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281)
망나니학 개론-282화(282/300)
#282
“…파브닐.”
마룡, 파브닐이 내 앞에서 가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본신을 해방한 그녀의 격은 절대적이었다.
분명 인간의 형태였지만, 두 눈은 드래곤의 것을 하고 있었고, 등 뒤에는 기다란 꼬리가 늘어져 나와 바닥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끄으윽.”
그리고 그녀의 양손에는 검성과 크리스의 목이 잡혀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의 둘이선 파브닐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던 것 같았다.
“제법 고생했어. 설마 아직도 인간계에 이 정도 수준을 가진 녀석들이 남아 있을 줄이야.”
물론 파브닐 역시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은 듯해 보였다.
하지만 전과 다름없이 흉흉한 눈빛을 품고 있는 것이, 이곳을 전부 몰살시켜야 그 성이 풀릴 듯해 보였다.
“…우리, 평화적으로 대화하면 안 될까?”
파브닐은 내 말에 히죽 웃었다.
“물론, 거칠게 할 생각은 없어. 이쪽도 조금 즐겨야겠지?”
콰아아아아아앙-!
그와 동시에 그녀는 두 손을 살짝 털었다. 그러자 그 손에 들려 있던 검성과 크리스는 성안 쪽, 산맥으로 날아가 그대로 큰 폭발과 함께 처박히고 말았다.
‘…어디가 평화적으로 한다는 건지.’
두 초월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침묵했다. 아무리 그래도 즉사하진 않겠지만,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터.
그렇다면 오롯이 나 혼자 그녀를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원래는 조금 두고 보려고 했지만…….”
날 바라보는 파브닐의 눈이 위험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어떻게 해야 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기시감이 사라질까?”
탁.
그녀의 손이 내 어깨를 붙잡는다. 그러곤 그대로 몸과 팔을 찢어발기려는 것처럼 힘을 주기 시작했다.
뿌드득-.
겨우 재생된 오른쪽 팔이 불길한 소리를 내며 뒤틀렸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그대로 몸과 분리될 듯 점차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레이오스-!”
그때, 이곳의 난리에 닥쳐온 이들이 있었다.
제페를 비롯한 소드 마스터들과 마도사들이 성벽 위에 난입한 파브닐을 경계하며 주위를 포위했다.
페트라나 엘리시아, 그리고 레이시스 역시 마찬가지였고, 금방이라도 달려들며 그녀를 공격할 듯 검을 빼 들었다.
히죽.
내 표정을 본 파브닐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팔 쪽을 붙잡은 손을 떼어내며 입을 열었다.
“…인간은 참 다루기 쉬워. 짝을 이루며 살아가는 생물인 만큼 자신보다 소중한 이들이 존재하게 마련이거든. 너에게는 아마 이들이 그렇겠지?”
“감히……!”
서걱.
제국의 소드 마스터가 분개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으나, 한마디가 채 끝나기도 전에 머리가 반으로 갈라져 쓰러져 내렸다.
“…….”
흘러나온 핏물이 성벽 위를 물들인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시끄럽게 하는 벌레들은 죽어 마땅하지. 더는 그런 것이 없으면 좋겠구나.”
더없이 권태로운 목소리였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쉰 뒤 두 손을 들었다.
“항복이다, 마룡이여.”
“…여기까지 와서? 조금 더 나를 즐겁게 해봐. 뭣 하면 아까 두 녀석 같은 지원을 불러도 상관없다. 아니, 얼마든지 불러라.”
조롱하는 말투에 나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부르고 싶어도 부를 사람이 없었다. 전쟁의 중후반부로 간다면 각지에서 영웅이라 부르는 비범한 이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왔을 테지만, 지금은 고작 해 봐야 마스터에 이른 이들이 전부일 터.
“뭣 하면 여기 있는 이들을 하나씩 잔인하게 죽여 줄까? 그러면 지금 내가 느끼는 기시감도 사라질지 모르는데.”
