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33)
망나니학 개론-33화(33/300)
#033
“거기 내 자린데.”
“아, 앨리스 양.”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앨리스가 뚱한 표정으로 말해왔다. 원래 지정석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베르너는 아차 하는 얼굴로 재빨리 자리에서 비켜났고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그곳에 앉아 제 짐을 풀었다.
“앨리스 양, 좋은 아침. 난 베르너라고 해. 앞으로 잘 부탁해.”
“……? 그래.”
싱긋 밝은 미소와 함께 악수를 청한 베르너의 손길에 앨리스는 시큰둥한 얼굴로 그것을 잡고 두어 번 흔든 뒤 자리에 앉아 책상 위로 엎드렸다.
“후욱.”
베르너를 보니 가관이었다.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귓불이 새빨개져 있다. 잘생긴 얼굴로도 살짝 기분 나쁜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나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 전개는.
“저기.”
그리고 그 직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니 머뭇거리는 모습으로 다가온 엘리시아가 날 바라보며 제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원래의 도도했던 분위기는 어디에도 없다. 그 모습이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와도 같은 모습이었기에 내가 긴장될 정도였다.
“…무슨 용무지?”
최대한 태연한 모습을 가장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니 엘리시아는 제 머리를 한 손가락으로 돌돌 말며 살짝 시선을 피한다. 그러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녀가 일어나면 어제의 일은 미안했다고 전해줘요. 그리고…….”
끝에선 귓불까지 붉어진다. 비슷한 일을 겪은 듯한 기시감에 달아올랐던 내 마음은 짜게 식어갔다.
“치, 친하게 지내자고 이야기해 주세요.”
할 말은 그게 끝이라는 듯 엘리시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났다.
“…….”
책상에 엎어져 정신없이 자는 앨리스를 보자니 살짝 마음이 허탈해져 왔다.
‘그래도 주인공이라 이건가.’
내가 끌어들이고 싶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호감을 표해온다. 이성인 베르너는 몰라도 엘리시아까지 그럴 줄은 몰랐기에 살짝 질투가 났다.
‘아니, 그러면 앨리스를 이용하면 되는 건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를 얼굴마담으로 세운다면 일이 좀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원래 주인공의 포지션인 이상 스토리가 흐를 때마다 어제 보았던 절대적인 개연성이 작용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애초에 앨리스를 그 중심에 밀어 넣고 뒤에서 조종한다면.
“자자, 조용히 하도록.”
번뜩 떠오른 생각은 어느새 교실에 들어온 교사에 의해 끊기고 말았다. 하지만 대충 가닥이 보이는 것이 조금만 정리하면 될 듯했기에 나는 수업을 듣는 척하며 노트에 필기를 해나갔다.
그러나.
“이 문제는 누가 풀어볼까. 아, 이 반에 수석, 차석 둘 다 있었지? 어디 보자, 오스티아?”
“예.”
“이것에 대한 해설은 수석인 오스티아가 해보도록.”
“…예.”
“이 전술에 대한 평가가 그 당시에 어떤 방향성을 의미했는지 오스티아 군이 설명해 보게나.”
“…예.”
수업 내내 이런 식이었다.
아마 저 출석부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이름밖에 적혀 있지 않은 듯했다. 질문들이야 시스템 어시스트 덕분에 대답할 수 있었지만, 선생들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씨발.”
상태창을 보고 읊는 것이라 해도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내가 대답을 할 때마다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감탄하며 박수를 쳤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다. 몇 시간 동안 그 행위가 반복되니 이제 그들도 그것이 당연한 듯 자연스레 넘어갔다.
점심시간이 돼서야 겨우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내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느꼈는지 베르너와 엘리시아는 잠시 눈치를 본 뒤 다른 아이들과 갔기에 난 앨리스와 단둘이 식당으로 향했다.
“뭐, 수석은 언제나 이쁨 받으니까.”
