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97)
망나니학 개론-97화(97/300)
#097
“와라, 엑스칼리버.”
나는 가볍게 허공을 움켜쥐며 성검을 소환했다.
“……?”
여느 때라면 바로 그 직후 어둠을 밝히는 상서로운 빛과 함께 묵직한 감촉이 손안에서 느껴져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내 손안은 공허하기만 했다.
“엑스칼리버?”
혹시나 내 부름을 듣지 못했나 싶어 다시 그 이름을 불렀지만, 그것이 무안해질 정도로 주위는 잠잠했다.
“무슨…….”
원래 성검은 그 주인이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는 것으로 소환됐지만, 엑스칼리버는 내가 몇 번이나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모습을 드러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멍하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적은 바로 눈앞에 자리했고, 호시탐탐 내 목을 노려왔으니.
쐐애애액-!
달빛에 늘어진 그림자 속에서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진다. 이미 대비를 하고 있던 나는 가볍게 땅을 박찼고,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그것을 피해냈다.
“쯧.”
녀석은 나에게 놓아버린 검을 잡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공격은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날카로웠고, 쉴 새 없이 날 몰아쳤다.
학술제 전까지의 나였더라면 이 빠른 속도와 은밀함에 적응하지 못해 고전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쉬이이익-!
공기를 베어 가르는 한 줄기 흐름. 날 향한 검 끝에서 느껴지는 예기는 어둠 속에서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한 방 먹긴 했지만, 단지 그뿐이다.
내 특성 중 하나인 초회북 덕분에 피는 멎은 지 오래. 가빠오던 호흡은 다시 평온해졌고, 신체 능력 또한 정상으로 돌아왔다.
휘릭.
이번에야말로 심장을 찌르겠다며 들어온 검을 가볍게 빗겨내었다. 그러곤 녀석의 팔을 붙잡아 순식간에 비틀었다.
“……!”
내 가슴을 꿰뚫었던 검이 바닥을 구른다. 녀석은 반대 방향으로 비틀린 팔을 붙잡으며 황급히 나에게서 멀어졌지만, 이미 승기는 기울었다.
“…생각보다 약하네?”
마족이라 함은 기본적으로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 아무리 앨리스처럼 암살이나 은밀함에 특화된 개체라곤 해도 너무 맥없이 팔이 부러진 것이 아닌가 의아해하고 있던 찰나, 등 뒤에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그렇지. 재미 삼아 데려온 하급 마족일뿐더러 본체도 아니니 말이야.”
늘어진 초목의 그림자에서 솟아나듯 생겨난 존재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피를 머금은 듯 새빨간 머리카락에 짙은 갈색의 피부. 인간 같지 않게 길다간 귀와 그 눈엔 요사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본체가 아니라는 말은 정말이었는지 조금 전까지 나와 싸우던 녀석의 몸이 허공으로 스러진다. 그러곤 곧 같은 모습의 마족이 여성의 뒤편으로 란돌프의 몸을 들쳐 업은 채 나타났다.
“평범한 다크 엘프는 아니겠고.”
외형만 본다면 크리스와 피부색만 다른 다크 엘프라 생각되었지만, 그 전신에서 풍기는 기운은 분명 마기였다. 아마 제물로 받쳐진 다크 엘피의 몸 위로 강림한 고위 마족일 터.
“가벼운 유흥으로 온 곳에 너 같은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그녀는 매혹적인 몸짓과 함께 제 손끝을 핥았다. 그러곤 손가락을 튕기며 속삭이듯 말했다.
“산 채로 잡아 오렴, 아가들아.”
그것과 동시에 내 발밑에 늘어져 있던 그림자에서부터 무수히 많은 팔들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윽?!”
괴담에서나 볼 법한 그 광경에 난 기겁하며 땅을 박찼고, 저 멀리 꽂혀 있던 검의 근처에 다가가 그것을 뽑아 들었다.
“…무슨.”
내 그림자에서 솟구친 것은 한순간 말문이 막힐 정도로 기괴하게 생긴 것이었다.
몸은 짐승형 몬스터 중 하나인 샤벨 타이거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그 위로 사람의 팔로 보이는 것이 빽빽하게 뒤덮고 있었다.