파브닐의 두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그 속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오히려 먼저 죽여 버리고 말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그럴 필요는 없다. 이야기는 우리 둘이서 끝낼 수 있으니.”
“……?”
나로선 각오를 다지고 내뱉은 말이지만,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는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들었다.
여차하면 가차 없이 이쪽의 목을 쳐 버릴 심산인 듯하다. 그것에 난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는 그자에 관한 이야기인…….”
파아앗-.
주변은 순식간에 어둠에 뒤덮였다. 머릿속에서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리버와 티르빙이 놀라 헛바람을 토해 냈으나, 나는 그럴 틈이 없었다.
콰악-!
어둠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하얀 손이 내 목을 옥죄였다. 주변은 분명 성벽 위였을 텐데, 밀려진 몸은 등 뒤에 있던 딱딱한 무언가에 부닥쳤다.
“다시 지껄여 봐라.”
파브닐의 눈이 이전과는 다른 빛으로 번들거렸다.
조금 전까지는 유희와 유열을 즐기는 절대자였다면, 지금은 일그러진 마룡의 본 모습 그대로였다.
“…주신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네가 모르는 것들을 알고 있지.”
“대체 어떻게?”
마룡의 권능으로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룡, 파브닐이 기원하는 것은 자신을 창조한 주신을 없애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전대 마왕과 손을 잡은 채 대륙에 있는 모든 드래곤을 죽였고, 그들의 드래곤 하트를 흡수해 막대한 힘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조차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을 뿐이었으니.
천계부터 중간계, 마계, 심지어 비물질로 이루어진 정령계까지 샅샅이 뒤졌음에도 이 세계를 만든 창조주의 실오라기 하나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같잖은 필멸자라 생각한 내 입에서 그 이야기가 튀어나오면 놀랄 법도 하겠지.
“먼저 맹세해라. 더는 아무도 죽이지 않은 채 이 자리를 떠나겠다고.”
앞으로 우리를 건드리지 않겠다, 이 전쟁에서 손을 떼겠다는 종류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전대 마왕과의 계약으로 묶여 있는 사안인 만큼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조금의 시간이라도 벌 수 있는 이 제안이라면…….
푹.
섬뜩한 감각이 온몸을 파고든다. 천천히 고개를 내리니 날카로운 창 두 자루가 내 허리를 꿰뚫고 있었다.
[마스터-!] [제길, 어떻게 할 순 없는 거야?리버와 티르빙이 비명을 지르며 날 불러온다. 하지만 그것에 대답할 여유도 없이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피를 토해내고 말았다.
“맹세? 맹세라고? 참으로 웃기는구나. 감히 누가 누구에게 그런 망발을 하는 것이냐. 주제를 알아라, 필멸자여.”
“…그리 말할 여유가 없을 텐데. 내가 죽으면 어디서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입가에 피가 줄줄 흘러내려 바닥을 적신다. 파브닐은 이쪽의 여유로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혀를 차며 내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순순히 말할 생각이 없다면 네 머리에 직접 물어봐야겠구나.”
드드득-.
새하얀 손가락이 내 머리를 파고들었다. 뇌를 만져서 정보를 꺼내 오려는 듯 이리저리 안쪽을 휘저었지만, 이내 자색 스파크가 그 위로 튀어 올랐다.
“…거부 반응?”
그녀의 얼굴에 놀람이 서렸다. 하지만 오기가 생겼는지 더더욱 힘을 가해 내 머리를 주물렀다. 이쪽은 남의 손이 머리 안쪽을 만지작거려서 죽을 정도로 어지러운 상황이었으나, 혀를 깨물면서 버텨 냈다.
‘여기서부터는 기세 싸움이다. 죽어도 먼저 입을 열면 안 돼.’
어차피 어지간한 정신 조작은 시스템 어시스트 쪽에서 막아 줄 것이다. 내 영혼과 직접 링크한 티르빙조차 뚫지 못했던 방벽을 마룡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조금 불안했지만, 이조차 통하지 않는다면 희망이 없다. 그리고 잠시 후, 다행히도 파브닐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시커멓게 타 버린 제 손끝을 빼냈다.
