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 It Bad That the Main Character’s a Roleplayer? RAW novel - Chapter (477)
477화 그리고 복될 것이니 (6)
[아이고, 고생 많았다 얘들아.]주작은 출발하기에 앞서 부패염에 당한 이들을 챙겼다. 지금까지는 하와를 견제하는 데 급급해서 돌봐 주지 못했지만, 하와가 사라진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정화의 힘을 담은 불꽃은 주인이 사라진 부패염을 물리치기에 충분했다.
“…결계를 풀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속죄하는 요정도 결계에서 꺼내졌다.
반투명한 결계 속 잠든 것처럼 누워 있던 이가 번뜩 눈을 떴다.
“아아아악!!”
산산히 부서지는 결계 사이로 가장 먼저 터져 나온 건 끔찍한 비명 소리였다.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박박 긁어 낸 듯한 처절한 외마디 외침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공연히 몸을 떨었다.
“제압해!”
하나 사제들은 달랐다. 다니엘과 맥시가 가장 솔선수범하여 요정의 팔다리를 붙잡았다. 그 뒤로 이어지는 건 열로 들뜬 상황임에도 신성력 쓰기를 멈추지 않는 사제의 기도다.
“주작님.”
[어, 어 그래.]주작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내려 요정의 몸에 얹었다. 사정을 모른 채 본다면 머리로 사람을 깔아 버리는 모양새였다.
화륵, 화르륵.
그러나 실제는 달랐다. 주작이 요정의 몸과 닿은 순간, 그의 불꽃이 요정의 몸 안쪽으로 흘러 들어가며 부패염을 전부 지워 냈다. 산패하던 내장이 도로 재생되지는 않을지언정 더 이상 산 채로 썩어 가는 일은 없어진 것이다.
“흐, 흐으으.”
그제서야 요정의 비명 소리가 줄어들었다.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졌던 미간도 선뜻 풀렸으며 지독하게 헐떡거리던 숨결 또한 조금이나마 진정되었다. 얕게 흐느끼는 듯한 울음이 공기 중으로 은은히 퍼졌다.
“요정…….”
[삿된 기운은 정화했지만, 몸이 너무 상했어. 제대로 조치하지 않으면 죽을 거야.]“…어쩔 수 없지요. 다시 시간 속에 가두는 수밖에는.”
“결계를 치면 못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당신에게 촉매용 천을 만들어 달라 부탁한 거잖습니까.”
“아.”
질문을 하는 순간에도 꼬물꼬물 바느질을 하던 티마뉴크가 깨달음의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그는 자신이 지금껏 만들고 있던 게 요정을 위한 이동용 결계 촉매임을 몰랐던 모양이었다.
자못 우스운 상황에 주변 사람들이 가볍게나마 웃음을 뱉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나 주변 분위기가 살짝이나마 환기되었다.
“잠깐. 요정이 말하는 것 같군.”
그사이, 아크메이지는 주름과 검버섯이 생기기 시작한 요정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곱디곱던 얼굴이 순식간에 나이 먹은 것도 서러울진대, 여기에 눈물과 콧물, 침 따위가 잔뜩 묻어 있기까지 하니 더욱 비통했다.
‘…포션을 하나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진통제나 각성제류는 두어 개 챙겼지만, 목숨을 구하는 데 쓰일 만한 포션류는 죄다 돌입조에게 넘겨줬다. 그들이 가장 위험한 장소에서 싸울 것이니만큼 마땅한 판단이었고, 그 누구의 불만도 제기돼선 안 되는 선택이었다.
‘포션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하나, 지금 이 순간 아크메이지는 그때의 판단이 조금이나마 후회되었다. 참으로 야속한 일이었다.
아크메이지의 눈이 서글픔을 품은 채 요정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선, 배.”
“듣고 있네.”
“이제… 등신, 같은… 애새끼들… 안, 꼬이겠죠…….”
다만 아크메이지의 후배는 그녀의 생각보다 더 굳세고 강건한 사람이었으니.
아픔으로 어지러운 표정 속에서도 작게나마 분명한 미소가 덧그려졌다. 아크메이지가 차마 울지도 못하게 만드는, 그녀가 동정해서도 안 되는 강인함이었다.
결국 똑같이 웃어 준 아크메이지가 자신의 눈가에 맺힌 낙루를 닦아 냈다.
“농담 말게. 자네가 이리도 빛나는데, 나이 좀 먹었다고 안 꼬이겠나?”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또 한 번 찡그리듯 웃은 후배가 숨을 과하게 헐떡였다. 부패의 중단으로 덜어졌던 고통이, 이젠 내장의 빈자리로 차고 올라왔기 때문일 것이다. 요정의 눈이 조금씩 혼탁해지기 시작했다.
“이젠 결계를 쳐야 합니다.”
“그래.”
“아, 저도 완성했습니다.”
마침 이동에 쓰이는 촉매용 천도 완성되었다. 아크메이지는 서둘러 요정의 팔다리를 붙잡고 있는 두 사람에게 눈짓했다.
“들어 주게.”
이동형 결계를 만들기 위해선 대상을 무언가로 가두고, 가둔 무언가에 결계를 작성하는 것이 가장 편하다. 대상 자체에 걸려 있는 것이니 이동할 때마다 일일이 좌표 수정을 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서둘러 티마뉴크가 짜 낸 천으로 요정을 휘감았다. 이것이 마치 시신을 보관하려는 것만 같아 아크메이지는 내심 찜찜해졌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게.”
