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95)
망나니학 개론-95화(95/300)
#095
향긋한 와인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우리는 도시의 전경이 훤히 드러나는 야외 테라스에 앉아 서로 술잔을 나눴다.
목욕하고 나온 지 얼마 안 돼서인지 머리카락 사이로 살랑이는 밤바람에 기분이 좋아진다.
슬슬 가을에 접어드는 밤은 선선하기 짝이 없었고, 향긋한 와인과 마음이 맞는 친구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이보다 더 나은 곳이 있을까 싶다.
‘시라도 한 구절 읊고 싶어지네.’
현실이 그리웠지만, 그렇다고 지금이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제국의 황자, 소드 마스터, 4클래스 마법사.
날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비록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닐지라도 내 노력이 들어갔다. 그러니 애착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내 주위에 있는 이들은 레이오스의 입김이 개입되지 않은 나만의 결과물이다. 물론 상황과 배경은 그의 것이었지만, 지금의 장면까지 이야기를 끌고 온 것은 나의 노력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해?”
한동안 우리는 대화 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들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베르너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어온다. 그것에 난 빈 잔을 채우며 답했다.
“삶이란 무엇일까.”
“실없는 소리네.”
그는 쿡쿡 웃으며 나에게 빈축을 주었다. 그런 설정으로 짜인 캐릭터라 그렇겠지만, 그래도 좋은 녀석이라 생각했다. 말 그대로 이런 실없는 소리에도 잘 어울려 주니.
나는 술잔을 돌리며 역으로 그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네 쪽이 더 궁금한데.”
“왜 그렇지?”
“괜찮은 건가 하고.”
많은 것이 내포된 질문이다. 그것에 베르너는 쓴웃음을 짓고는 조금 긴 침묵 끝에 가까스로 말을 내뱉었다.
“괜찮은 척하려고 노력 중이야.”
2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었다. 다른 이들은 별생각 없이 사우스요크셔에 와서 관광하는 중이었지만, 베르너만은 조금 다른 상황이었다.
데메드리오 왕국에서 일어난 테러. 그것은 마치 사전에 계획이라도 되어 있었던 것처럼 빠르고 안정적인 상태로 수습되었다.
그 중심에 아이작 검호대장군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기에 당연한 일이기도 했지만, 한 나라의 왕이 서거했는데 아무런 잡음조차 나오지 않고 다시 제자리를 되찾았다는 것엔 나조차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일부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을 터. 특히 베르너는 이번 일로 아버지를 잃었다.
물론 평범하거나 순탄한 관계는 아니었겠지만,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죽었다는 것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뭐, 왕으로서는 몰라도 그렇게 좋은 아버지는 아니셨으니.”
잠시간 침묵에 잠겼던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처럼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절대 소설 속의 캐릭터 따위가 표한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렇구나.’
나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어느 순간부터 이 세계에 속한 이들을 나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사람이라 받아들이고 있음을.
같은 공간에서 나와 같이 숨을 쉬고 감정을 느끼고 움직이는 이들을 어찌 단순한 창작물의 부속품으로 여길 수 있을까.
베르너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담담히 말문을 열었다.
“검호대장군은 나에게 귀국하라고 서신을 보내왔지만, 형님은 오지 말라고 하셨다. 와보았자 좋은 꼴은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아시니 그렇겠지.”
“형님은 어떤 분인가.”
“좋은 분이지. 나라는 동생에겐 과할 정도다. 아마 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르셨다면 데메드리오 왕국은 더 성장할 수 있었겠지.”
어디선가 들었던 익숙한 말에 작은 미소가 지어진다. 베르너는 그 말을 내뱉듯 말한 이후 두 손으로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구름 사이로 가려졌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던 두 눈동자엔 무언가의 각오가 깃들었다.
“오스티아, 너는 학기 초에 자신을 소개했을 때 인재 모집하는 것을 취미라 했었지.”
그리운 이야기에 난 술잔을 흔들었다.