“…도대체 어떻게, 너는 대체 뭐지?”
“주신이 자신의 이야기가 그리 쉽게 퍼지는 것을 용납할 것 같은가?”
허리 쪽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닥쳐옴에도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가를 비틀자, 다시금 파브닐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그래? 그러면 이래도 말할 생각이 없을지 볼까?”
파앗-.
그녀의 손이 어둠 속을 헤집으며 무언가를 잡아당겼다.
“어, 어엇?”
끌려 나온 것은 마스터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영문 모를 얼굴로 어둠 속을 뚫고 들어오더니, 이내 나를 보곤 두 눈이 커졌다.
“저, 전하! 이런 악독한…….”
“그래서 생각은?”
그가 뭐라고 말하든 말든, 파브닐은 작은 미소와 함께 가늘어진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고, 곧 그녀의 손이 가차 없이 휘둘러졌다.
촤아악-!
찢겨 나간 몸에서 뿜어진 피가 얼굴에 몇 방울 튀었다. 그 비릿한 피 내음에 나는 이를 악물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참아 냈다.
“한 번 더.”
그 뒤를 이어 몇 명의 인원이 더 그녀의 손에 희생되었다.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고, 그저 충혈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아앗?!”
그리고 마침내 우려하던 상황이 발생했다.
어둠 사이로 붉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페트라는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붙잡은 파브닐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이내 나를 발견하곤 우뚝 멈춰 섰다.
“…아.”
바닥에 널브러진 수많은 시체. 발밑에 고인 웅덩이와 창에 꿰뚫려 피를 토해 내고 있는 나.
그것을 보고 대충 상황을 짐작했는지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두 눈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아이는 너에게 있어서 특별한 이구나. 어때, 사랑하는 여인의 목숨을 포기할 정도로 그것은 무거운 비밀인가?”
파브닐은 이때까지 보였던 것보다 더 밝고 생글거리는 미소와 함께 물어 왔다.
그러자 그 손에 붙들린 페트라가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날카로운 시선 한 번에 몸이 굳은 듯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퉤.”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낸 나 역시 웃음을 토해 내며 고개를 들었다. 폐 쪽으로 피가 새어 들어갔는지 가래 끓는 소리가 나왔지만, 내 대답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죽여라, 마룡이여. 그녀가 죽는다면 내 입에서 무언가를 듣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영원토록 그의 그림자를 찾아 헤매다 생을 마감하겠지. 내가 필멸자라고? 네놈 역시 그저 오래 살 뿐인 창조물에 불과하다. 윤회도, 전생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 끝에서 기다리는 것이 소멸뿐인 네놈이 더 필멸자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가.”
“닥-쳐!”
터져 나온 일갈에 내 몸이 날아갔다. 바닥을 몇 번 구르고서야 겨우 몸을 일으키자니, 바로 눈앞에 파브닐의 발끝이 보였다.
“…무엇을 그리 망설이지? 죽여라, 그리고 절망해라 가련한 존재여.”
스르륵-.
내 몸이 의지와는 관계없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살짝 찌그러진 시야에는 잔뜩 열이 오른 파브닐이 페트라의 목을 붙잡고 있는 광경이 들어왔다.
그녀가 손에 조금만 더 힘을 준다면 저 가녀린 목은 덧없이 부서질 터.
복잡한 상념이 마음 가운데 일어났다. 하지만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눈을 감자니, 귓가로 긴 한숨이 들려왔다.
“좋아, 네 승리다. 내 생애 필멸자 따위와 거래라는 걸 해 보는구나.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만약 네가 말한 이야기가 쓸데없거나, 잘못된 것이라면…….”
파브닐의 두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그것은 곧 그녀의 화가 나와 이 자리에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에게 쏟아지리라 말하는 듯했다.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어차피 머지않은 시일 내에 네가 북쪽 탑에 사는 현자를 족치고 알아낼 이야기였으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