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253)
망나니학 개론-254화(254/300)
#254
마계 군세가 코앞에 당도하니 밤하늘의 어둠도 평소보다 짙어진 것 같았다.
나 혼자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닌지 성벽에 선 이들의 표정도 한껏 경직되어 있었다.
낮의 승리는 나로 비롯된 요행에 불과한 것.
피해는 적었지만, 성벽 한 구역이 마물의 공세에 뚫리는 지경까지 갔었다.
그들 역시 앞으로 남은 싸움이 더 힘든 것임을 잘 알고 있을 터.
부우우우우우우우-.
낮에 들었던 기다란 뿔 나팔 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진다. 그것이 진군 신호기라도 한 듯 마계 군세는 어둠을 꿰뚫고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어어어어어어어.
기괴한 울부짖음이 성벽 위에 닥쳐왔다.
꼴사납게 겁에 질려 쓰러지거나 울음을 토해 내며 달아나는 이는 없었지만, 모두 자신의 병장기를 손이 새하얘질 정도로 붙잡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좋지 않은데.”
에른스트 백작 역시 경직된 표정으로 흘깃 주위를 둘러보았다.
낮에도 그랬지만, 본격적인 싸움이 일어나기 전부터 얼어붙어 있으면 되는 것도 안 되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망루의 난간으로 발을 내디뎠다.
가볍게 손을 움켜쥐니 엑스칼리버가 소환되었다.
나는 곧바로 그것을 세워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파아아아앗-!
눈부신 빛이 검신 위로 뿜어져 나와 성벽 위에 깃든 어둠을 몰아냈다.
일순간 낮이 된 것 같은 찬란한 밝음에 저 너머를 바라보던 이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이쪽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리버.’
엑스칼리버는 내 의지에 따라 공명하며 그들의 마음에 깃든 두려움과 공포를 몰아냈다.
일시적인 효과이겠지만, 조금이나마 효과가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병사들은 엑스칼리버의 신성에 환호를 지르거나 방정맞은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결연한 표정과 함께 제 무기를 다잡는 것으로 화답했다.
쿠구구구구궁.
마계 군세가 닥쳐오는 것보다 먼저 수십 개의 불덩이가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렸다.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인지 그 숫자는 낮보다 몇 배는 더 많은 것으로 보였다. 옆에 있던 아라센과 마법 병단의 지휘관에게 시선을 보내자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성벽에 선 마법사들을 지휘했다.
파아아아아앗-!
어둠과 어둠을 가로막는 투명한 장벽이 허공 위에 생겨나 성벽을 수호한다. 쏟아져 내린 불덩이를 온몸으로 막은 그것은 부서질 듯 출렁거렸지만, 끝내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대형 마물이 온다!”
그때, 성벽 밑으로 집채만 한 괴물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몸을 이루고 있는 요소를 보니 슬라임이나 다른 녀석들을 합쳐 놓은 것의 아종으로 보인다. 그것에 에른스트 백작이 눈짓하자 옆에 있던 소드 마스터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전하,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는 귀족들로부터의 전언입니다.”
그들이 마물 군세를 무참히 헤집으며 날뛰는 모습을 지켜볼 찰나, 뒤쪽에서 기사 한 명이 다가왔다.
“무엇이지?”
“이대로 포위를 유지하고만 있어도 괜찮은지 물어 왔습니다. 아마, 이쪽의 성벽이 무너질 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흠.”
그 말에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들로선 합리적인 걱정일 것이라.
수도 앞을 뒤덮은 마계 군세는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다.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 그것을 관측하고 있을 터.
그러는 차에 이곳 전선의 소식을 듣는다면 수도가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드는 것은 당연하겠지.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 전하도록. 만약 녀석들이 여기서 말고삐를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한다면 그만한 재앙이 없을 터니.”
“예, 명을 받듭니다.”
이곳은 수도의 방어벽과 더불어 4군단의 지원 덕분에 마계 군세의 진군을 저지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녀석들이 다른 곳으로 방향을 튼다면 그곳은 순식간에 짓밟힐 터.
차라리 포위망을 유지해 어떻게든 대비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 놓는 것이 더 옳은 선택일 것이리라.
