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 It Bad That the Main Character’s a Roleplayer? RAW novel - Chapter (395)
395화 한 사람이 (1)
출발하는 날 새벽, 나는 잠시 탑 앞마당으로 나갔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동이 트자마자 눈이 떠졌고 특별히 할 일이 없었을 뿐이었다.
[일찍 일어났네.]잠을 자지 않는 주작은 탑의 꼭대기에서 자신의 불꽃을 고르고 다듬는 중이다. 나는 그에게 가벼운 묵례를 건넨 후 동이 트는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일찍 일어났군.”
한데 조금 그러고 있으니 아크메이지가 탑을 나왔다. 그녀는 잠을 아예 못 잔 것인지 표정이 영 좋지가 않다.
“아크메이지님.”
하긴 어제 들은 소식이 영 파격적이었어야지. 나는 그녀의 심정을 헤아리며 고개를 끄덕이듯 인사했다. 아크메이지가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뭐어… 나쁘지는 않았네.”
“그렇습니까.”
표정이 낡고 지친 사람의 것이긴 하나, 전보다 윤기가 도는 털을 보면 확실히 못 지낸 것 같진 않다. 최소한 식사와 잠을 제때제때 챙겼다는 의미겠지.
“자네들이 겪은 일을 듣기 전까지는 자리를 비운 만큼의 값어치를 해냈노라 생각하기도 했고.”
“그럼 다행입니다.”
거기에 무언가를 얻기도 했다니 그 또한 축하할 일이다. 아크메이지가 거둔 게 없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이 파티에 없지만, 성취가 없는 것보단 있는 게 훨 나은 법이니까.
“…그러고 보니 다들 별명을 공유했다지?”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아, 그거 들었나 보네.
나는 뒷목을 주무르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크메이지님께 알리기 싫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아니, 사과는 하지 않아도 괜찮네. 어떤 심정일지 이해하니까. 함부로 다룰 사안도 아니고.”
다행히 아크메이지님의 마음은 드넓었다. 그녀는 손을 휘저어 내 입장을 간단히 배려해 주었다.
“이 나이 먹고 별명을 말하긴 낯부끄러우니, 나는 이명으로 대신하겠네. 지혜로운 금풍일세. 이미 들었겠지만.”
“…욥입니다, 금풍 님.”
“금풍이라고 부르게, 욥.”
“네.”
동시에 우리는 정식으로 서로의 별칭을 교환했다. 하얀 까마귀가 부르는 걸 들었어서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역시 본인이 소개해 준 게 더 나았다.
나와 그녀의 손이 서로의 것을 맞잡고 한 번 흔들었다.
“…한데, 욥. 내 자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은 것이 있네.”
“……? 금풍께서 제게 말입니까?”
그런데 두 손이 떨어진 그 순간, 아크메이지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그건 마치 노인의 오래된 후회를 고스란히 퍼내어 덧그린 것만 같다.
“자네라면 아마 사과할 필요 없다고 할 것 같지만─”
“잠시.”
다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내 손이 올라가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누가 오는군요.”
“아…….”
물론 나도 그녀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긴 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사적이고 민감해 보이는 소재를 남 들을 수 있는 곳에서 말하게 하긴 그렇다.
내 행위에 아크메이지가 흐리게 웃었다.
“다음에 이야기하세.”
“언제든지, 편할 때 불러 주시죠.”
뭐어, 이따 주작 등에 타면 다음 도시에 도착할 때까지는 개인 시간이 안 주어지겠지만.
나는 그녀가 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구하며 다가오는 기척을 살폈다.
“흐아아암… 에? 벌써 나와 계셨습니까요?”
씻지 않아서 머리가 떡진 데스브링거였다.
나와 아크메이지의 시선이 잠깐 서로를 보았다가, 데스브링거를 다시 보며 피식 웃었다.
“뭡니까요? 뭔데요? 뭐 있었어요?”
영문을 모르는 데스브링거만이 당황한 채 귀만 쫑긋 세웠다.