“아름답지? 이곳에 사는 인간들의 팔을 떼어내다 만든 키메라야. 나름 기념할 만한 수작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
키메라.
그 말을 드는 순간 나는 사우스요크셔에서 사람들이 실종되던 원인을 깨달았다.
마족은 따로 식사가 필요하지 않다. 그 원천은 마기이며 인간의 피와 살점은 그저 기호 식품에 불과했다.
하지만 녀석은 단순히 이런 괴이한 모습의 키메라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습격했고, 그들을 재료로 삼았다.
딱히 정의감에서 오는 분노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오물이나 쓰레기같이 더러운 걸 본 것처럼 생리적인 혐오감이 차올랐다.
“…란돌프는 왜 납치한 거지? 녀석도 키메라의 재료로 사용할 셈인가?”
나는 검의 날을 세우며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장이라도 한칼에 녀석을 해치우고 싶었지만, 이쪽은 인질이 잡힌 상황이다. 마음같이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란돌프? 아, 이 아이의 이름인가. 귀엽네.”
그녀는 제 수하가 들고 있던 란돌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곤 진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쉽게도 기껏 강림한 이 육체가 더러운 다크 엘프의 것이라 그런지 나와 상성이 별로 안 맞아서 말이지. 어떻게야 하나 싶던 찰나, 마침 이곳에 괜찮은 제물이 있데? 그래서 납치할 겸 조금 흔들어보았지.”
“제물이라.”
레이시스가 들었으면 경기를 일으킬 소리를 태연하게도 해낸다. 난 성 쪽을 흘깃 바라보았지만, 아직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 내가 누구 도움을 받았나.”
“뭐?”
작게 읊조린 혼잣말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것에 난 한숨을 내쉬며 검을 들었다.
녀석은 그때까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나 같은 것은 잠시간의 유희 거리로 생각하는 듯했지만, 그것이 뒤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우웅-.
나는 지금껏 담아두고 있던 기세를 해방했다. 소드 마스터에 이른 격이 사방을 휩쓸고 내 적들을 압박한다. 그것에 여성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소드 마스터? 이런 곳에?”
“나도 가볍게 놀려고 이곳에 왔는데, 서로 우연이로군.”
고위 마족은 독립적인 개체다. 세력을 일구지 않는 이상 굳이 꼬리를 달고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저 녀석은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제 신체에 적응하지 못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것이겠지. 그렇기에 그림자를 사용하는 하급 마족을 데리고 다니며 수발을 들 게 한 것일 터.
엑스칼리버가 있었더라면 손쉽게 모두 처리할 수 있었겠지만, 없다고 해서 굳이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지금껏 날 아래로 두고 있었나? 뒤에 어떤 녀석이 등장할지 몰라 기운을 숨기고 있더니 기고만장해서 날뛰는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더군.”
“…저 녀석을 막아, 내가 이 몸에 깃들기까지.”
그녀는 제 수하에게 명령을 내린 채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다. 내 기감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것을 보니 그 안은 별개의 공간인 것 일 터.
“그렇다면 저곳을 파헤치려면 네 녀석을 쓰러뜨려야 하는 건가?”
그림자 마족은 당연하게도 내 말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오직 제 주인이 내린 명령을 지키기 위해 살기를 피워 올릴 뿐. 확실히 아까 녀석은 분신이라는 것인지 본체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예사롭지 않다.
여성은 하급 마족이라고 했지만, 적어도 브리튼에서 만났던 녀석들보다 약하지 않다.
크르릉-.
아쉽게도 내 적은 한 명이 아닌 듯싶었다. 여성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자마자 그것을 대체하듯 여러 몬스터를 섞어 놓은 듯한 기괴한 모습의 키메라들이 속속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덤벼라, 떨거지들.”
하지만 난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웃음까지 흘리며 그들을 도발했다.
쐐애애액-!
수십 마리의 키메라가 살의를 가지고 나에게 달려든다. 난 그것에 천천히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우웅-.
작열하는 빛이 내 검 위로 서린다. 에스칼리버 같은 성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상서로운 서기는 아니었지만, 날카롭게 벼려진 오러 블레이드는 나에게 이빨을 세운 키메라의 몸을 산산조각 내는 데 충분했다.
허공은 순식간에 살점과 핏방울로 뒤덮였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쉬이이이익-!