대충 고기를 썰고 있자니 앨리스가 위로랍시고 말해온다. 참고로 그녀는 수업 시간 내내 잠만 잤다. 공부를 안 하느냐고 물으니 어차피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 상관없다고 한다. 속 편한 소리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맞는 말이어서 반박할 말은 없었다.
“참, 엘리시아가 너한테 미안하다고 하더라.”
“엘리시아?”
“어제 너랑 싸웠던 빨간 머리. 아침부터 자고 있어서 깨어나면 전해달래.”
“아.”
“그리고 친해지고 싶다고 말하고 갔다.”
그 말에 앨리스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오물거렸다. 이윽고 음식을 삼킨 그녀는 이상하단 얼굴로 말했다.
“그게 있지, 그렇게 화낼 만한 일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열이 확 오르는 거야.”
그녀는 제 손에서 나이프를 휘리릭 돌리며 멋쩍은 얼굴로 그 끝을 바라보았다.
“나도 뭐, 나답지 않게 화낸 건 후회하고 있어.”
“그러면 직접 이야기하지.”
“여자는.”
푹.
반대 손에 들고 있던 포크로 고기를 찍은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곤 그것을 꿀꺽 삼킨 뒤 명확한 얼굴로 말했다.
“여자만의 방식이 있는 거야. 직관적인 남자들과 다르다고.”
“그거 살짝 성차별적인 말인데.”
“차별이 아니라 차이지.”
“…오.”
뭔가 있어 보이는 말이었다. 그녀 자신이 뭔가 대단한 말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얼굴로 미소 짓지 않았더라면 더 감탄했을 텐데.
투두두둑.
앨리스와 잡담을 나누며 식사하고 있을 찰나,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져 내렸고, 그것들은 곧장 반쯤 먹어가던 내 식판 위를 뒤덮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천장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싶었지만, 내 식판 위를 뒤덮은 것이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거 어쩌나.”
옆에서 들려오는 성의 없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옅은 녹색 머리에 전형적인 양아치 포스를 물씬 풍기는 남자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제 식판을 흔들었다.
“손이 미끄러져서 말이야.”
얼마나 알뜰하게 부어버렸는지 식판엔 음식물 한 점 없었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태도. 그에 내 마음은 싸늘해졌다.
‘깜빡 잊고 있었네.’
황궁을 벗어났지만, 아직 다른 황자와는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상태였다. 황궁에 있을 때보다 직접적인 간섭은 줄어들었지만, 이렇게 자기를 따르는 밑의 녀석들을 시켜 치졸한 공작을 벌이곤 했다.
하지만 첫날부터 이렇게 공개적으로 시비를 걸어오다니. 녀석이 매고 있는 넥타이 색을 흘깃 바라보니 다리우스와 같은 이 학년이었다. 그렇다면 어제의 복수를 하기 위해 보낸 건가.
“이……!”
앨리스가 이를 갈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나는 손을 뻗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러곤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러곤 식판을 들고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이름도 모를 엑스트라 남자는 실실거리며 내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그 뒤로 재미있다는 얼굴을 짓고 있는 녀석들은 같은 패거리일 터.
‘너희 얼굴 다 기억했다.’
이런 자라는 싹들은 짓밟아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잡초처럼 자라 올라서 나를 귀찮게 할 뿐이니까.
후두두둑.
“뭐 하는 거야!”
나는 내 식판 위에 있던 음식물들을 그대로 그의 앞에 쏟아부었다. 사방으로 튀기는 음식물들에 남자는 혹여라도 묻을까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그보다 먼저 몸을 날린 내가 그의 뒤통수를 잡았다.
“……!”
경악한 표정과 함께 남자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늦은 바.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
그대로 손에 힘을 주어 남자의 머리를 음식물로 더러워진 바닥에 처박았다. 꼴에 한 가닥 한다고 그 순간 몸을 비틀었지만, 바닥을 지탱하고 있던 녀석의 정강이를 툭 차버려 균형을 무너뜨렸다.
쿵!