“이 마법사까지 데려가는 겁니까요?”
그리고 한 시간 뒤. 출발할 시간이 되며 사람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그 과정에서 하얀 까마귀가 새장에 갇힌 채로 끌려나온 건 덤이었다.
[이곳은 그의 본진이나 다름없는 도시니까.]“확실히, 저희도 모르는 비장의 수가 있어서 그걸로 탈출이라도 하면 곤란하겠지요.”
[응. 그래서 차라리 전선까지 데려가려고. 내가 어느 도시에 갈지도 모르는 상황인 만큼 거기까진 차마 대비 못 할 거 아냐.]“탁월한 판단이십니다.”
주작은 하얀 까마귀가 끌려온 이유를 설명하며, 그가 든 새장을 한쪽 발로 잡아 올렸다. “윽.” 새장에 갇힌 걸로도 모자라 족쇄와 사슬로 꽁꽁 묶인 이는 방한에 대한 대비가 조금도 되어 있지 않은 채다.
동정하는 건 아닌데, 저거 가다 얼어 죽는 거 아닌가 싶다.
“담요 하나 정도는 둘러 줘야 할 것 같은데.”
제대로 된 처벌도 없이 죽는 건 둘째 치더라도, 나름 아크메이지님의 동료였던 사람이다. 저러다 죽으면 아크메이지님이 상심하는 것 아닐까 걱정이다.
“그대는…….”
“……?”
“인간 말종까지 신경 써 주시는 겁니까. 역시 경은…….”
“…뭔가 오해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만, 가다 죽을 것 같아서 꺼낸 말이었다.”
마법 연구니 뭐니 때문에 죽으면 곤란해질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또, 처벌도 목숨이 붙어 있어야 받을 수 있는 거잖아. 아니면 다들 가다 죽어도 괜찮다는 마인드인 거야?
“죽으면 뭐 어떻습니까요.”
“아니, 죽는 건 좀 곤란해. 담요는 확실히 갖다주는 게 좋겠네. 신성력으로 목숨 붙여 주는 것도 아깝잖아.”
다행히 마이스터가 내 의견에 동의해 주었다. 괜히 말을 꺼낸 건 아니게 된 셈이다.
“별개로… 그대들은 나를 너무 대인배처럼 여기는 듯하군.”
그보다 다들 묘-하게 나를 관대한 사람처럼 보는 것 같단 말이지. 모든 죄를 사해 줄 정도로 성격 좋은 편은 아닌데, 나.
“나리가 대인배가 아니면 누가 대인배입니까?”
“전 경처럼… 자비로운 분을 평생 본 적 없습니다만.”
“호구 새끼가 뭐라는 거야.”
아니, 그러니까 그거 오해라니까? 애초에 인간의 도리를 지키는 거랑 진심으로 관용을 베푸는 게 어떻게 같아? 두 명제의 결과가 같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두 개가 정말 같은 문장이 되는 건 아니잖아.
공무원이 공무에 따라 사회적 약자를 돕는다고 해서 그의 도덕성이 꼭 증명되는 건 아닌 것처럼.
“…항변해도 무의미하겠군.”
뭐, 됐다. 아니라고 부인해 봐야 겸손한 척이니 뭐니 하며 씨알도 안 먹힐 것 같고… 꼭 풀어야 할 곡해인 것도 아니니 괜찮겠지.
[…저놈은 봐주면서, 왜 나는.]나는 귀에서 윙윙거리는 파리의 날갯짓을 외면했다.
“주작의 등에 타다니… 황송한 일이군.”
“올라올 수 있으시겠습니까요?”
“위에서 손만 뻗어 주게.”
“도와드리겠습니다.”
그사이 아크메이지가 주작의 등에 올랐다. 데스브링거가 위에서 잡아 주고 다니엘이 아래서 받쳐 주자 그녀도 거대한 불새의 등에 오를 수 있었다.
“…….”
주작의 등에 안착한 그녀의 시선이 잠깐 새장을 향했다 떨어졌다.
