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 It Bad That the Main Character’s a Roleplayer? RAW novel - Chapter (392)
392화 순금처럼 깨끗한 (5)
“조금, 당혹스럽군요.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짓을─”
[발뺌이야? 진심으로 그러는 거라면 실망인데.]아크메이지가 일어나건 말건 하얀 까마귀는 침착하게 대처했다. 지금껏 잘도 은폐해 온 진실이 갑작스레 탄로 난 만큼 당혹감이 들 만도 하건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로 모른 체한 것이다.
“오래된 분이시여, 부디 오해를 거둬 주십시오. 저는 진실로 그러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 모습이 어찌나 천연덕스러운지, 계명에게 들은 것만 없었다면 ‘어? 내가 오해했나?’ 싶을 수준이었다. 그만큼 하얀 까마귀의 얼굴은 차분했고, 명징했다.
도저히 오랜 비밀을 들킨 사람의 것 같지가 않다.
[오해라…….]하나 주작은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고, 그걸 철회할 의지가 없었다.
바짝 엎드린 채 결백을 주장하던 하얀 까마귀가 한참 만에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까지 내보이던 존중과 굴복의 이미지는 그 숨 한 번에 허공으로 달아나 버리고 만다.
“깨진 가면을 쓰고 있을 때부터 예감은 했습니다만, 들킨 겁니까?”
그는 주작의 허락이 없었음에도 당당하게 몸을 일으켰다. 탁, 탁. 구부러진 그의 손은 흰 드레스에 묻었을지도 모르는 먼지를 털어 낸다.
곧 길쭉하고 흰 몸이 원색의 방에 우뚝 섰다. 모르쇠의 끝이었다.
“뭐, 그래요. 당신이나 나나 발각의 가능성을 모르고 시도한 일도 아니니.”
그는 특유의 저음으로 능청스럽게 말을 지껄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손톱을 매단 손가락이 벌어지며 묘하게 구부러진 궤적을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한데 그렇다고 저를 팔아먹을 줄은 몰랐는데요.”
“불쾌한 말이로다. 그대의 정보 따위로 내가 생존을 도모했을 것 같은가?”
“생존을 위해 자존심을 팔지는 않아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가판대에 올릴 수는 있는 사람이잖아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 궤도에 시선을 주는 대신 하얀 까마귀 자체에 주목했다. 내뱉은 모든 말이 그의 죄를 시인하는 것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아크메이지가 침음을 흘리며 주먹을 그러쥐고, 질답을 오가게 하던 계명이 티스푼을 찻잔 위에 거꾸로 내려 두었다.
“아니면 제가 오만과 거래한 건 어찌 말했나요? 당신이 말하지 않았다면 그것까진 안 들켰을 텐데.”
“그대의 말마따나, 내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자존심도 가판대에 올릴 수 있는 존재기 때문이겠지.”
계명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짓씹듯 하얀 까마귀의 말을 비꼬았다.
“…그래요.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죠.”
하얀 까마귀도 그것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애석함을 가장한 미소와 함께 팔을 모았다. 한쪽 손은 팔짱을 끼고 한쪽 손으로는 턱과 뺨을 받치는 자세였다.
“그래서, 이제 어찌하실 예정인지?”
[…진실임을 자백했으니, 마땅한 처벌을 내려야겠지.]“후후, 처벌이라.”
범죄자인데 뭐 이리 여유 넘치냐. 혹시 일이 이렇게 될 때를 대비해 준비해 둔 수 같은 게 있나?
나는 만일을 대비하여 감각을 예리하게 다졌다. 방심하다가 내부의 배신자를 놓치는 클리셰 따위 반복하기 싫은 까닭이었다.
“오래된 분이시여, 제가 지금 연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관심 없어. 배신자의 것 따위.]“마기를 여과하거나 마력으로 뒤바꾸는 것입니다.”
다만,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장내의 모든 이들이 침묵하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그 주작마저도 일시적으로 제 몸의 불꽃을 멈출 정도였다.
화륵. 당혹감에서 벗어난 불길이 본래의 형태로 타올랐다.
“정확힌 그 기술을 신체에 적용하는 연구지요.”
[…그래서, 살려 달라 이거야? 내가 왜 그래야 하지?]“그럼, 버리실 건가요?”
아니, 그런 기술이 있었단 말이야? 그런 연구를 하필이면 하얀 까마귀가 진행 중인 거고? 이 무슨……!
“위험을 회피하려고 사기 까는 건 아닙니까요?”
“…아니, 사기는 아니야. 내가 알기로, 대현자 여럿이 붙어 계속 진행 중이라 알고 있으니까.”
“마기를 여과하다니,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신성력도 여과했는데 마기는 못 할 게 뭐 있어?”
