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8)
망나니학 개론-8화(8/300)
#008
장막의 저주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티르빙에 사용했듯 원작의 레이오스 역시 말을 듣지 않는 그녀를 구속하는 데 장막의 저주를 요긴하게 사용했다.
“조질 뻔했네, 진짜.”
하지만 원작보다 더 이른 시간에 얻으려 해서 그런 것인지 생각보다 반항이 거셌다. 원래라면 주인이 될 자격을 시험하겠다며 어쩌고저쩌고하며 대화를 걸어올 텐데.
만약 티르빙에 몸을 빼앗겼다면 앞으로의 이야기고 뭐고 거기서 끝이었다. 아마 반나절 정도 검을 들고 설치다가 기사들에게 목이 썰리겠지.
신살의 마검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검이었지만, 이곳은 황실이다. 아직 각성도 하지 못한 일개 마검 정도는 가볍게 찜 쪄 먹는 실력자들이 즐비한 곳.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황궁. 어설픈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
신음을 내뱉던 티르빙은 의식을 잃었는지 축 늘어져 있었다. 원작의 레이오스와 지금의 내가 무엇이 다르기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레이오스가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서는 것은 아카데미를 졸업한 직후다. 그 전에 티르빙을 얻었으니 지금과 별 차이는 없을 터.
지금의 몸도 내가 사용하지 못해서 그렇지 어지간한 기사한테도 꿇리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황자 중에서 제일 강한 일 황자 카리우스도 정면 대결에서는 내 상대가 안 될 텐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티르빙과의 한바탕 난투극이 모두 끝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오즈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나는 두꺼운 장서 한 권을 쓰다듬었다. 바닥에 내리꽂혀 실신한 티르빙은 어느새 다시 책의 형태로 돌아가 있었다.
차라리 오즈가 늦게 와서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서고에서 아이를 무자비하게 패버린다고 소문이 났을 테니. 아, 어차피 망나니로 소문났으니 악명 하나 정도는 상관없으려나?
“잠깐 책을 꺼내다 미끄러져서 말이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서고에 아무리 귀한 서적이 있다지만, 전하께서 다치기라도 하신다면…….”
‘오?’
왜인지 날 걱정해 주는 말투였다. 그에 살짝 감동할 찰나 이어지는 말에 내 기분은 짜게 식고 말았다.
“제가 문책을 받습니다.”
“…….”
결국, 자신의 안위 문제인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니 오즈는 농담이라며 살짝 미소를 지어왔다.
별난 사람인 것 같다. 내 소문을 들어보지 못했을 리는 없을 테고 보통 사람이라면 황족이나 귀족한테 감히 농담을 던질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텐데.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건가.’
“그래서 책은 찾으셨습니까?”
“이걸 빌리고 싶은데.”
나는 티르빙이 의태한 책을 들었다. 그것을 유심히 살핀 오즈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삭풍이 부는 겨울, 멸망한 일족의 한을 풀기 위해 홀로 지옥에 남아 철을 두드리던 장인의 이야기군요. 좋은 책입니다.”
“알고 있나?”
상태창이나 시스템 어시스트의 보정 효과인지 두꺼운 표지에 쓰인 제목은 나도 읽을 수 있었다.
‘최후의 검.’
오즈의 말에 살짝 놀란 마음이 들었다. 이건 서고에서도 거의 구석진 곳에 있었는데.
제목을 슥 보고 내용을 알아맞힌다는 것은 그의 식견이 대단하다는 증거였다.
“저는 황궁 서고의 사서장입니다. 제가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의 도서들은 대부분 읽었습니다.”
“대단하군.”
황궁 서고인 만큼 그 규모가 무지막지하다. 몇천, 아니, 몇만 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열람이 허락되는 한 대부분 읽었다니.
‘넌 무조건 내 사람으로 만든다.’
“그럼 이 책으로 대출 자료를 작성해 놓겠습니다.”
“부탁하지.”
“아, 그리고 이 최후의 검은 단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후의 이야기도 있고 이 전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만, 이 서고에 있는 것은 이것뿐이라 아쉽군요.”
