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277)
망나니학 개론-278화(278/300)
#278
지잉.
“……!”
갑작스럽게 머리를 울리는 공명에 헛바람을 토해 냈다. 옆에 있던 제페가 무슨 일이냐며 옆으로 다가왔지만, 이내 내 주위의 경관이 바뀌었다.
“…이건!”
황급히 주변 권역을 장악하며 내 존재를 확고히 했지만, 이미 그 격류에 휘말린 뒤였다.
피와 고성이 난무하는 전장은 사라지고, 새파란 하늘과 넓은 초원을 가진 공간이 펼쳐졌다.
“마스터.”
“이건, 누군가의 심상과 공명하고 있는 건가?”
내 뒤로 티르빙과 리버가 나타났다.
“심상 공간이라고?”
티르빙의 말에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텔레포트로 어딘가 이동되었다는 감각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육신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상태라는 소릴 터.
“그리고 여기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슬며시 내 오른쪽 팔을 잡아 온 리버가 살짝 불안한 얼굴로 말해 왔다.
“달라?”
“네, 아무리 심상 공간이라 해도 시간의 흐름은 거스르지 못해요. 하지만 여기 들어온 이후로 밖의 시간은 거의 멈춰 있는 거나 마찬가지로 흘러가고 있어요. 그렇다는 건…….”
“이 안쪽의 배율이 높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녀들까지 함께 나온 것은 내 영혼과 링크되어 있는 관계이기 때문일 터.
파아아앗-!
하늘에서 어둠이 떨어져 내렸다. 마치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그런 격류에 두 팔을 들어 올린 채 눈을 깜빡였을 찰나.
“…….”
새카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희고 가는 손가락은 천천히 내 턱끝을 움켜쥔 채 들어 올렸고, 두 개의 어둠이 날 바라보았다.
처음엔 그 존재 자체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 존재가 너무 컸던 탓에 내 인식이 한 번에 담아 내질 못했던 것이리라.
마치 심연을 담은 듯한 눈동자였다.
머릿속으로는 무언가 해야 함을 알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내 뒤로 있던 리버와 티르빙 역시 마찬가지인 듯 아무런 말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이야, 우리 언젠가 만나지 않았니?”
저주받은 마룡, 파브닐.
인세에 없는 아름다운 외모였다. 아마 북유럽 신화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확지는 않았다.
‘만나지 않았냐고?’
나는 가늘고 길게 숨을 내뱉으며 그녀가 내뱉은 말을 곱씹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명확했다.
지금껏 마계 구석에 처박혀 있던 마룡을 내가 어떻게 만났겠는가. 오히려 나는 그런 물음을 던져 온 그 저의가 더 궁금할 뿐이었다.
챙-!
그 직후, 파브닐의 관심이 내게 쏠린 틈을 타서 리버와 티르빙이 검을 뽑아 들었다.
제 각자 신성력과 마기에 한껏 휩싸인 검을 들이밀며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있던 그녀를 밀어냈다.
“다가오지 마세요, 정체 모를 존재여.”
“임자 있는 사람을 탐내지 말라고?”
파브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짐짓 태연한 태도로 내 앞을 둘러쌌다.
“하하.”
파브닐은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작게 웃음을 토해 냈다. 그러곤 매혹스러운 태도로 제 턱을 쓰다듬으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충성스러운 종복들이네. 하지만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는 건 옳지 않단다.”
그녀는 그저 손가락을 한 번 까딱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리버와 티르빙은 검을 놓친 채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으로 보아 무형의 압박을 받는 것일 터.
구세의 성검과 신화의 마검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의 차이였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을 가리듯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마룡이여, 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는 것이겠지.”
쓸데없는 이들은 괴롭히지 말고 나와 이야기하자는 시선을 보내자 파브닐은 피식 웃으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컥.”
그 직후, 깨닫기도 전에 목을 잡혔다.
분명 심상의 공간이기 때문에 신체의 한계에서 자유로울 터이지만, 어째서인지 숨이 턱 막히며 가슴이 옥죄어 왔다.
“아이야, 착각하지 말아라. 뭔가 잊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서 굳이 이곳에 온 것이지, 너는 내게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님을.”
