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70)
망나니학 개론-70화(70/300)
#070
“정말로 세간에 알리지 않아도 괜찮은가요?”
우리는 두 자루의 검을 챙긴 뒤 어둠의 신전을 나왔다.
페트라는 검을 얻었지만, 신전 자체에 미련이 남았는지 계속해서 아쉽다는 목소리로 뒤를 돌아본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어둠의 신전을 발견했다는 것을 발표한다면 학계의 큰 주목을 받을 거라 했다.
정식적인 조사 후에 이곳이 정말로 어둠의 신전임이 확인된다면 큰 명예까지 뒤따라올 것이라고까지 강조했지만, 나에게 있어 별 이점이 없는 이야기였다.
“불필요한 일에 휘말리는 건 사양이라.”
그렇기에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자니 그녀는 나답다며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안에서 꽤 시간을 보낸 것인지 밖으로 나오자 끝 무렵의 석양이 우릴 반긴다. 서둘러 돌아가면 아카데미 통금 시간 안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지만, 우릴 기다리고 있기로 약속한 마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날랐네.”
분명 이곳에 올 때 웃돈까지 얹어주며 저녁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날이 어두워지니 먼저 철수한 건지, 다른 손님을 태우고 돌아간 건지는 몰라도 우리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은 분명했다.
세파할 신전은 관광지로 분류되긴 했지만, 도심과 떨어져 있는 외곽에 자리했다. 도보로 돌아가기엔 무리가 있었고 이대로라면 영락없이 노숙해야 할 판이었다.
‘장비는 아공간 주머니에 있으니 괜찮지만…….’
슬쩍 페트라를 바라보니 그녀는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하룻밤을 지내고 갈 생각은 하지 못했겠지.
“…근처에 여행객들을 받는 여관이 있던 거로 기억해요.”
몇 년 전 지나가며 본 거로 정확하진 않다며 말해온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우리는 그곳으로 방향을 잡았고, 다행히 그녀 말대로 영업 중인 작은 여관 단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작은 돌 언덕 밑에 지어진 여관 단지는 그 주위를 따라 울타리와 함께 경비를 서는 이들이 자리했다. 그런 만큼 다른 곳보다 두 배가 넘는 요금을 지불해야 했지만, 다행히도 돈은 썩어 넘쳐날 정도로 많았다.
방은 각자 두 개를 사용했다.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다는 만화 같은 전개를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여관은 한산했다.
신전에서 묻은 먼지와 땀을 씻은 뒤, 우리는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각자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하지만 기껏 밖으로 나왔는데 이대로 잠자리에 들기는 아쉬워서 난 다시 로비로 내려왔다. 밤이 되어서 그런지 식당 쪽엔 술을 마시는 몇몇밖에 없었다. 고즈넉한 중세풍의 여관 분위기에 나 역시 술이 당겨 사장에게 돈을 주고 한 병 받아 왔다.
여관을 나서니 미적지근한 여름밤의 공기가 코끝을 스친다. 다만,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했고 하늘은 맑게 개어 밤 산책을 하기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여관 단지 위에 있는 언덕 둔치에 앉아 새파랗게 떠오른 두 개의 달을 보자니 술이 저절로 들어간다. 그러고 있자니 문득 고향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도 일하고 계실 부모님과 힘들 때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를 위로하던 친구들.
같이 앓는 소리를 내며 고생하는 편집자 동료들과 미우나 고우나 내 담당인 탓에 아낄 수밖에 없는 담당 작가들까지.
내가 이 세계에 온 것으로 현실에선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바뀌었을까. 실종 처리가 되었을까, 아니면 애초에 나는 없던 사람이 되었을까.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니 기분이 살짝 울적해진다. 그렇기에 이젠 술을 병째로 들이켜며 홀로 외로움을 달랬다.
그래도 이젠 이곳에서도 혼자가 아니었다.
가까이엔 파르시가 있었고, 앨리스도 있었다. 세계관 최강자로 꼽히는 검성 요하넬과 대마도사 크리스가 내 편을 들어주었으며, 아카데미에 와서도 많은 이들을 사귀었다.
하지만 가슴 한편에 뻥 뚫려 있는 듯한 이 기분은 어째서 사라지지 않을까.
