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31)
망나니학 개론-31화(31/300)
#031
“다들 왔군.”
엘리시아를 마지막으로 1-A반 학생이 전원 자리했을 때, 가벼운 정장 차림의 사내 한 명이 교실로 들어왔다.
지저분한 더벅머리와 정리되지 않은 옷매무새. 삐뚤어진 안경과 만사가 귀찮아 보이는 얼굴.
“…묘사랑 똑같네.”
이때껏 만나왔던 다른 캐릭터들도 그랬지만, 이만큼 원작과 똑 닮았다는 생각이 든 적은 처음이었다.
“그만 떠들고 집중하도록. 일단 만나서 반갑다. 내 이름은 델르케라고 한다. 올 한 해 동안 너희들의 담임을 맡게 되었지. 부디 사고 치지 말도록, 이상.”
성격이 여실 없이 드러나는 담백한 소개였다.
“…….”
이후 몇 초간의 침묵이 흐른다. 학생들은 그것으로 끝이냐는 듯 시선을 보냈고, 그에 델르케는 멀뚱히 서 있다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뭔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인데, 그럼 자기소개라도 할까. 출석 번호 순서대로 하지. 어디 보자, 엘리시아.”
교사의 부름에 엘리시아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시선들에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엘리시아라고 합니다. 특기는 검술, 취미는 독서입니다. 일 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같은 담백한 소개였지만, 누구와는 차원이 다른 정갈함이었다. 학생들은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엘리시아는 깔끔하게 그것들을 무시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이후로 평범한 소개가 계속되었다. 곳곳에 숨어 있는 등장인물 중 범상치 않은 녀석들도 있었지만, 아직 스토리의 초반부였기에 평범한 학생을 연기하고 있는 듯했다.
표면적으로는 별 이상할 것이 없어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정말로 다시 학교에 온 것 같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다음, 앨리스.”
“…….”
“앨리스? 없나? 설마 첫날부터 안 온 녀석이 있다고?”
교사의 부름에도 그녀가 일어나지 않자 나는 앨리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그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곧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것처럼 발검의 자세를 취함과 동시에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훑었다.
“…….”
밖이었다면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로 훌륭한 반응이었지만, TPO가 좋지 않았다.
교사를 비롯한 학생들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발작에 뭐 하는 녀석인가 하는 얼굴로 시선을 보내올 뿐. 곧 상황을 파악한 앨리스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세를 풀었다.
“침, 침 먼저 닦아.”
설마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기에 나도 당황하는 마음이 컸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등 뒤에서 작게 속삭이자 그녀는 황급히 입가에 흐르던 침을 닦고는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애, 앨리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곤 책상을 뚫고 땅바닥에 파고 들어갈 것 같은 기세로 자리에 앉아 몸을 낮췄다.
“깜짝이야.”
“생긴 대로 귀엽네.”
“이따가 말 한번 걸어볼까?”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에 앨리스의 몸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더욱 쭈그러들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무심코 실소가 나왔다. 만약 그녀가 이 세계에 오지 않았더라면 비슷한 풍경의 고등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겠지.
소설 속에 들어와서도 학교에 다녀야 한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오스티아.”
그리고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석이라는 타이틀 아래 관심을 보이는 이들의 시선이 전신을 꿰뚫을 듯했다.
“오스티아다. 특기는 검술, 취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자 서로 다른 감정이 담긴 시선들이 전신을 찔렀다. 그들은 내 말을 한 자 한 자 귀에 새기고 있었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학생들의 모습에 나는 절로 미소가 나왔다.
“취미는 인재 모집이다. 자신의 실력과 재능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펼칠 곳이 없다면 나에게 오도록 해라. 이상.”
한껏 거만한 태도를 하며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말을 내뱉었다. 앨리스 때와 같이 조금의 웅성거림이 일어났지만,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범인(凡人)인 척, 학생 사이에 숨어 있던 조연들의 시선이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들은 각자 자신의 사정을 가슴속에 품고 이곳에 모인 이들이었다.
누구는 삶을, 누구는 재화를, 누구는 내가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능력을 펼칠 장소를.
어중간한 녀석이 이따위 말을 지껄였다면 그 순간부터 외톨이 예약이지만, 입학 수석이라는 타이틀은 이런 측면에서 유용함을 가졌다.
뭔가 있는 녀석이라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면 알아서 미끼를 물고 찾아오겠지.
그 뒤로 자기소개는 무난하게 끝났다. 델르케는 이후에 뭘 할지 생각해 놓지 않았는지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는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첫날이니만큼 여기서 끝내고 싶은데, 학장님께서 학생들과 교류회다 뭐다 진행하라고 했으니 말이야.”
그는 도통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주인공은 처음에 델르케를 보고 대체 뭐 이런 사람이 있냐고 생각했었다. 의욕도 없어 보이고 생긴 것도 어벙하다.
솔직히 지금 모습만을 보자면 지극히 공감되었다.
“수업이라도 할까?”
“…….”
그 말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공간과 시간을 막론하고 입학 첫날부터 수업하는 것은 국제 규정에 위반되기 때문에 학생들 전부가 부정의 의사를 띠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담임은 그렇게 뚝심 있는 성격은 아니었는지 금세 말을 바꿨다.
“그럼, 간단하게 실력이라도 알아볼까.”
* * *
결국, 이루어진 것은 정통 클리셰답게 학생들끼리의 대련이었다.
각자 준비된 로커에서 제복을 벗고 무투복으로 갈아입는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움직이기 편한 활동복이다.
모이기로 한 연무장으로 향하니 우리 반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그곳에 있었다. 표식을 보니 신입생이 아니라 선배들로 보이는 학급이었는데, 개학 첫날부터 빡빡하게 대련을 하고 있었다.