그렇다, 잊고 있었다.
저주받은 마룡.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미친 녀석이 아닌가.
…저주받은?
일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에 나는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아이야, 우리 언젠가 만나지 않았니?
나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저주받은 마룡.
저주받은 망나니, 3황자 레이오스 폰 리베라.
길가메시, 황제, 마을 어귀의 처녀와의.
…그게 파브닐이라고?
너무 억지스러운 연관이 아닌가 싶었지만, 만약 내 가설이 맞으면 과거부터 풀리지 않았던 의혹들이 설명된다.
엑스칼리버가 내게 반응한 것, 그리고 드래곤의 가호를 얻을 수 있었던 것.
둘 다 팬드래건 혈통같이 혈계 전승의 조건 중 조상으로 드래곤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만약 레이오스가 파브닐의 아이라면 그런 것도 설명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원작에서 나오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파브닐이 왜?’
제국의 황제라 할지라도 그녀에겐 별 차이가 없는 인간일 터.
하룻밤만의 불꽃은 마을 처녀 쪽이 아니라 황제 쪽이었나?
“…뭐, 되었다. 너도 알지 못하는 모양이니 이 문제에 대해선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구나. 아가레스, 그 아이가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을 없애 달라고 조건을 내세웠다만, 그 무언가가 떠오를 때까지 너와 이들에 대한 처우는 미뤄 두도록 하마.”
목을 붙잡고 있던 힘이 약해졌다.
그 덕에 밑으로 떨어져 바닥에 엎드려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짓눌리고 있던 리버와 티르빙 역시 해방되었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파브닐 쪽으로 이를 갈고 있었다.
‘참아.’
나는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으로 그녀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심상의 공간에서도 이리 전력의 차이가 날 정도였으니 굳이 자극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뭔가 좀 더 정보를 얻는 것이 이득일 터.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존재들이 있구나. 아이야, 네 일행이니?”
그 말과 동시에 파브닐과의 거리가 멀어졌다.
심상의 공간이 깨어져 나간 것.
다시 돌아온 현실의 풍경을 자각하는 순간, 나는 망루의 난간을 붙잡고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가베인?”
제페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였다. 그것에 고개를 드니 크리스에게 맡겨 놓았던 가베인이 씩 웃으며 내 어깨에서 손을 뗐다.
“누군가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아서 손을 썼습니다만…….”
“잘했다. 덕분에 살았어. 그나저나 네가 여기 있다는 건.”
파아아아앗-!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수십 개의 마법진이 그려지며 모든 속성의 마법이 맹렬하게 토해져 나왔다.
“엘리멘탈 버스트…….”
크리스의 특기인 전 속성 공격 마법 엘리멘탈 버스트.
수십 개의 마법이 일시에 마룡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물론 파브닐은 가볍게 날갯짓 한 번 하는 것으로 그것들을 뭉개 버렸다.
마법의 종주라고 할 수 있는 존재다웠다.
디스펠을 한 것도 아니고, 고작 바람을 일으켜 자신을 향한 마법을 씻어 내다니. 하지만 크리스 역시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촤르르르륵-!
마계 군세가 뒤덮은 대지를 뚫고 굵은 사슬이 튀어나왔다.
본래 그녀가 사용했던 보랏빛을 머금고 있는 것이 아닌, 거무튀튀한 사슬은 이내 파브닐의 몸을 옭아맸고 그 육중한 몸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려 했다.
쉬이이이이익-!
사슬은 곧 시뻘건 불꽃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녹아 문드러지는 일은 없었고, 여전히 강한 힘으로 그녀의 몸을 당겼다.
“역시 크리스를 부르길 잘했군.”
“아무리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스승님껜 안 될 겁니다.”
가베인은 강한 자신감을 담아 말했다.
그 역시 적지 않은 성취를 이룬 듯했다. 마지막으로 아카데미에 갔을 때는 막혀 있던 벽을 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지금 풍기는 기세는 최소 마도사급에 가까웠으니.
“…마침 잘됐군. 그쪽 전력이 부족했는데.”
소드 마스터야 나나 앨리스가 있다.