“쯧.”
씁쓸한 감정에 혀를 차니 누군가 여관에서 나와 이쪽으로 향하는 것이 보인다. 곧 달빛이 음영을 걷어낸다. 그러자 윤기가 흐르는 붉은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흔들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청승맞게 왜 여기서 혼자 있으시나요.”
“…말이 점점 험해지는군.”
“이제 와서 불경죄로 처벌하기엔 늦었잖아요?”
페트라는 어깨를 으쓱이곤 내 옆에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았다. 그러곤 내가 마시던 술을 빼앗아 들곤 잔에 따라 조심스럽게 마셨다.
“…술은 처음 마시나?”
그 조심스러운 모습에 의외란 표정으로 묻자 페트라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귀족가의 자제는 어릴 적부터 교육을 받잖아요. 그래도 이런 쪽에서 파는 부류의 술은 처음인지라.”
생각한 것보다 독했는지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나도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소주보다 살짝 도수가 높은 수준인 것 같은데.
“…마음에 들었나 보네.”
나는 다시금 술병을 기울이며 그녀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향해 말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붉은 그 검의 이름은 홍련(紅蓮)이다. 아까 그것을 말해주니 페트라는 마음에 드는 이름이라며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지금 역시 이런 자리까지 검을 차고 올 정도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네,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이때껏 많은 사람한테 선물을 받았지만, 이것만큼 기쁜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녀는 정말로 기분이 좋은 듯 허공에 발을 까딱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나는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곤 다시 달을 감상했다.
“…저희 대련이나 한번 할까요?”
“대련?”
그러던 와중 들려온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난 두 눈을 크게 떴다. 페트라는 그런 나를 보곤 진지한 얼굴로 말해왔다.
“당신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은 알겠어요. 오늘의 일도 저에게 주는 시험이겠지요.”
왜인지 묘한 착각을 하는 듯했다.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고 있자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작 집행자 하나에 고전한 것으로 그 시험을 통과했다곤 할 수 없겠죠. 자, 일어서세요. 당신이 바라는 대로 제 전부를 부딪침으로 제 의의를 증명하겠어요.”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시뻘건 불꽃이 일렁이는 듯했다. 그것에 난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 말은 스스로 내 것이 되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피차 약혼한 사이, 좋은 게 좋은 것 아닌가요? 명예나 권력 따위로 관계를 맺는 것보단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페트라는 설마 나에게 그럴 배짱이 없냐며 도발해 온다. 그것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이래서 내가 그녀를 좋아했다.
이 세계에선 매력적인 여성들이 많이 나오지만, 그녀만큼 당당하고 굳센 여성은 없다. 마음을 결정한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녀와 마주했다.
“오늘 너와 이곳에 온 것은 좋은 선택이었군.”
“그 생각, 변하지 않게 해드릴게요.”
난 허리춤에 매여 있던 아공간 주머니에서 자주 쓰던 검을 빼 들었다.
“…엑스칼리버는 사용하지 않는 건가요?”
“그건 필살기거든. 함부로 노출하는 전력이 아니야.”
신전 안에서 엑스칼리버를 사용했기에 그녀에겐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엑스칼리버의 전설은 검을 사용하는 이라면 모를 수 없는 것. 페트라는 내가 엑스칼리버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에 놀람을 표했다. 아마 지금의 태도 역시 그때의 일 때문에 그럴 테지.
“streuende Rosen(흩날리는 장미꽃).”
페트라는 홍련을 잡고 수직으로 들어 올린 채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집행자를 상대했던 것과 같은 검술이었지만, 그 싸움을 토대로 진보했는지 한층 더 날카롭고 무거워진 기세가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홍련 위로 붉은 서기가 서린다. 어둠을 밝히는 그 선명한 오러에 나 역시 흥이 돋았다.
쐐애애액-!
붉은 섬광이 어둠을 베어 가르곤 긴 꼬리를 남기며 나에게로 쇄도한다. 자신의 전력을 부딪치겠다는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닌 듯 정말로 내 급소를 노려오며 군더더기 없는 공격을 펼쳐냈다.
꽈아악.