다른 도서들의 소재를 알 수 없다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말 대부분을 한 귀로 흘리며 그저 미소 지은 채 고개를 끄덕여줄 뿐이었다.
내 궁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몇 명의 사람들과 마주쳤지만, 그들은 모두 내 시선을 피하며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기분이 좋을 따름이었다.
마검 티르빙.
진정한 능력을 각성하게 되면 후에 제국을 침공하는 마족이나 최강의 종족이라 할 수 있는 드래곤과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무구다.
아직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차차 이루어가면 될 일. 거기에 나는 티르빙과 관련된 몇 개의 소스를 알고 있었다. 그것들을 적당히 풀면 꼬드기는 것도 문제는 아니겠지.
“음?”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에 돌아오니 못 보던 여인이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유로운 손놀림으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차를 마시던 그녀는 내 등장에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오셨군요.”
인상적인 붉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허리춤에서 사락거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흰 눈과 같은 피부를 지닌 미녀에 나는 그저 멍하니 문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 표정을 보니 제가 오늘 방문하겠다고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고 계시지 않으셨군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투정 어린 말을 내뱉었다. 그제야 나는 눈앞의 여성이 누군지 깨달을 수 있었다.
페트라 폰 라이프치히.
레이오스의 약혼녀이자 라이프치히 백작가의 장녀였다.
‘설마, 이 타이밍에 보게 될 줄은.’
라이프치히 백작가는 원래 명문이라 불릴 정도로 뿌리가 깊은 가문이었지만, 몇 대전부터 모종의 이유로 가세가 기울었다.
하지만 현 라이프치히 백작은 야망이 큰 인물.
가문의 부흥을 위해 딸을 팔아넘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비록 그 상대가 황제의 서자인 레이오스일지라도.
원치 않은 관계였지만, 그녀도 가문의 부흥을 바랐기에 자신의 희생을 기꺼이 감수했다.
레이오스의 평판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니, 사실은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마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부패 귀족도 이리 나쁘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그런 오명을 감수하고 레이오스의 손을 잡고 싶어 할 정도로 황실의 권위는 막강했고, 라이프치히 백작가는 간절했다.
원작에서의 두 명은 서로 이용하고 이용했던 관계였다.
결혼이라는 명분으로 묶여 있었지만, 서로를 사랑하지 않던 육체뿐인 관계.
하지만 둘은 어느샌가 서로의 모습에 동질감을 느꼈고, 결국엔 마음을 열었다.
겨우 서로의 상처 입은 마음을 보듬어줄 상대가 나타나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분명 장르는 판타지였지만, 농밀한 로맨스의 향기가 여성 독자들의 마음을 자극했다고 어느 서평에도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파국을 맞이했다. 그를 배신하란 가문의 명령에 페트라는 결국 레이오스를 대신해 죽음을 맞이했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죽어버린 자신의 연인. 그것은 레이오스를 또 한 번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게 했고 결국, 그 분노를 양식으로 삼아 티르빙이 두 번째 각성을 맞이했다.
“…제 얼굴에 무엇이라도 묻어 있나요?”
세계관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미녀가 의구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에 나는 살짝 고개를 돌리고 눈가를 훔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일 아니다.”
“…….”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편치 않았다. 하긴 자신을 두고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렸다는 것을 좋아할 여자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것이 원래의 레이오스였다. 대외적으론 그의 모습을 연기해야 하므로 나는 짐짓 거만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앉지.”
“…아버님의 말씀에 따라 전하의 얼굴만 보고 가려 했습니다만.”
페트라는 한숨을 내쉰 뒤, 내 앞에 앉는다. 그러곤 진지한 얼굴로 나를 향해왔다.
“다른 전하들과 트러블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조금?”
“조금이라고 하기엔 그 여파가 강하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독살당할 뻔한 일을 말한 것이라. 그것은 명백히 내 실책이었기에 입이 열 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주제넘은 발언이나 감히 말씀드리자면 전하의 행동은 약혼자인 저와 제 가문인 라이프치히 백작가에 영향을 끼치십니다. 그러니 좀 더 신중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닥치고 같이 엎드려 있자 이건가.
살짝 거슬렸지만, 이쁘니까 봐줬다.
