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292)
망나니학 개론-293화(293/300)
#293
“…….”
페트라의 루비색 눈동자 위로 물기가 차오른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였을 테지만, 이미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지 조용히 눈가를 훔치며 그저 내 옆으로 제 몸을 기대 왔을 뿐이었다.
나는 살짝 그녀의 몸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들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저쪽의 인생도 포함해서 하는 생애 첫 프러포즈가 아닌가.
적어도 좀 더 로맨틱하거나, 분위기 있는 곳에서 하고 싶었지만, 왜인지 지금이 아니면 못 할 것 같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어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페트라의 몸을 안으면서 퍼뜩 정신이 들어 비어 있는 손으로 허리춤에 달린 아공간 주머니를 뒤적였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임시방편으로 비슷한 거라도 꺼내려 했지만, 이내 손을 거두었다. 아무렴 인생 첫 프러포즈인데 적당한 것을 줄 수 없으니.
그렇기에 살짝 한숨을 내쉬며 사실대로 고백했다.
“뭐, 그렇다고 준비된 건 아무것도 없다. 너무 충동적인 말이었군.”
“…지금은 됐어요. 말뿐으로도.”
페트라는 좀 더 강하게 내 품에 매달렸다.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이런 멋도 없는 녀석을 좋아해 주다니.
“…….”
등 뒤쪽으로 제페가 슬쩍 자리를 지켜 주는 것이 느껴졌다. 이곳이 망루여서 다행이었다. 성벽을 시찰하던 도중 그랬더라면 많은 이의 시선을 몸소 받아 냈어야 했을 테니.
나는 품에 안긴 페트라의 기운을 느끼며 천천히 전장을 바라보았다. 아직 이쪽의 하늘은 맑았지만, 균열의 게이트가 생긴 곳으로부터 스멀스멀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아마 우리의 마지막 전쟁이 될 터. 성벽 위에서 돌아다니는 수많은 익숙한 얼굴들을 돌아보니 새삼 감회가 느껴질 따름이었다.
“…길었군.”
레이오스의 몸에 빙의했을 때부터, 아카데미를 지나, 이곳에 이르기까지. 솔직히 처음엔 이런 식으로 진행되리라 생각은 하지 못했다.
황제니, 뭐니 하면서 권력을 잡는 것은 애초에 염두에도 없었고, 그저 원작의 흐름을 따라가 이득만 선점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
‘지금, 이 상태로 돌아간다면 조금 더 잘할 수 있을까?’
헛된 상상이었지만,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더 회귀해서 처음부터 다시 이 생활을 하게 된다면 어설펐던 이때까지와는 달리 좀 더 치밀하게 준비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의 이야기였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들인 수고와 노력을 생각하면 정말로 끔찍한 이야기였으니. 더욱이 과거로 회귀하면 내 품에 안겨 있는 페트라와의 관계도 리셋되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끔찍한 이야기였다.
“음.”
마계 군세는 게이트에서 나온 직후 진군해 오지 않는 상태였다. 그저 그곳에 머무르며 마치 무엇을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였으니.
“…….”
한참을 내게 매달려 있던 페트라는 이제 충분해졌는지 살짝 부끄럽다는 얼굴로 물러났다. 그것에 작게 웃어 준 나는 그 뒤쪽을 향해 말했다.
“제페.”
“예, 전하.”
“관측병들과 연계해서 마계 군세의 움직임에 주시하라 일러두도록. 레겐스부르크 장군에게는 녀석들이 진군할 기색이 보이면 연락하라고 전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페트라는 이제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녀는 함께 전쟁에 참전한 라이프치히 백작을 비롯한 그 군대와 같은 구역에서 싸움을 이어 나갈 터.
슬쩍 고개를 들자 병영 쪽에서 두 개의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쪽 역시 내 쪽을 의식했는지 이곳으로 다가오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기에 나는 제페에게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준비하라 시키고, 그들을 맞이하러 나갔다.
“스승님, 크리스.”
검성과 크리스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룡과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는 전부 회복했는지 말짱해진 모양새였다.
‘아니, 더 성장했나.’
전신에서 꿈틀거리는 기운들을 가늠해 보자니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힘을 품고 있었다. 세계의 시점이 후반에 다다름에 따라 이들도 각자의 경지에 오른 것일 터.
거의 한 달이 넘는 시간 만에 보는 것이었기에 나는 반가움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어째서 이들의 눈동자에는 경계의 기색이 서렸다.
“…왜 그러십니까?”
