되는 힘은 늘어났고, 종래엔 뒤를 생각하지 않고 싸울 수 있을 정도로 신나게 날뛰었다.
하지만 육체와 정신의 피로는 별개의 것.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상태창을 불러냈다.
[상태창]이름- 티르빙
등급- 신화
성향- 마(魔)
칭호
-신살
-주인을 파멸시키는
-티르의 손가락
제작- 디렌(드워프)
*소유주 레이오스 폰 리베라와 링크되어 있습니다.
전과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는 인터페이스였지만, 그 내부는 살짝 바뀌었다.
“신화급이라.”
유물급이었던 티르빙의 등급이 각성을 거쳐 몇 계단이나 올랐다.
[내가 말했잖아. 나도 신화의 마검이었다고.]“그랬지. 그리운 소리네.”
하긴 붙은 칭호 중 무려 하나가 ‘신살’이다.
신을 죽인 마검이라 칭해질 정도이니 신화급이 아니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이야기겠지.
“전하-!”
곧 성벽 쪽에서 에른스트 백작을 비롯한 몇몇 소드 마스터들이 이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미 주변의 마물은 전부 불에 타 버린 직후라 딱히 경계할 필요 없었다.
그렇기에 슬쩍 미소를 지으며 의기양양한 태도로 나 역시 성벽을 향했지만,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이들의 얼굴엔 긴장과 당황함이 서려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것에 난 직감적으로 무언가가 터졌음을 깨달았다.
설마 수도 말고 다른 곳에도 동시다발적으로 게이트가 열린 것인가?
원작에선 이곳의 전쟁을 끝으로 본격적인 마계의 침공이 시작된다. 그렇기에 전력을 이곳으로 끌어모은 것이지만, 그런 내 판단이 틀렸다면?
“저, 전하. 그것이…….”
하지만 곧 내 앞에 엎어질 듯이 달려와 숨을 헐떡이며 내뱉어진 이야기들에 나는 다른 의미로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랑 형님이?”
“예, 생존자인 듯한 로열 나이츠가 전용 회선으로 긴급 통신을 전해왔다고 합니다. 검성께선 그 소식을 듣고 바로 출발하셨지만…….”
황가의 은신처가 습격당했다.
내부에 자리하고 있던 로열 나이츠와 마도사들은 전부 소식이 두절. 어떤 상황인지 파악조차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보고를 듣는 내 입술이 바짝 말랐다.
길가메시 황제는 작중 스토리가 2부에 들어섬에 따라 원인 모를 이유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황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은신처에서 요양해 있다.
더군다나 지금은 황궁의 습격 건으로 카리우스까지 그곳에 같이 누워 있는 상태.
신체적인 상처가 큰 것은 아니지만, 마기에 오염당해 한동안 움직이기 힘들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검성께서 가신 이상, 우리는 이곳에 집중한다.”
나는 티르빙의 권능을 해제하며 답했다.
몸을 뒤덮었던 마기가 순식간에 그녀의 위로 흡수되고 다시 원래 형태의 검신이 세상으로 드러났다.
지금 당장 허둥지둥하며 움직이면 혼란을 초래할 뿐이었다.
검성이 갔으니 어떤 식으로든 결과가 날 터.
해결되면 그것으로 다행이고,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가 아니라 누가 갔어도 같은 이야기가 됐을 것이다.
“아직 적의 군세는 많다. 그러니 관련된 이야기는 이제부터 일절 엄금한 채 마계 군세와의 전쟁에 심력을 쏟는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에른스트 백작을 비롯한 장군들이 다시 기세를 다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들 역시 경지를 이룬 자.
황제가 관련된 사건에 잠시 이성을 잃었지만, 돌려 말하는 내 질책에 정신을 차린 듯했다.
“일단 돌아가지.”
곧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밤이 된다. 태양 빛이 마계 군세를 억제하니 마니 하는 이야기는 기억 속에 없지만, 그래도 방심하고 있을 수는 없다.
“수고했어.”
성벽으로 돌아가니 앨리스가 물을 건네주었다. 고맙다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그것을 들이켜니 그만큼 좋은 것이 없다.
“성벽은…….”
슬쩍 주위를 둘러본바, 적지 않은 피해를 본 듯하다. 사망자도 적지 않을뿐더러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부상자겠지.
일반 창칼에 당했다면 포션이나 약재로 치료하면 그만일 터이지만, 마기에 당했다면 이야기는 살짝 달라진다.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실력자라면 체내에 침투한 마기를 몰아낼 수 있으나, 일반 병사에게까지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실제로 병상에 누워 신음하는 것은 어디를 다친 이들보다 마기에 오염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 대다수였다.
다행인 점이라면, 그 사이로 신성 왕국의 사제와 성기사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마워, 도우러 와줘서.”
“…당연한 일이에요.”
한쪽 구석에서 마기에 오염된 병사를 치료하던 실비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곧 피 묻은 손을 털어 내곤 무릎을 짚으며 일어나 내 쪽을 바라보았다.
“오히려 늦어서 이쪽이 미안한걸요.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피해가 적었을 텐데.”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지.”
마계와 전쟁을 하는 일이다. 신성 왕국은 대륙 최후의 보루. 준비에 드는 시간이 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해해 주시니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그쪽이 그 마검인가요?”
“아.”
실비아의 눈짓에 나는 허리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성검 엑스칼리버만을 사용한다고 알고 있을 터.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신성 왕국의 성녀에게 내가 성검과 동시에 마검을 사용하고 있다는 소릴 하기엔 살짝 껄끄러운 면이 있었다.
“뭐, 괜찮아요. 대충 이야기는 들었거든요.”
“그런가, 다행이네.”