내가 심각한 얼굴을 하는 사이, 데스브링거와 다니엘이 차례로 마이스터와 문답을 나누었다. 신성력 여과기. 내 시선이 옷깃에 붙어 있던 장식으로 향했다.
“영감탱이가 빠지면서 진척이 좀 늦어졌겠지만, 지금쯤이면 시제품도 나왔을 거야. 효능과 단가를 맞추느라 양산이 안 되고 있을 뿐이지.”
“양산은 또 뭔 말입니까요……?”
“제작 난이도가 좀 더럽거든. 마법을 걸 사물의 크기가 휴대용 수준으로 작아지면 그땐 대현자 중에서도 몇 명밖에 제작이 안 될 정도로.”
“그, 그렇습니까요.”
“물론 이것도 개량을 하다 보면 나아질 텐데… 막 개발한 기술을 개량하는 게 어디 쉽느냔 말이지.”
“…면적이 문제라면 좀 더 커다란 곳에 새기는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맞아. 방이나 가구에 거는 건 수석 마법사 정도로도 충분해. 뭐… 본인을 직접 보호하는 게 아니라서 외출 땐 무용지물이 되겠지만, 그것이라도 감지덕지라 생각할 놈들도 있을 테니까.”
그의 시큰둥한 어조와 달리 내용은 그저 파격적이기만 하다. 나는 내가 가진 여과기의 개수와 그것들의 크기를 떠올렸다.
“단, 이것도 아이템 제작에 능숙한 수석 마법사쯤 돼야 가능한 거야. 그러니까, 베뮈르헨이나 저어기 휴델렌 출신쯤 돼야 가능하단 거지.”
…이거, 엄청 귀한 거였구나?
“근데 현재 베뮈르헨 꼴을 떠올려 봐. 걔네가 다른 도시에 마법사들을 파견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속으로 땀을 뻘뻘 흘리는 동안, 마이스터가 시들한 얼굴로 본인이 살던 도시를 까 내렸다. 틀린 말은 아니란 점에서 더욱 맞장구치기 힘든 대사였다.
“파견 보내더라도 오가는 시간이 문제지. 가까운 도시조차 오가려면 한두 달은 잡아야 하는 세상이니까. 결국 상용화 되려면 멀었어.”
“그렇군요…….”
“아, 그러고 보니 이걸 돈벌이 삼으면 복구는 금방이겠네. 초빙해서 방에 새기든, 염강탱이가 손수 새겨서 만든 휴대용 여과기를 사든… 엄청 비싼 값을 받아도 될 테니까.”
“독과점의 위험이군…….”
엄밀히 따지자면 휴델렌도 가능하다 하니 완전한 독과점은 아니겠지만… 역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극단적인 가치값을 가져온다. 나는 때아닌 경제문제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보다, 이거 이렇게 귀한 거였나?”
“그럼 아닌 줄 알았냐?”
“…고맙군.”
아크메이지님, 대체 제게 뭘 만들어 주신 겁니까… 아니, 의뢰자는 마이스터였으니 마이스터가 만들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엄청 비싸고 공들여 만든 건 분명하다. 나는 두 사람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안 그래도 똑바르던 자세를 더욱 번듯하게 세웠다. 가치 환산도 안 될 제품들이 내 옷에 둘둘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까 자동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내 몸이 1억짜리 차에 얻어 탈 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저, 대명장님.”
“왜요.”
“대현자 여럿이 공동으로 연구 중이라면, 저자는 없어도 되는 것 아닙니까?”
그사이, 하얀 까마귀를 노려보고 있던 인퀴지터가 한마디 했다. 아래로 살짝 굽어진 고개와 다르게 삼백안처럼 치뜨인 눈은 비소 염료의 녹색을 한가득 품고 있다. 금방이라도 하얀 까마귀의 모가지를 분지를 것 같았단 소리다.
“…글쎄요. 그게 그렇게 가볍게 정리될 이야기는 아니라서.”
하나 그녀의 표정을 보고도 마이스터는 얼굴에 열정을 띠지 않았다. 하얀 까마귀가 들어온 이래, 그를 정면으로 본 적 없는 고개가 책상 위로 엎어지듯 누웠다.
“이 기술을 아이템에 적용하는 건 저 인간 없이도 가능하지만, 신체에 적용하는 건 별개거든요.”
“…그가 없으면 불가능하단 이야깁니까?”
“저도 모르죠? 그렇지만 생명 마법의 최고 권위자가 사라졌을 때 해당 연구가 원활히 진행될 수 있을지는… 대충 답이 보이지 않을까요.”