“못 본 사이에 상당히 묘해졌구나. 이젠 아무것도 읽히지 않게 되다니.”
“정말로. 누군가가 얼굴 가죽을 뒤집어쓴 거라고 해도 믿겠어.”
검성과 크리스는 묘하게 합이 맞는 태도로 날 유심히 바라봐 왔다.
‘…아.’
아마 프로메테우스의 힘을 물려받은 것 때문에 그럴 터. 지금 나는 반신의 경지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쳐 있는 상태였다. 아직 이 힘을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했기에 익숙지 않았지만, 그것은 곧 시간문제.
마룡을 상대하기 위해 받은 힘이니 지금 당장 그 총량만 보아도 이 둘을 합친 것보다 클 것이다. 그러는 만큼 검성과 크리스가 이상한 느낌을 받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일단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시죠.”
나와 검성은 물론이고, 크리스 역시 그 외모와 정체불명의 대마도사라 소문이 난 탓에 이곳으로 쏠리는 이목이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제페가 준비한 막사로 향해 자리 잡은 다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 두 분 다 쾌차하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상처 따위야 진작에 회복했다. 문제는 그 빌어먹을 마룡을 쓰러뜨릴 방법을 찾는 것이었지.”
검성은 무의식적인 행동인지, 제 허리춤에 매인 검을 쓰다듬으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리라.
초월의 경지에 든 이후, 인세에 검성이라 불리며 추앙받았던 존재의 첫 패배. 그것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것인지 나는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나도 부족함을 많이 느꼈거든. 몇백 년 동안 준비한다고 했는데, 역시 탁상공론이랑 실전은 다르더라. 그래도 그때 데이터를 얻었으니 어떻게든 대강 실마리는 잡을 수 있었어.”
크리스 역시 두 눈에 불꽃이 피어올라 있다. 그녀에게 있어 파브닐은 일족의 원수. 자신의 목숨 전부를 마룡을 쓰러뜨리는 데에 갈아 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결과가 신통치 못했으니 화날 만도 하겠지.
“이번엔 다를 거야.”
두 손을 꽉 움켜쥐고 말해 오는 모양이 그간 이를 갈며 피드백해 온 듯싶었다. 그것에 나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기대하지.”
“그래서, 당신은 대체 뭘 한 건데?”
크리스의 물음에 검성 역시 관심을 드러냈다. 원래라면 자신들보다 밑의 경지에 있을 터인 내 기운을 읽을 수 없어서 당혹스럽다는 것이 표정에 드러나 있었다.
“나도 마룡을 쓰러뜨리기 위한 힘을 얻었다. 자세한 것은 말하기 복잡하지만…….”
백문불여일견이라 했다. 프로메테우스니 반신이니 이야기하는 것보다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 그 위로 힘을 끌어올렸다.
우웅-.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감각으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기운이 그 위에 자리 잡았다.
“마나, 는 아닌 것 같네?”
“이건 대체…….”
허공이 일렁거리며 묘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하지만 그것은 두 사람에게 오히려 의구심만 더 생기게 해 준 것 같았다.
“쉽게 말하자면 신에 가까운 힘을 얻었습니다.”
“…신?”
뜬금없는 이야기였는지 검성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예상외로 크리스의 쪽이었다.
“그래, 마나는 아니야. 마나만이 아닌 거야. 마나도 있고, 신성도 있고, 마기도 있고, 정령이나 차원계 외부의 힘도 섞여 있어. …이건 그 자체로 완전한…….”
어렴풋이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는지, 날 바라보는 크리스의 두 눈이 깊어졌다.
“이런 힘을 얻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말해 주지 않아도 알겠지?”
“…인간성을 상실한다는 것이겠지.”
종의 초월이니, 굴레의 해방이니 해도 우리의 근본은 그 언제까지나 인간이란 바탕에 있었다.
하지만 이 힘, 적당히 칭하면 ‘신력(神力)’을 품게 되면 그 그릇을 이루는 근본에서부터 변화가 생겨난다. 아마 난 머지않은 이후에 인간의 부분을 상당히 잃어버릴 터. 물론, 신체의 형태가 바뀌거나 그런 쪽은 아닐 것이다.
사실 나 역시도 이 부분에 대해선 자세히 알지 못했다. 원작에서도 거의 끝물에 다가와 일어난 일이고, 그 이후에 관해선 서술되어 있지 않았으니.
당시엔 아, 그냥 엄청 강해졌구나 정도의 감상만 품고 있었지, 그로 인해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뭐,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근황은 어떻지?”