나 역시 검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그러자 페트라의 것에 대적하듯 시퍼런 오러가 그 위를 휘감는다. 처음 보이는 내 전력에 그녀의 두 눈이 가늘어진다. 아마 내 기세를 가늠하려 하는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내 쪽의 경지가 더 높다.
투다다다다-!
한 호흡 동안 수십 번의 찌르기가 내 전신에 작렬한다. 앨리스였다면 제법 고전했을 테지만, 속도는 이쪽에서도 지지 않는다.
캉-!
붉고 푸른 오러의 파편이 허공에 흩날리며 그녀의 공격이 전부 막힌다. 좀 더 힘을 써보라는 뜻으로 검을 까딱이자 페트라는 검을 땅과 수평으로 세워 그 끝을 날카롭게 벼렸다.
“스펜(Shupen)-.”
쿵-!
마치 거창으로 찌르는 듯한 파공성이 귓가를 스친다. 그녀의 검 끝이 내 지척에 이르렀을 때, 이미 밀려난 공기가 내 전신을 압박하던 와중이었다. 난 그것을 흘리지 않고 이번엔 내 쪽에서 공세로 나아갔다.
검성류(劍聖流) 오의 절(切)
페트라의 검은 분명 공기를 뒤로 밀어버릴 정도로 날카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 자체를 끊어버리며 그녀의 공격을 무위로 되돌렸다.
“읏?!”
자칫 잘못하다간 자신의 몸까지 내 공격에 휘말려 조각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 페트라는 황급히 검을 거두고 태세를 정비한다. 이미 서로 간의 격차는 명백히 나뉜 뒤였지만, 그녀는 신전 안에서와 같이 포기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을 속박하던 굴레를 털어낸 후련함인지, 아니면 나에게 전력을 부딪치겠다고 선언한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험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어느 쪽이든 좋다고 생각했다.
쐐애애액-!
순간적으로 파고든 내 신형을 막으려 그녀의 홍련이 채찍처럼 휘둘러진다. 하지만 난 그것을 가볍게 튕겨내었고, 그 반동으로 쓰러질 듯 휘청거리던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품에 안았다.
그다음부턴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나는 달빛에 비친 페트라의 눈동자 위로 피어오른 불꽃에 매료되었다. 그러기에 그 빛에 이끌린 불나방처럼 그녀에게 얼굴을 가져갔다.
“……!”
가벼운 입맞춤이 이어진다. 페트라는 매우 놀란 듯 날 밀어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온몸을 경직시켰지만, 이내 나에게 몸을 맡기며 조용히 눈을 감아왔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길어질 것 같았다.
* * *
다음 날 아침.
달그락거리는 마차 안에 감도는 어색한 공기에 고개를 돌리니 시종일관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는 페트라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마차를 탄 직후부터 일절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지만, 슬쩍 드러난 귓불은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새빨갰다.
우리는 날이 밝자마자 그대로 마차를 타고 아카데미로 출발했다. 휴일은 오늘까지기에 시간적으론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그녀에겐 처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다만, 마차에 탄 뒤로 페트라는 나에게 대화를 건네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페트…….”
“…부탁이에요.”
이쪽에서 먼저 이름을 부르자니 페트라가 내 말을 끊고 선수를 쳐온다. 그녀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웅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말해왔다.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이런 건 처음이라.”
“부끄럼 타기는.”
슬쩍 농을 흘리자 이제야 붉어진 얼굴로 날 노려봐 온다. 그것에 난 두 손을 들었고 페트라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대련이 끝난 직후 나는 분위기에 휩쓸려 그녀를 품에 안았다. 고작 키스로 끝났다면 저렇게 부끄러워할 일도 없을 터.
하지만 페트라 역시 분위기에 휩쓸렸고, 우리는 그대로 여관에 돌아가 깊은 교제를 나눴다.
이른 아침, 서로 같은 침대에서 깨어났을 때 그 기분은 뭐라 말로 설명하지 못할 묘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당황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익숙한 모습이었다. 원작에서의 그녀도 자신이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줄 몰랐다며 한동안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니. 지금은 그때보다 더 나은 모습인 것 같아 다행이다.
그렇게 우리는 아카데미에 다시 돌아왔다. 고작 하룻밤 동안의 외출이었지만, 오랫동안 잊지 못할 추억이 생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