페트라나 엘리시아 그리고 뒤를 이어 후배들도 아마 머지않았을 터.
하지만 마법사 쪽은 살짝 이야기가 달랐다.
레이시스는 6클래스로 들어가는 문턱에서 가로막혀 있었고, 유리아는 이제 막 5클래스에 올라 익숙해지는 와중이었다.
앞으로 있을 전쟁에선 마법사의 역할이 더욱 막중해지는바. 이 정도까지 올라왔다면 딱 부려 먹기 좋을 경지였다.
“……?”
가베인은 눈앞의 전투를 바라보다 살짝 오한이 드는지 몸을 떨었다.
크리스는 이때껏 보지 못했던 사나운 기세였다.
마치 이 싸움에서 제 모든 생명을 불태우기라도 할 듯이 파브닐의 몸을 속박하는 데 전심을 다 하고 있었다.
우우웅-.
마룡의 입이 벌려진다. 심상치 않은 파동이 그 가운데로 몰려들었고,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마법사들! 전부 방어에 집중해!”
성벽으로 닥쳐들던 마계 군세는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엄한 전투에 잠시간 발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그렇기에 어렵지 않게 성벽 위로 수십 겹의 실드를 만들어 냈다. 이번엔 마도사들도 힘을 아끼지 않고 보탠 덕분인지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장벽이 눈앞에 세워졌다.
“후우…….”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두 자루의 검을 잡았다.
아까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면 마법사들의 실드로는 역부족일 터. 결국, 내가 나서야 했다.
파아아아앗-!
전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토해진 브레스가 사방에 뿜어졌다.
마계 군세 역시 그것에 휩쓸렸고, 곧 성벽 위까지 짙은 마기가 닥쳐왔다.
웅웅웅웅.
마기와 닿은 실드가 속절없이 부서져 나갔다. 전부 합해 수십 겹이나 되는 것이었지만, 십 초를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후…….”
짧게 한숨을 내뱉은 나는 다시 성벽에 파묻힐 각오를 다지며 난간 위로 발을 걸쳤다.
“……!”
하지만 그 순간 반대 방향에서 닥쳐오는 새하얀 빛 무리에 크게 두 눈을 떴다.
쉬이이이이이익-!
마치 유성과도 같은 그것은 성벽 위에 깃든 실드를 전부 부수고 떨어져 내리는 마기와 부딪혔다.
“…오?”
나는 끝내 그것을 베는 것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 빛은 한 치의 밀림 없이 집요하게 파고든 끝에 마기를 갈라냈고, 마기의 잔재는 폭발하는 일 없이 그저 사방으로 흩어졌을 뿐이었다.
탁.
망루의 옆으로 한 인영이 천천히 내리 앉는다. 새하얀 백발을 휘날리며 하늘을 올려다본 검성은 헛웃음을 토해 내며 그것을 가리켰다.
“저 시커먼 드래곤은 무엇이냐, 제자야.”
“엘프 일족이 마룡에 의해 절멸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원흉입니다.”
“…그녀의 원수가 바로 저 드래곤이라고?”
검성은 살짝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에 나는 대답하기보단 한숨을 푹 내쉬며 그에게 불평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덕분에 제자는 두 번도 더 죽을 뻔했습니다.”
“이놈아, 동타인 왕국으로 가는 도중에 네가 갑자기 이야기를 바꿔서 급하게 온 것이 지금이다. 중간에 거치적거리는 것이 몇 놈 있기에 조금 시간이 걸린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으냐.”
살아 있으면 되지 않았느냐는 그 새침한 표정에 실소가 절로 나왔다.
“그래서, 저것도 쓰러뜨려야겠지?”
“아가레스의 부탁을 받고 나왔답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존재를 죽이려고.”
“그렇게 둘 수야 없지. 너는 꼴을 보니 당장 싸우기는 힘들어 보이는구나.”
“…가능성은 있습니까?”
파브닐을 쓰러뜨릴 수 있겠냐는 뜻으로 슬쩍 질문을 던지니 잠시 하늘 위를 바라본 검성은 이내 씩 웃으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 검성이다.”
평소라면 헛웃음을 토해 냈겠지만, 이번만은 그 말이 그토록 든든해 보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