검성의 물음에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매핑의 이미지로 기억돼 있던 지도의 형태가 허공에 그려지며 이 부근의 지역을 그려 냈다.
“일단 균열의 중심지로부터 총 4구역으로 나눠 경계선을 세웠습니다. 이쪽의 병력은 후에 올 지원까지 합해 총 150만에 육박하고, 상대 쪽은 200에서 250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서로 총력전이 될 터니 마계 군주들은 당연히 나오겠고, 마왕이 출현할 가능성도 있겠군.”
“그것 역시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균열 가운데 가장 큰 것에서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관측된다고 하니 말이죠.”
“나쁘진 않네. 군주급 녀석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지는 않는 이상 어렵지 않게 막아 내겠어. 용케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까지 준비를 했네?”
“별일 아니지.”
그 말이 나는 씩 웃어 보였다. 쉴 새 없이 곳곳을 돌아다니며 몸을 갈아 넣었는데 이 정도도 보여 주지 못하면 내 쪽이 곤란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일차적으로 마계 군세의 공격을 저지하고, 이쪽에서 전부 쓸어버리면서 게이트가 있는 곳까지 가는 것이죠.”
끝에서는 녀석들의 본대를 패퇴시켜 향후 얼마간 중간계에 발을 내디딜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다음엔 마룡이란 존재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것은 그 이후의 문제. 지금은 당면한 과제부터 집중해야 했다.
“일단 마왕이 강림하면…….”
돌연,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이때까지 은연중에 가다듬고 있었던 마왕에 대한 정보와 생각이 전부 새카맣게 덧칠이라도 한 듯 떠오르지 않았다.
“…강림하면?”
크리스가 그다음 말을 재촉했지만,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소리 없는 신음만을 내뱉었을 뿐.
“…잠시만,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검성을 바라보며 말하자 그는 내 표정을 보곤 무언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 역시 의문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검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어쨌든 알겠다며 말해 왔으니.
나는 그 길로 황급히 막사를 빠져나와 거칠게 발걸음을 옮겼다.
“전하?”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페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런 내 뒤에 따라붙었다.
“지금 당장 황궁으로 되돌아간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이쪽은 부단장 쪽에 연락을 맡기지요.”
“그렇게 하지.”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시간은 없기에 서둘러 텔레포트 게이트로 이동했다. 전이는 순식간에 끝났고, 두 눈을 뜨자 제페와 함께 황궁으로 돌아와 있었다.
게이트의 마법사와 지나오며 마주친 귀족, 그리고 시종인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넘기며 거의 뛰다시피 나아갔다.
곧 내 궁에 도착했고, 침실에 들어가자마자 그 서랍을 거칠게 열었다.
“…이런.”
서랍의 봉인과 결계, 그리고 아티팩트로 이루어진 엄중한 보안은 틀림없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빙의 초기, 그리고 지금까지 오며 작성했던 마왕에 관한 정보와 이 세계의 결말이 쓰인 부분에 대한 양피지가 전부 사라진 상태였다.
“…….”
궁의 호위를 서는 기사나 이곳을 청소하는 시종들을 추궁해 보아도 드나든 이는 없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탁자 위에 걸터앉아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기시감을 느낀 것은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반신의 힘을 받았을 때부터였다. 마궁을 나옴과 동시에 평상시 머리 쪽을 옥죄고 있던 무언가가 끊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많아 정신적인 스트레스라 치부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아주 고도의 수법으로 걸려 있는 정신적인 속박일 터.
내 정신은 상태창과 시스템 어시스트에 의해 대마도사인 마룡이나 반신에 이른 파브닐조차 침범하지 못할 강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그것에 개입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이 양피지들을 누가…….
“…파르시.”
“예?”
“파르시다드다. 그녀는 지금 어디 있지?”
“…어, 전하의 영지 쪽에 있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 확인해라. 그녀가 그곳에 자리하고 있는지.”
그 이름을 입에 담자 가슴속에 있던 기묘한 감각이 더 커졌다. 어째서 의심하지 못했던 걸까.
파르시다드, 줄여서 파르시.
내가 레이오스 몸에 빙의한 직후 나를 맞이해 주었던 존재. 분명 원작에서 그런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원작에서 독살 사건으로 반란의 건과 연루되어 처형당했더라면, 레이오스는 어떤 식으로든 그녀에 관한 내용을 독백하며 언급했을 터.
하지만 어딜 생각해 보아도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전하, 저쪽에서의 연락입니다만…….”
“어떻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상황을 보니 이미 한참 전부터 자리를 비운 듯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