키메라를 제물로 바쳐 내 빈틈을 노린 그림자 마족의 검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날카로움을 가지고 내 심장을 노린다. 난 그것에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턱.
“……!”
오러에 뒤덮인 내 손이 가슴을 찔러오던 검을 어렵지 않게 잡아냈다. 그 마족은 헛바람을 내뱉으며 몸을 비틀었지만, 그보다 먼저 내 검이 휘둘러졌다.
서걱.
녀석의 잘려 나간 사지가 키메라의 살점들과 함께 바닥에 후드득 쏟아진다. 나는 검을 잡았던 손을 툭툭 털고는 바닥에 엎어져 버둥거리던 마족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녀석을 꺼내라.”
“…….”
자신의 목에 검이 겨눠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녀석은 침묵했다.
“흠…….”
그것에 난 침음을 흘렸다. 이때까지 가베인과 아카데미에서 마법을 배우긴 했지만, 아직 기초적인 것들밖에 알지 못한다.
특히 마족의 메커니즘은 인간의 것과 아예 달라 내가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 혹시나 될까 싶어 시스템 어시스트를 호출했지만, 엑스칼리버 때와 같이 잠잠했다.
다행히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쐐애애애액-!
성으로부터 한 줄기 벼락이 이쪽을 향해 날아온다. 곧 자욱한 먼지와 함께 큰 진동을 내며 내 뒤로 떨어져 내린 그것은 기다란 망토를 펄럭이며 나에게 다가왔다.
“제가 늦었습니까?”
셰필드 백작이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묻는다. 그것에 난 고개를 저으며 바닥에 누워 있는 마족을 가리켰다.
“란돌프는 저 녀석이 만들어낸 그림자 결계 안에 있다. 어떻게 열지를 모르겠는데, 죽여볼까?”
“제가 하겠습니다.”
셰필드 백작은 망설임 없는 대답과 함께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수십 개의 마법진이 생겨났고, 그중 한 곳에서 나온 황금빛 쇠사슬이 마족의 몸을 구속했다.
푸슉.
그는 망설임 없이 마족의 가슴을 꿰뚫어 심장을 뽑아냈다. 곧 시커먼 마기가 손을 타고 팔을 뒤덮어갔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캐스팅을 시작했다.
‘스스로 마기를 컨트롤해서 그림자를 열려는 건가.’
어지간한 마법사라도 감히 흉내 내지 못할 광경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 순간에도 마기는 그의 신체를 잠식해 나간다. 그럼에도 셰필드 백작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치밀어오르는 고통을 참고 마법을 완성했다.
우우웅-.
곧 그림자가 열리며 땅 위로 쓰러져 있는 란돌프의 신형이 올라왔다.
펑!
셰필드 백작은 그 즉시 들고 있던 마족의 심장을 쥐어 터트린다. 그러곤 샛노란 불꽃을 피워 올려 마족의 시체를 태웠고, 그 몸을 구속하고 있던 쇠사슬로 자신의 팔을 동여맸다.
“……?”
그는 무리한 것인지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제 아들에게로 걸어간다. 하지만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전하?”
셰필드 백작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그것에 난 주위를 가리키며 굳은 얼굴로 답했다.
“란돌프와 같이 들어갔던 마족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건.”
그는 곧 전방에 마나를 넓게 퍼트려 기척을 살폈다. 하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들짐승밖에 발견하지 못했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 버님?”
메마른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울려 퍼진다. 란돌프의 의식이 돌아오자 셰필드 백작은 황급히 그에게로 달려가려 했지만, 나는 또다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전하!”
셰필드 백작은 다급히 제 아들을 가리켰다. 한 눈에 봐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다. 빨리 데리고 돌아가 치료해야 한다고 나에게 애원했지만, 난 고개를 저으며 녀석을 가리켰다.
“다시 제대로 보도록. 자넨 아직도 저것이 아들로 보이는가?”
“…아.”
셰필드 백작의 두 눈에 푸른 불꽃이 깃든다. 그제야 겨우 이변을 깨달은 것인지 그는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소름 끼치는 웃음이 란돌프의 입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씩 웃었다.
“성가신 녀석이 두 명이라 한 놈부터 먼저 제거하려고 했는데 눈치가 빠르네. 괜히 말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