갑작스러운 소란에 식당의 이목이 쏠린다. 나는 등 뒤로 꽂히는 시선들에 만족했지만, 녀석은 그러지 못한 듯 두 팔로 발버둥 치며 내 손에서 벗어나려 했다.
“…한 번 더?”
쿵!
조금 전보다 더 강하게 그의 머리를 내리꽂는다. 그러자 몸을 부르르 떨더니 팔다리가 축 늘어진다. 더는 움직임이 없었기에 나는 머리를 놓곤 손에 묻은 음식물을 그의 제복에 닦았다.
“선배님?”
“…으어?”
뒤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이를 부르자 꼴사나운 목소리와 함께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다. 그는 곧 자신의 추태를 깨달았는지 시뻘게진 얼굴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선배님 친구신 것 같은데, 보셨다시피 제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부딪혀서 쓰러지셨거든요. 좀 부축해서 의무실로 가주시지 않겠어요?”
그는 나와 쓰러진 남자를 몇 번 번갈아 보더니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듯 입술을 씹으며 제 친구의 몸을 들쳐 엎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 뒤로 서너 명의 인원이 같이 꽁지가 빠지도록 가는 것을 보니 십 년 묶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다 속이 시원하네.”
앨리스가 잘했다는 듯 엄지를 곧추세운다. 그에 나는 씩 웃으며 손을 털고 내려놓았던 식판을 집어 들었다.
바닥에 흐트러진 음식물이야 식당을 관리하는 시종인이 청소할 것이었다. 미안한 소리지만, 지금 그것들까지 치워줄 의리는 없었다.
앨리스도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식기를 반납한다. 식당 분위기는 아직 어수선했다. 학생들은 우리를 보며, 정확히는 나를 보며 수군거렸고 더러는 내 경로에서 슬쩍 몸을 피하면서 거리를 벌렸다.
이것은 다른 황자와 그들의 휘하 머저리들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어설프게 시비를 걸었다간 크게 망신을 당할 것이라는.
“뒷감당은 괜찮아?”
앨리스는 슬쩍 주변을 살피며 나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은 척해도 날 걱정해 주고 있는 건가.
“내 신분을 잊었어?”
이 세계는 힘과 신분이 깡패다.
그리고 난 최소 아카데미에선 그 두 개의 정점에 있었다.
* * *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수업이 재개되었다. 신입생의 학기 첫 주는 적응 기간이라며 실습을 비롯한 외부 활동이 시행되지 않았다. 어제 있었던 대련 역시 우리 반만 이루어진 것이 아마 주인공의 효과인 듯싶었다.
“…….”
앨리스는 춘곤증이라며 이미 한창 꿈나라에서 헤매는 중이었다. 색색 숨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잠들어 있는 것이 꼭 아기 같아서 귀엽기 짝이 없다.
부드러운 그녀의 볼을 꾹꾹 누르며 장난치고 있자니 주위에서 수군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벌써 퍼졌나.’
식당에서의 사건이 한바탕 교내를 휩쓸고 지나간 듯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역시 점심 이후의 수업은 졸리다. 특히 창가 바로 앞자리라 따뜻한 봄 햇살의 은혜를 직격으로 받아 나조차도 슬슬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헤르만 선생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러던 차, 갑작스러운 방문객에 수업이 중단되었다. 반쯤 졸고 있었기에 슬쩍 눈을 비비고 문 쪽을 보자 우리 반의 담임인 델르케가 어느새 이곳에 와 있었다.
“오스티아, 잠시 좀 보자.”
“…….”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잠기운이 씻은 듯 떠내려간다. 교실 내의 모든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기다란 복도를 따라 고풍스러운 장식이 그려져 있는 교무실을 향한다. 하지만 델르케는 그곳을 지나쳐 비어 있는 교실 안으로 나를 인도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델르케는 평소 만사가 귀찮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봐 왔다.
…벌써 이 사람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내 계획엔 변함이 없었다. 물론 지금 이 상황조차 내 계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나는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