“호.”
곁에서 보기엔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이었기에 자연스레 이목이 쏠렸다.
“자, 그럼 우리도 한 명씩 짝지어서 대련하도록 하겠다. 말 그대로 가벼운 대련이니 상대가 상처 입을 정도로 열중하지 말도록. 서로 간의 실력을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학생들은 금세 친해졌는지 서로 짝을 지어 마주 섰다. 내 짝은 당연히 앨리스였지만, 얼굴엔 아직 졸린 기색이 가득했다.
“대충 할까?”
“아니, 언제까지 졸 순 없으니까. 몸이라도 움직이면 잠기운이 달아나겠지.”
그녀는 하품하며 목검을 손에 쥐었다. 대련인 만큼 마나는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신체 능력으로만 승부를 가린다. 서로 검을 마주하자 조금 전까지 흐리멍덩했던 앨리스의 얼굴에 날카로운 전의가 서리기 시작한다. 과연, 상급 어쌔신다운 모습이다.
“저기.”
막, 대련이 시작될 찰나 익숙한 목소리의 여성이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잠시 검을 내리고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다가온 엘리시아가 옆에 서 있었다.
“방해해서 죄송한데, 저와도 대련해 주시지 않겠나요.”
“음?”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그녀와의 관계는 천천히 진전시켜 나가려 뜸을 들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야.”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던 중, 짜증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선을 돌리자니 미간을 찌푸린 앨리스가 엘리시아를 아니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련 중에 방해하는 건 예의가 아닌데.”
“그래서 죄송하다고 했을 텐데요.”
앨리스의 퉁명스러운 말에 그녀는 담담한 태도로 맞받아쳤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톤이 한 단계 낮아진 것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말로만 죄송하다면 다야?”
“그럼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그거 좋겠네. 그러면 용서해 주지.”
맥락 없는 말싸움이 일어난다. 말로는 앨리스의 압승이었다. 아무렴, 21세기 한국을 살아왔던 여고생이 언변에서 질 일은 없겠지.
“…무례하군요, 당신.”
끝에선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서늘해지며 싸늘한 안광을 내뿜었다.
‘이건.’
둘의 대치를 보고 있자니 무언가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상황의 흐름이 부자연스럽다. 앨리스의 날 선 반응도 그렇고, 원래 성격이라면 깔끔하게 무시하면서 넘어갔을 엘리시아의 태도도 그렇고.
[절대적인 개연성이 작용합니다.] [첫 에피소드. 아카데미 첫날은 아수라장! 이 발생하였습니다.]“……?!”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정도로 깜짝 놀랐다. 두 눈을 깜빡거리며 허공을 바라보자 요 한 달간 내 성장을 보고할 때를 빼면 잠잠했던 상태창에 갑작스러운 문장이 떠올라 있었다.
“…무슨.”
절대적인 개연성, 첫 에피소드.
낯설지만 낯익은 단어들이다. 그제야 나는 어렴풋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편 도입부 부분에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주인공은 용사 특전으로 추천을 받아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런 뒷사정을 모르던 엘리시아는 그가 비겁한 수를 써서 부정 입학을 했다고 착각했고, 무능력한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사건건 시비를 걸다가 결국 대련까지 오게 되었다.
디테일한 부분들은 다르지만, 일단 상황은 비슷했다.
주인공과 히로인의 대립. 다만, 지금은 둘 다 여성이었으니 아이러니했다.
‘그나저나 아수라장이라니. 작명 센스 하고는.’
편집자로서 탄식이 절로 나오는 이름이었다.
“이제 한 대 칠 기세네. 한판 붙어?”
“자신 있으면 그렇게 하죠.”
“이제 그만…….”
말싸움이 너무 불붙었기에 말리려던 찰나, 무언가 거대한 반발력이 내 몸을 밀어낸다. 말하던 입까지 막아버리는 것이 일순간 숨이 막힐 정도였다.
“……?!”
[절대적인 개연성이 작용합니다.]조금 전과 같은 내용의 상태창이 또다시 내 눈앞에 떠올라 있었다. 당황함에 목을 쓰다듬자 그제야 막고 있던 것이 사라지며 숨이 통했다.
‘즉, 스토리의 진행을 방해하는 것은 용납지 않겠다는 건가.’
살짝 기분이 나빴다.
만약 지금 상황이 연재 중인 소설의 내용이었으면, 댓글창에 고구마니 답답하다느니 이런 댓글이 달리며 하차 각이 세게 나왔겠지.
‘이러면 계획을 좀 수정해야겠는데.’
절대적인 개연성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범위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에 대해 면밀하게 살피고 조사해 봐야겠다. 그래야 내가 앞으로 얻을 기연과 보상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방안을 세울 수 있을 테니.
“오스티아, 심판을 부탁해.”
“당신이라면 공정하게 봐주겠죠?”
어느새 둘의 대련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옆에서 가볍게 검을 나누던 학생들도 잠시 물러난 채 그 둘의 모습을 주목했다.
“다칠 정도론 하지 마. 위험하다 싶으면 말릴 거니까.”
둘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한 명에게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내 말에 앨리스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다시금 목검을 들었다.
엘리시아가 검의 천재라곤 하나 주인공 버프를 받은 앨리스를 이길 순 없다. 그야 눈에 보이는 능력치만 해도 몇 단계나 차이가 나니까.
앨리스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손대중할 거로 믿는다.
“어이, 무슨 일인데.”
어디 만화의 주인공이나 할 법한 대사를 치며 다가온 사람은 지금껏 연무장 한쪽 벽에 서서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델르케였다.
대련이 시작되고서야 무언가 낌새를 감지한 듯 어기적거리면서 다가왔고 나는 턱 끝으로 벌써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둘을 가리켰다.
“시비 붙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