“베르세르크.”
“던져라.”
각설하고, 나도 그녀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전처럼 내가 갈고리를 던지고 베르세르크가 잡아 주는 식이었다.
“…바구니가 좀 커졌군?”
근데 내가 탑승할 자리가 묘하게 넉넉해지지 않았어?
“아, 답답하실 것 같아 더 큰 것으로 구해 왔습니다!”
인퀴지터가 우렁차게 바구니의 출처를 밝혔다. 나름 고마운 배려였다. 작아서 불편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고맙다.”
나는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바구니에 안착한 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가면서 할 짓도 없겠다, 이른 아침부터 출발하느라 피곤도 하겠다. 눈이나 붙이고 있을 요량이었다.
“안녕히 가세요!!”
“잘 가라!!”
그리고 주작이 모두를 태운 채 비상을 준비하던 그때, 노르다인 삼인방이 지상에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마 더는 만날 일 없을, 그러나 한동안 퍽 정들었던 이들의 배웅에 내 한쪽 눈이 뜨였다.
“잘 지내십쇼!”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아저씨들 안녀엉!!”
저렇게 소리 내어 인사하는 것까진 무리여도, 손 흔들어 주는 건… 아, 각도 때문에 안 보이겠구나. 나는 작별 인사로 무엇을 할 수 있나 고민하다가, 인벤토리를 툭 건드렸다.
휘익!
“어, 어엇.”
탁!
좋아, 잘 받았군.
나는 당황하는 세 명의 기척을 느끼며 바구니에 편히 몸을 기댔다. 인퀴지터와 데스브링거가 뒤로 넘어가지 않게 고정해 준 상태라 얼마든지 그래도 됐다. 내 눈이 다시 감겼다.
“기사님도 잘 가십쇼!!”
“강자야! 잘 가라!!”
“사탕 잘 먹을게요!!”
펄럭, 주작의 날갯짓 소리 사이로 세 사람의 외침이 어렴풋이 전해졌다.
* * *
아, 자려고 했는데 왜 여기지.
나는 사과나무와 녹음으로 가득 찬 세계를 보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딱히 여기 올 의향은 없었는데.
[그레트헨, 듣고 있는 거 알아.]그래도 이왕 온 김에 여기서 쉬어도 괜찮을 것 같다. 특별한 조정을 거치지만 않으면 여기나 바깥이나 시간은 비슷하게 흐르는데, 편하기는 바깥보다 여기가 더 나으니까.
「그레첸…….」
[그레트헨!]비록 각각의 이유로 꼴 보기 싫은 놈 두 명이 있긴 해도.
“넌 왜 나와 있어.”
「그게…….」
분노를 가둬 둔 감옥 앞에 서 있던 소년이 소심해 보이는 형상으로 말을 우물쭈물거렸다. 물론 정말 소심해서 저러는 건 아닐 터였다. 그 증거로 소년의 손에는 냄비와 철 막대가 들려 있다.
“그건 또 뭐고.”
「그게… 저 개자식이 그레첸을 계속 귀찮게 하니까, 역지사지 좀 해 보라고…….」
아, 그래. 근데 그 역지사지란 게 혹시……?
“…소음 공해에 소음 공해로 대처한 거야?”
「…네. 결국 효과는 없었지만.」
말이 냄비와 철 막대지, 나는 소리는 실질적으로 꽹과리랑 비슷할 거 아냐.
신박한 방법을 참 잘도 고안해 냈달지, 아니면 지구 출신도 아닌데 어떻게 비슷한 방식을 찾아낸 건가 싶달지. 보복 심리란 건 차원이 달라져도 어째 똑같기만 한가 싶다.
「죄송해요. 못 막아서…….」
“그건 네 탓 아니니까 사과할 필요 없어.”
분노의 아가리질을 두고, 파우스트가 막아 낼 걸 기대한 적은 없다.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고.
“웬만하면 저놈 상대하지 말고.”