-취미는 인재 모집이다. 자신의 실력과 재능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펼칠 곳이 없다면 나에게 오도록 해라. 이상.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투박한 소개가 아니었나 싶다. 조금 더 잘 말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 베르너는 내 말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특이한 사람이 있구나, 하는 정도의 감상이었겠지. 하지만 지금 나와 마주하는 그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나는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턱없이 낮다. 원래도 그랬지만, 이번 일로 그것은 더욱 0에 수렴하게 됐지. 가진 능력도 애매해. 아카데미에서만 따지자면 검술은 자신이 있지만, 넓게 보면 네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뒤에 있는 세력도 미천하고, 끽해야 내 안위를 살필 재력밖에 없다.”
그는 숨도 쉬지 않은 채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몸은 그렇지 않았다.
몸은 경직되어 있고,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팔에는 힘줄이 불쑥 솟아 올라있었다.
두 손으로 쥐고 있는 잔이 깨어지지 않을 것을 보니 가까스로 참고 있는 듯했지만, 점점 짧아지는 호흡은 베르너의 마음이 꺾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도, 이런 나라도… 괜찮은가?”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 놓았다. 그러곤 품 안에 잠들어 있던 내 격을 일깨웠다.
화아아악-!
소드 마스터에 이른 격이 우리가 있는 공간을 장악한다. 그것은 설사 셰필드 백작이라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권역을 형성했고, 조금 전까지의 분위기를 싹 날려 버렸다.
“…….”
베르너의 손이 덜덜 떨린다. 압도적인 격차에서 오는 압박감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는 끝끝내 물러나지 않았다.
그것에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의지와 목표가 없는 인간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재를 모집한다고 했지만, 산송장을 곁에 둘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 가운데 쌓여 있는 자기혐오와 불안을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눌러 주었고, 베르너는 그것을 훌륭하게 견뎌내었다.
“그래, 네 말대로 나는 누구든 나에게 오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나 곁에 둔다는 소리는 아니지.”
내 곁에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그것은 일신의 무력이 될 수도 있고 가진 지식과 그것을 풀어나가는 지혜가, 혹은 재력이나 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야 난 그들에게 다시 한번 더 도약할 수있는 기회란 이름의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넌 자신을 증명할 각오가 있는가?”
내 물음에 베르너는 입을 닫았다.
아직 소드 마스터의 격이 그의 전신을 짓누르고 있는 상태다. 그것은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빼앗아 갈 테고, 베르너의 진심을 보여줄 터.
마침내 그는 힘겨운 표정과 함께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 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소설이었다면 미친 듯한 필력으로 쓰인 것도, 눈물 나는 연출로도 이루어지지 않은.
그저 단순한 문답으로 구성된 대화였다.
하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누군가에겐 이것은 별 상관 없는 이야기겠지만, 나에게 있어선 절절한 현실이었으니.
“미친 망나니 황자의 손을 잡은 걸 환영한다, 젊은 왕자여.”
나는 기세를 거두곤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것에 베르너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 가득히 흘러내리고 있던 땀을 닦았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줄 알았어.”
“너의 진심에 나 역시 진심을 보여줬을 뿐이다.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풍파가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는 가볍게 통과해야지.”
“…그 말을 들으니 조금 걱정되는데, 나중에 다시 무를 수 있지?”
우리는 우스갯소리를 흘리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내 눈짓에 베르너는 제 술잔을 들었고, 곧 두 개의 술잔은 청명한 소리를 내며 달빛 아래서 부딪혔다.
* * *
쿵쿵쿵쿵-!
와인 한 병을 다 비워갈 때쯤, 복도가 울리며 여러 사람이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무슨 일인가 싶어 의아한 표정으로 문 쪽을 바라보니 경직된 표정의 여성진을 볼 수 있었다.
“…왜?”
우리, 특히 날 보는 시선이 복잡하다. 혹시 자신들을 빼놓고 술을 마셔서 그런가 싶어 등받이에서 몸을 떼자, 뭐가 그리 급했던 것인지 아직 머리카락이 물기에 젖어 있는 앨리스가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의심하는 것 같은 상황이라 미안한데…….”
그녀는 뺨을 긁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자신들이 목욕하고 있는 사이 누군가 몰래 들어왔단다. 연기가 자욱해서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마리아가 소리를 지르자 다급히 밖으로 빠져나갔다고 했다.
“혹시 몰라서 경계하고 있었는데, 설마 내 감각까지 속일 줄이야.”