전투는 그 뒤로도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달이 기울고 어둠이 정점에 이르렀다.
곳곳에 놓인 불꽃이 주위를 밝혔지만, 끝도 없는 마계 군세만 짓쳐 들어올 뿐이었다.
“…사상자가 5천이 넘었습니다.”
황제와 카리우스의 소식에 잠시 황궁으로 돌아갔다 온 가야온 재상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상대는?”
“추세로 보아 최소 3만은 될 듯합니다.”
단순하게 계산한다면 어찌어찌 막아낼 수는 있는 셈이지만, 그대로 간다면 수도를 지키는 이들은 전멸하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제국의 군단은 일부를 제외하곤 국경 근처에 머물며 그곳을 지키는 상황이다. 4군단은 이례적으로 내가 불러들였기에 온 것이지만, 내 휘하 세력이 공백이 된 상황에서 누군가 반란을 작심한다면 상황은 골치 아프게 돌아가겠지.
마계가 중간계를 침공했는데 누가 반란을 일으키겠느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원작에서 있었던 온갖 군상들을 떠올리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재 제일 가까운 군단은 어디 있지?”
“…1군단과 8군단입니다. 다만, 1군단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듯합니다. 그쪽엔…….”
“토랄 산맥이 있지. 마계의 준동과 더불어 그곳도 요동치기 시작했을 테니 섣불리 병력을 빼지 못하겠지. 그렇다면 8군단을 불러라.”
“괜찮으시겠습니까. 8군단은 오스칼 제국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
그의 걱정은 타당했다.
8군단이 위치한 국경엔 여러 왕국이 자리했지만, 모두 고만고만한 규모에 불과하다. 실상은 저 대륙 너머에 있는 오스칼 제국의 진군을 대비하는 성격의 군단이었다.
“괜찮아. 오스칼 제국은 지금 내전의 뒷수습이랑 잔당 소탕에 주력하고 있어.”
더군다나 나와는 협력관계이지 않나.
그들은 아직 제국 내부 곳곳에 뿌리 뻗은 마계 잔당을 완전히 뽑아내지 못했다.
미치지 않은 이상 이쪽을 향해 군대를 일으킬 수는 없을 터.
“…그러면 즉시 8군단을 이쪽으로 호출하겠습니다. 그래도 거리가 있으니 이틀에서 사흘쯤 걸리겠군요.”
“설마 그 안에 무너질까. 4군단도 아직 여력이 있고, 수도방위군도 건재하다. 우리만 해도 일주일은 버티겠지.”
마계 군세가 총력전을 벌이지 않는 이상 이곳을 뚫기 어려웠다.
물론 그것도 의미 없는 소모전이 아니라 그 앞에는 마계 군주를 필두로 한 정예들이 나서야 했다.
‘알로켄은 지금 당장 나서기 부담스럽겠지. 나뿐만 아니라 검성이라는 카드가 있으니까.’
검성이 자리를 비운 것은 모를 것이다. 설사 알게 되더라도 언제 돌아올지 몰라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터.
전쟁은 밤의 끝자락까지 계속되었다.
밀고 밀림의 반복, 검이 살을 꿰뚫고 창이 뼈를 짓이겼다.
그 지루한 공방을 난간 위에서 내려다보며 혹시나 녀석들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날카로운 눈으로 군세를 살폈다.
“저, 전하-!”
그때, 수도방위군 소속 기사가 헐레벌떡 망루 위로 올라왔다.
무슨 일이냐는 뜻으로 턱짓을 하니 기사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나, 남문이 뚫렸다는 급보입니다! 갑작스럽게 그 앞에 마물의 군세가 나타나 성벽을 부수고 난입 중이고, 기사단이 어떻게든 그 앞을 지키고 있지만, 얼마 가지 못할 것이라고…….”
“뭐?”
성문이 뚫리다니?
분명 8군단의 전력이 이곳에 집중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곳의 방비도 서투르게 해 놓지 않았다.
당연히 별동대를 대비해 적지 않은 병력을 배치해 놓았거늘, 이렇게 순식간에 뚫리다니.
“…설마.”