[그레트헨! 날 봐 달라고 하고 있잖아!]“내가 무시하는 것처럼, 너도 무시하란 거야.”
[그레트헨!!]자고로 보이스피싱범과 사이비, 사기꾼과는 말도 섞지 않는 거랬다. 자신의 지능을 뽐내며 나는 당하지 않을 거다 자신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관심조차 주지 않는 게 제일 좋다는 의미다.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물론 저런 지랄을 들으면 무시하기 좀 어렵긴 하겠지.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해.”
[이렇게 갇혀서 아무것도 못 한 채 썩어 가야만 하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고!]“알았어?
「네…….」
뭐, 이런 성깔이니까 지금껏 버텨 왔다는 건 알겠지만 솔직히 이런 성격 때문에 휘둘린다는 느낌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것을 상기하며 소년에게 충고를 주었다. 파우스트가 이것을 따를지는 글쎄, 거기까진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닌 듯했다.
「저 그레트헨, 며칠 전에 말씀하셨던 그것은…….」
“그때 말한 게 다야.”
「그런가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 주는 것도 가능은 하겠지만, 파우스트가 듣는 건 분노도 듣는다. 그리고 저놈의 머리는 정말 쓸데없이 비상하지.
혹시 모를 수작을 대비해, 녀석에게 괜한 정보를 넘겨주고 싶진 않다. 어차피 사탄을 잡지 못하면 의미 없는 거래기도 하고.
“넌 그냥 지금처럼 날 돕기만 하면 돼.”
「…네.」
나는 그런 사고하에 말을 아꼈다. 5천. 게스타스가 알려 준 희생자의 숫자가 잠시 동안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예 몰랐던 것도 아니니 만큼 새삼스럽게 놀랄 일은 없지만, 소년과 나의 거리감을 다시 벌리기엔 충분한 숫자였다.
“난 그럼 조금만 잘게. 너도 쟤한텐 관심 끄고 너 하고 싶은 거 해.”
「네.」
작물을 키우든, 훈련을 하든, 무언가를 만들든. 취미거리로 할 만한 건 대충 사과나무 집에 다 넣어 두었다. 그러니 ‘뭘 해야 하나’라고 되묻거나 하진 않으리라.
나는 부디 그러길 바라며 내 몫으로 만든 건물에 들어갔다. 만들 당시엔 진짜 쓰게 될 줄 몰랐지만, 역시 대비해서 나쁠 게 없다.
나는 사과나무 집 바깥, 현대식으로 지어 둔 집으로 들어갔다.
비싼 월세나 전세가 있는 것도 아니겠다, 마음대로 꾸밀 수 있겠다. 평상시 꿈꾸던 그대로를 재현해 낸 집이었다.
해가 잘 드는 화이트 톤 거실, 키에 맞는 책상, 작업에 쓰이는 도구들…….
“…이제 곧이야.”
가장 잘 그려진 것만 뽑아 걸어 둔 그림 액자.
나는 네 명의 친구들을 가만 살펴보다가 소파 겸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진짜 자야지.”
바깥도 별 이상 없는 듯하겠다, 이제 정말 잘 시간이다.
[제발, 나랑 대화 좀 해!]나는 구질구질한 외침을 뒤로한 채 진짜로 눈을 감았다.
[…좋아. 그대가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바깥이 많이 시끄러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요 며칠, 저 치덕거림을 흘려듣고 자는 요령이 생겨 버린 후였다.
[이것만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정신이 좀 더 아래로, 아래로 침잠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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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먹히기 전에 간발의 차로 찾아내다니, 나도 운이 참 좋은 사람이오. 그렇지 않소?]그리고 의식의 가장 밑바닥에서, 나는 눈을 떴다.
[소개하겠소. 나는 메피스토펠레스. 타락한 궁정의 어릿광대요.]아니… 눈을 뜬 건 정말 나였을까?
[군단장의 눈에 든 걸 환영하오, 인간.]지옥에 떨어진 인간이 주먹을 그러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