앨리스가 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에 난 그들이 날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이 저택에서 셰필드 백작을 제외하면 앨리스의 감각을 속이면서까지 목욕탕에 침입할 수 있는 사람은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럴 이유도 없을뿐더러, 밝혀지게 된다면 자신들의 주인인 셰필드 백작에게 몰매를 맞을 터.
그렇기에 나를 비롯한 남성진이 장난을 쳤나 의심했다는 것이다.
“감히 날 의심하다니, 조금 괘씸한데.”
나는 곧바로 앨리스의 뺨을 양쪽에서 잡아당기며 그녀를 단죄했다.
“아흐, 미아하다니가.”
“레이시스 양은 어디 갔어?”
그러던 차, 베르너가 일행의 구성을 보고 갸웃거린다. 그 물음에 엘리시아가 답했다.
“경비를 서던 이들한테 수상한 사람이 없었는지 물어보러 갔어요. 혹시 보았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때, 갑자기 저택이 부산스러워진다. 곧 사방에 환하게 불이 켜지고 테라스 밑으로 십수 명의 병사들이 급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은데.”
일행 역시 그것을 눈치챈 듯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시스를 비롯한 일단의 무리가 이쪽에 도착했다.
“…이상 없습니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제일 먼저 엄중한 시선으로 사방을 훑으며 우리의 안전을 확보했다. 그것에 레이시스가 안도의 한숨을 토해낼 찰나,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이쪽 구역을 경계하고 있던 마법사와 기사들이 사망한 채로 발견됐어요. 목욕탕의 일로 제가 물어보러 가기 바로 직전에 숨이 끊어진 것 같아요.”
그 이야기에 일행은 말없이 술렁인다. 누가 이 저택을 습격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우리는 곤히 잠들어 있던 디아크를 깨워 중앙 응접실에 모였다. 그는 막 잠에서 깨어나 몽롱한 표정을 지었지만, 누군가 이곳에 침입했다는 소리에 눈을 부릅뜨곤 주위를 살폈다.
“마법사분들과 기사단이 바로 근처에서 경계하고 있으니 이곳에 있으면 안전할 거예요. 저는 한 번 더 상황을 파악하고 올게요.”
“아, 나도 같이 가지. 앨리스.”
앨리스가 침입자의 기척을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니 최소 소드 익스퍼트 중상급에 이르는 실력자로 예상된다. 하지만 그녀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올 때까지 버틸 수는 있겠지.
“응, 이쪽은 나한테 맡겨.”
앨리스는 내 부름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 이후 나는 베르너에게 눈짓했고, 그는 내 뒤로 따라붙었다.
“설마 바로 직후부터 일하게 될 줄이야.”
“좋게 생각해. 바로 네 능력을 입증할 기회가 생긴 거니.”
베르너는 내 말에 씩 웃으며 자신에게 맡기라며 가슴을 두드린다. 난 고개를 돌려 레이시스에게 물었다.
“시신을 볼 수 있을까?”
“네, 지금 아버님이랑 마법사분들이 조사하고 계실 거예요.”
우리는 호위와 함께 밖으로 이동했다. 곧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도착했고, 그와 동시에 자욱한 피 냄새가 코끝을 찔러오기 시작했다.
“아, 전…….”
셰필드 백작은 날 부르려 했으나, 곧 옆에 있던 베르너를 보곤 황급히 입을 닫았다.
아카데미에선 공식적으로 황족임을 밝히는 것은 규제되어 있기 때문이지만, 난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상태는?”
“일격에 숨이 끊어졌습니다. 마법사 기사 모두 한 번에 당한 것 같군요.”
‘마법사 한 명에 기사 두 명인가.’
이곳은 저택을 지키는 결계의 한 구획이라 했다. 결계의 구획은 총 일곱 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와 같은 구성으로 일정한 시간마다 순찰을 돌며 관리했다.
“흠…….”
시신의 상태는 참혹했다. 마법사의 가슴은 찢겨 나가 있었고, 기사들의 몸 역시 사정없이 파헤쳐져 있었다.
“짐승이 습격한 것 같군.”
베르너가 중얼거린다. 그것엔 동감이었지만, 시체의 상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난 손을 뻗어 상처 주위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기운을 살폈다.
이건…….
[마기네요.]“…리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