“참고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지만, 그녀는 아직 내가 미덥지 못한지 불신의 눈을 거두지 않고 있다.
“참, 아카데미 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가오는 건국절에 발표한다고 전해 듣긴 했습니다만.”
“아직 들은 것은 없다.”
며칠 뒤로 리베라 제국이 세워진 것을 기념하는 건국절이 다가와 있었다.
제국이 건국된 날을 기념하는 것인 만큼 곳곳에서 축제가 열릴 것이고 이곳 황궁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날, 레이오스와 아우구스는 황제의 명에 의해 아카데미 입학이 결정될 예정이었다.
아카데미의 입학은 레이오스의 행동에 큰 변화를 가져옴과 동시에 원작이 시작되는 도입부이기도 했다.
나는 악역으로, 그는 주인공으로.
그것이 메인 스토리의 시작. 그때부터 세계는 스토리라는 이름 아래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후.”
작은 한숨 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내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는 몰라도 페트라는 여전히 어두운 얼굴이었다.
그래, 지금은 썩은 동아줄을 붙잡았다고 생각할 테지.
하지만 그 생각은 곧 바뀌게 될 거다.
* * *
페트라가 돌아간 후, 나는 앞으로 일어날 전개를 꼼꼼히 살폈다.
티르빙을 얻었을 때처럼 무언가를 간과해 일을 그르치지 않을까 싶어 두세 번 검토를 걸쳤고 한밤중이 돼서야 초반부를 정리할 수 있었다.
300화에 달하는 분량인 만큼 그 뿌리 또한 깊숙하기 그지없다. 떡밥을 뿌렸다가 적절한 시기에 회수하는 것이 오늘날 작가님의 특기였으니.
담당 편집자로 일한 기억 덕분에 전부는 아니어도 대충은 기록해 놨고 그것들을 어떤 식으로 이용해 나갈지는 차차 상황을 살피면서 결정하면 되었다.
“읏차.”
이미 시각은 자정을 훌쩍 뛰어넘은 상황. 가끔 동침하곤 하던 파르시는 제 숙소에 가서 자게 했다. 이곳에서 재웠다가 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뒤척이면 미안하니까.
펜촉에 묻은 잉크를 닦고 탁자에 내려놓았다. 슬슬 잠자리에 들려 기지개를 필 찰나,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이런 늦은 시간에 파르시를 제외하곤 나를 찾아올 사람은 없다고 봐야 했다. 순간적으로 몸이 경직되었으나 그 혀 짧은소리에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깨어났나.”
언제부터였는지 티르빙은 침대 끝쪽에 걸터앉아 발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 시선에 밤의 색과 같은 짙은 흑발을 나부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이 시간까지 무얼 그리 끄적거리고 있는 것이지?”
혀 짧은 아이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경직된 말투에 무심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아까처럼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장막의 저주를 빼앗으려 할 줄 알았으나 그녀의 얼굴에선 낮에 보았던 적개심이 어느 정도는 가라앉은 느낌이 들었다. 대신 그곳에 자리한 것은 나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아카식 레코드라고 알아?”
티르빙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언제가 생각해 두었던 변명을 꺼내 들었다.
“아카식 레코드?”
들어보지 못했던 것인지 그녀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설명해 보라는 시선에 나는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이 기록된 세계의 기억이라 할 수 있지.”
“…비슷한 것은 들어본 적이 있다. 이데아라고 했던가?”
아카식 레코드는 모르면서 이데아를 들어봤다니. 철학적인 관점에서는 후자가 더 복잡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카식 레코드든 이데아든 맥락은 같아. 모든 기록의 총체. 그리고 나는 그 일부를 엿봤다.”
“엿봤다고?”
거짓말은 아니다. 이 세계의 관점으로 보면 SSS급 이세계 절대자는 그야말로 아카식 레코드나 다름없으니까.
엿본 것뿐만 아니라 일부 정도는 내 지분이 들어가 있다.
…많게 잡아 한 5% 정도?
티르빙은 내 말에 흥미가 동했는지 내 옆으로 다가와 탁자 위에 있는 양피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읽을 수 있을 턱이 있나. 한글로 쓰인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