하얀 까마귀를 비호하는 듯 하지만, 비호하는 것은 아니다. 진동하는 목소리가 불쾌함과 탐탁지 않은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 준 덕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비호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비호다. 사실만을 담았기에 더욱 그랬다.
까드득.
인퀴지터가 쥐고 있던 수저를 세게 움켜쥐었다. 은으로 이뤄진 그것이 끼익 소리를 내며 휘어졌다.
[상관없어. 네가 없어도 그건 언젠가 개발이 될 테니까.]다만 인퀴지터처럼 마이스터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주작이 선언했다. 북부 전선에 임하는 인간들을 아끼는 만큼 조금이나마 고민할 거라 여겼는데, 생각보다 더 강경한 태도였다.
[바깥에 대기하고 있는 너.]“예.”
그렇지만 이게 맞는지도 모른다. 자의로 오만과 거래한 전적이 있다는 건 언제 또 오만과 거래할지 모른단 거니까.
강제로 이용당한 계명과는 다른 케이스였다.
[손을 묶고, 탑에 마련된 감옥에 넣어 놔. 얼마만큼의 정보를 유출했는지 알아내야 하니까 고문관도 준비하고.]물론 계명도 여즉 의혹의 여지가 있긴 하다. 그녀가 잠자코 우리와 식사하는 것도, 우리가 묻는 말에 전부 대답해 주는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녀는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면 안 되며,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행동을 하면 바로 감옥 형이다. 이용당한 그녀의 입장에선 불합리한 일이었으나 그녀가 입힌 피해가 피해라 어쩔 수 없었다. 여기가 뮌문트였으면 그녀는 이용이고 뭐고 목이 잘렸을 거다.
“…알겠습니다.”
[미리 말하지만, 탈출하면 죽여도 좋아.]각설하고 주작의 명령을 받은 이가 밧줄을 쥔 채 하얀 까마귀에게 다가갔다. 손을 묶고 몸을 휘감아 포박할 모양새였다.
“아쉽네요. 지혜 겨루기의 끝을 보고 싶었는데.”
또한 하얀 까마귀는 그것에 저항하지 않았다. 다행인 일인지는 과연 알 수 없었다. 내통자의 발악 없는 무저항은, 너무도 여유로워서 어딘가 불길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므로.
“다만 주작이시여…….”
하나 내가 불안해하기도 전, 묶인 채로 끌려 나가던 이가 고개를 살풋 돌렸다.
“당신께선 다시 생각하게 될 겁니다.”
주작을 보는 건가, 아니면 우리를 보는 건가. 나는 긴가민가한 시선의 방향을 좇다가, 그대로 행동을 정지했다.
“앞으로 있을 전투는 선악을 따지는 것조차 불가능할 테니.”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 * *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이렇게 되었군.”
하얀 까마귀가 끌려간 후, 아크메이지는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해후의 기쁨을 즐겼어야 할 재회가 이리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의 손이 얼굴을 마구 쓸었다.
“괜찮으십니까?”
“그, 물이라도 드실랍니까?”
그렇게 친해 보이진 않았는데, 그래도 같은 대현자로서의 동지애 같은 건 있었던 걸까.
나는 심란해하는 아크메이지를 보며 조용히 차를 넘겨주었다. 향이 많이 날아가긴 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예부터 차는 심신의 안정에 많은 도움을 주는 편이었으니 말이다.
“고맙네.”
식은 차라도 목구멍 뒤로 넘긴 이가 온몸에서 힘을 뺐다. 근육이 이완되며 털이 축 늘어져서 그런가, 그녀가 순식간에 반쪽으로 줄어든 기분이었다.
“…본래라면 북쪽의 일이 어땠는지 묻고 싶었네만, 아무래도 이게 먼저가 되어야 할 것 같군. 일이 어째서 이렇게 된 건가?”
그래도 그녀는 물음을 멈추지 않았다. 상황의 버거움보다 당장의 궁금증이 더 큰 모양이었다.
뭐어, 사이가 안 좋더라도 같은 계급의 마법사가 갑자기 잡혀 가면 사유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게…….”
내가 손길에 불을 붙인 채로 컵의 물을 데우는 사이, 데스브링거와 다니엘이 조잘조잘 모든 사실을 불었다. 그 과정에서 아크메이지가 계명을 몇 번, 나를 몇 번, 마이스터와 베르세르크를 몇 번 보았다.
“그렇게 된 거였군…….”
저기, 이야기를 듣기만 했을 뿐이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아까보다 더 세월이 흐른 얼굴을 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좀 빡센 일을 당하긴 했는데, 솔직히 지금까지 있던 일과 비비면 위험성 자체는 그냥 도토리 키 재기 아니야?
“…일단, 다들 정말 잘 살아 돌아왔네. 고생이 많았어.”
…아,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