전장을 그렇게 활개 치고 다녔으니 모를 리가 없을 터.
실비아는 살짝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마검을 바라보았지만, 다른 이들이 잘 설명해 준 듯 더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귀엽네. 내 경험상으론 저런 아이일수록 타락하면 더 엉겨 오는 타입이더라.] [성녀를 속된 말로 모욕하지 마세요.]곧 그런 실비아를 두고 머릿속에서 티르빙과 리버가 투닥거리며 다투기 시작했다.
그것에 쓴웃음을 지을 찰나, 뒤쪽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앨리스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 쳤다.
“괜찮아? 신나게 날뛰던데.”
“보다시피 다친 곳은 하나도 없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이미 막사로 들어가서 쉬고 있어. 아, 페트라 언니랑 레이시스는 자기 가문 사람들을 만나러 갔고.”
“그런가.”
“실비아, 우리도 그럼 일단 쉬러 가볼게.”
“네, 고생하셨어요.”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환자를 돌보러 갔다.
“가자.”
앨리스는 내 팔을 붙잡고 막사 쪽으로 이끌었다. 다만, 그 방향은 내가 알던 곳과 조금 달랐다.
“여긴?”
부상자용 예비 막사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준비해 둔 것일 터인 그 안으로 그녀는 내 몸을 밀어 넣었다.
“여기라면 당분간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까 허세 부리지 말고 누워.”
“…어떻게 알았지.”
그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은 채 곧바로 침대 위로 쓰러져 내렸다.
솔직히 말해서 한계였다.
엑스칼리버의 전용 스킬은 단 일격에 내 전심전력을 쏟아붓는 것이었지만, 티르빙의 전용 스킬은 그것보다 광범위했고, 지속 시간도 비교할 수 없이 길었다.
마물의 군세를 쓰러뜨림으로써 체력과 마나가 회복된다고 했지만, 정신력은 이야기가 달랐다.
“하아…….”
한계까지 몰아붙였던 긴장을 풀자 지끈거리는 통증이 줄어든다. 동시에 몸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빠지며 절로 깊은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아무리 페트라 언니랑 약혼한 사이라고 해도 알고 지낸 밀도는 내가 더 높아. 그러니 모를 수가 없지.”
앨리스는 무엇이 그리 의기양양한 것인지 침대에 누운 내 옆에 걸터앉아 슬며시 이쪽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난 그것을 제지할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흔들리는 의식 가운데 따뜻한 그녀의 손길을 느꼈을 뿐.
“…허세를 부릴 수밖에 없지. 이제 정말로 나 혼자밖에 없으니까.”
약해진 마음을 틈타 절로 속내가 흘러나왔다.
길가메시 황제와 카리우스 황자의 거취가 불투명해진 와중, 제국의 중심을 지키는 것은 이제 정말로 나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
겉으로 이야기는 퍼지지 않았지만, 성벽 위에 선 병사나 그들을 지휘하는 기사, 그리고 에른스트 군단장을 비롯한 대부분은 그것을 알고 있을 터.
나 역시 그 군중의 한 명이었었기에 중심이 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 과장되고 화려한 모습으로 날뛰었고, 돌아올 때까지 굳건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래도, 지금은 조금 쉬어.”
다만, 그녀만은 속일 수 없었나 보다.
날 위로하듯 속삭여 오는 그 목소리를 끝으로 내 의식은 깊은 수면 아래로 잠겨 들었다.
* * *
둥. 둥. 둥.
거친 북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저절로 눈이 뜨였다.
밤중이 된 것인지 누워 있던 막사 안쪽은 컴컴하기 그지없다. 마법으로 몸을 깨끗이 하고 밖으로 나서니 부동자세로 입구를 지키고 있던 두 인영의 모습이 보였다.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미안하군. 이때까지 호위를 서 준 건가.”
“당연한 일입니다.”
“이제 일어났으니 되었다. 가서 쉬도록.”
“명을 받듭니다.”
가야온 재상이 호위를 붙여준 듯했다. 내 말에 기사들은 깊게 고개를 숙이며 다시 자신들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은 어둠이 빼곡하게 뒤덮었지만, 성벽은 그렇지 않다. 그 앞까지 수십 수백 개의 불꽃이 주위를 밝혔고,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며 다가올 적들과 싸움을 준비하는 듯했다.
나는 그들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기척을 감춘 채 앞으로 나아갔다. 몇 번의 도약으로 성벽에 뛰어올랐고, 그대로 망루로 향하자 에른스트 군단장을 비롯한 장군들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경들이 수고가 많군.”
“아닙니다, 전하 덕분에 앞서 있었던 전투에서 피해가 적을 수 있었으니.”
망루 난간에 선 나는 아직도 저 멀리 까마득하게 지평선까지 뒤덮으며 꿈틀거리는 마계의 군세를 바라보았다.
그쪽 역시 시뻘건 불꽃이 제 군세의 경로를 밝히고 있다. 다만,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금방이라도 진군하려는 것처럼 요동치며 투기를 내뿜어 왔으니.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옆으로 다가온 에른스트 군단장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쪽의 일은?”
“검성께서 그곳에 당도하셨을 땐 이미 시체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를 추적하겠다고 두 시간 전쯤 남기신 것이 마지막 연락이었습니다.”
“흠.”
이곳의 상황 역시 그리 좋지 않음을 검성 역시 모르진 않을 거다. 그럼에도 그 뒤를 쫓아 나섰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일 터.
전에도 몇 번 말했듯 리베라 황가의 핏줄은 특별하다. 그것을 매개로 한다면 마계 군주급의 고위 마족을 소환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
‘그리고 황제쯤 되는 이의 격이라면…….’
머릿속으로 마왕이라는 단어가 무겁게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