군주급의 괴물이 나선 건가 싶어서 고개를 들자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군세의 끝자락에 독보적인 기운을 가진 마족이 한 마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쪽에 계신 소드 마스터분들도 역부족이었다고…….”
그 말에 난 가야온 재상을 바라보았다.
“재상, 이곳을 부탁하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땅을 박차고 망루에서 뛰어내렸다.
마계 군주급이 나섰다면 지원을 아무리 많이 보낸들 부족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가서 그 우두머리의 목을 베는 것이 더 확실할 터.
나무에 매여 있던 말에 올라타 곧바로 남문으로 향했다.
수도는 빌어먹게도 컸기에 힘껏 말을 재촉했음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고, 목적지에 다 와 갈 때쯤엔 입에 거품을 물며 쓰러져 내렸다.
“수고했다.”
기절한 말의 갈기를 한 번 쓰다듬으며 마나를 불어넣고는 곧바로 땅을 박찼다.
기사의 보고는 과장이 아니었는지 빈틈없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어야 할 성벽은 성문을 기준으로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다.
그 너머로 기괴한 괴물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고, 기사를 앞세운 군대의 전열이 그 부서진 틈에서 필사적으로 적들의 진군을 막아 내고 있었다.
“버텨라! 곧 지원이 올 것이다!”
“병사들은 뒤로 빠져서 전열을 유지해라! 절대 마물과 직접 닿는 일이 없도록!”
부상자를 챙길 여유도 없는지 신음과 함께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이가 수십이 넘었다.
난 엑스칼리버를 쥔 채 바닥을 박차 그들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아앙-!
가볍게 일 검을 휘두르자 안쪽으로 들어오던 마물들의 몸이 터져 나갔다. 갑작스러운 그 현상에 필사적으로 자리를 지키던 이들이 밝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전하!”
“수고 많았다. 앞으로 들어오는 놈들은 내가 막을 테니 자네들은 빨리 성벽을 보수하도록.”
처음부터 성벽을 쌓는 것은 시일이 걸리는 작업이지만, 부서진 성벽을 보수하는 것은 기사들의 초인적인 힘과 마법의 도움이 있다면 금세 끝날 터.
그렇기에 나는 엑스칼리버를 휘두르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키메라? 그리고 골렘인가.”
기사는 분명 이쪽에 나타난 군세가 갑작스럽게 솟구쳤다고 했다.
그렇다면 균열에서 나온 것처럼 정규군이 아닌 군주의 사도나 창조물일 터.
“어떤 군주냐.”
키메라 그리고 골렘 같은 하수인을 창조해 내고 움직이는 권능.
머릿속으로 몇 개의 이름이 스쳐 지나간다. 그와 동시에 감각을 넓게 퍼뜨려 군세의 주인을 찾으려 했지만, 눈앞에 가득한 키메라와 골렘 사이로 곧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우리 구면이지?”
외모는 절세의 미녀, 하지만 그 눈빛만은 요사스럽기 그지없다. 조금씩 태양이 떠오르는 여명 아래, 마계 군주는 천천히 앞으로 나서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놀랐어. 단순한 방해자일 줄만 알았는데, 설마 성검의 용사였을 줄은.”
“…그레모리.”
오랜만에 그 이름을 입에 담자 녀석은 자신을 기억해 준 것이냐며 고혹적인 시선을 보냈다.
재액과 함께 오는 서리, 마계 공작 그레모리.
일전 사우스요크셔에서 란돌프의 몸을 빼앗아 차지하려던 것을 막아 낸 적이 있었다.
‘그렇군, 아까 성벽 쪽에 나타났던 거대한 마물도.’
제국의 소드 마스터들이 처참히 도륙한 마물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저 흉측한 마물이라고 생각했지 키메라라곤 의심치 않았다.
이 녀석이라면 단숨에 군세를 만들어 내 성벽을 돌파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겠지.
“네가 알로켄의 뒤를 이어 균열을 넘었다는 군주인가.”
“너무 그렇게 살벌하게 하지 마. 어차피 즐길 시간은 충분히 남았으니까.”
그레모리의 요사스러운 눈동자에 나는 엑스칼리버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