“네…….”
이제는 기운이 거의 없어진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천에 덮이고, 그들은 요정이 질식사하기 전에 서둘러 마법을 걸었다. 요정의 빈자리는 아크메이지가 대신 도맡을 수 있었기에 결계 작성에는 큰 문제는 없었다.
“죽겠군…….”
“명상하세요, 명상.”
뭐어, 가까스로 마력탈진 상태에서 벗어났던 아크메이지의 몸이 재차 마력탈진 상태에 빠지는 것만큼은 어떻게 막지 못했지만.
[다 끝났냐? 그럼 빨리 태우고 가자. 다른 애들도 지금 거의 다 탔으니까.]“예.”
[근데 지휘관급 애들은 또 왜 이렇게 없어. 걔네들 언제 다 죽었니?]“아, 그것은…….”
보라뱀이 주작에게만 들릴 크기로 그와 성주가 해 둔 밀약을 애기했다. 그러자 주작의 목소리가 사뭇 가라앉았다.
[그래서, 미리 대피시켰다고.]아무래도 그에겐 이 밀약이 불쾌한 부류에 속하는 모양이었다. 서늘한 주작의 말투에 보라뱀이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아니, 됐다. 지금은 잘잘못 따질 때가 아니니. 챙길 애들이 줄어들었다면 더 편하기도 하고.]하나 참으로 다행이게도, 주작은 당장 보라뱀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작금의 상황 타파에 주력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하와를 퇴치한 지금도 병사들은 여전히 절망에 잠긴 상태였다.
참고로 이것의 원인은 꾸준히, 압도적인 광경으로 다가오는 마왕성 때문이었으니. 이나마도 하와의 죽음과 주작의 대안 제시로 나아진 형편이었다. 겨우 생긴 희망으로 그나마 사기가 오른 게 이 꼴이란 것이다.
즉, 여기서 이미 대피한 존재들을 공표했다간 겨우 괜찮아진 분위기가 다시 진창에 처박힌다.
그 암묵적인 동의 속에서 주작과 대마법사들이 묵묵히 마지막 대피를 준비했다.
[다 탔니?]“예!”
[좋아. 가자.]주작의 몸이 사람들을 태운 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한데 주작이시여, 1차 확장 지구는 어찌할 것입니까?”
[모르겠다 나도. 걔네까지 태우긴 좀 빠듯할 것 같은데.]2차 확장 지구의 사람들을 등에 태울 수 있던 것은 그들의 수가 적어진 탓도 있지만, 그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는 것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상황이 급하다곤 하나, 고작 1~2분 투자하는 것으로 기십을 살릴 수 있다 보니 망설일 이유가 딱히 없던 것이다.
하지만 1차 확장 지구는 어떨까. 그곳의 생존자는 이보다 더 많을진대, 그들이 과연 주작의 등에 다 탈 수 있을까? 만일 탈 수 있다 해도 그들을 다 태울 때까지 걸릴 시간은 또 얼마고? 마지막으로 그 시간이 전부 흘렀을 때 도시 상태는 어디까지 악화되어 있을 것인가?
주작은 차마 그 둘 사이의 경중을 잴 자신이 없었다. 그의 관점에선 대부분의 인간이 거기서 거기인 가치를 지녔기에 더욱 그러했다.
모두의 목숨이 엇비슷한 값을 가진다면, 그땐 개개인을 살펴보기보다 전체 숫자를 따지는 것이 빠르다.
주작의 시선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당장은 어쩔 수 없지. 도시로 먼저 복귀한 후 상황에 맞춰 판단하는 수밖에.]“그럼 중간에 저를 내려 주시지요. 혹시 모르니, 2차 지구의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아 두겠습니다.”
“아니요. 그런 거라면 제가 하는 게 낫겠습니다.”
아크메이지의 제안에 주작이 뭐라 답하기도 전, 보라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저는 돌아가도 당장의 전력이 되지 못하니까요.”
나름 타당한 발언이었다. 아크메이지는 당장 탈진한 상태일지언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전력으로 복귀할 수 있지만, 보라뱀은 그게 안 되는 사람이니까.
[그래. 그렇게 하자.]주작도 순순히 수긍했다. 사람 하나 내려 두는 정도는 정말 잠깐이면 되었기에 가능한 허락이었다.
“하면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다니엘…….”
“저도 같이 수행하죠. 하나로는 돌발 상황에 대비하기가 힘들 겁니다.”
그때 다니엘과 막시모야크가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했다. 보라뱀을 혼자 보내는 대신 그들이 같이 내리며 경호하겠노라 하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되겠나?”
안 그래도 다친 보라뱀을 혼자 보내기엔 조금 불안하던 차였다. 다만 그렇다고 그에게 병사를 붙여 주자니 강제로 남게 될 병사는 무슨 죄인가 해서.
“그대들이 나서 주면 이쪽이야 고맙기 그지없네만… 구원 병력을 끝까지 못 보낼 수도 있네.”
“괜찮습니다. 각오한 일입니다.”
“하하, 죽는 게 무서우면 이 일 못 합니다.”
이런 마당이다 보니 말하기도 전에 호위를 자처하는 두 사람의 존재는 달가우면서도 미안했다. 아크메이지의 얼굴이 염치없어진 자 특유의 송구함으로 물들었다.
“그럼 저희가 배행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부탁하네.”
“걱정 마십시오.”
이렇게 1차 확장 지구에 내려질 사람이 결정되었다.
[너희의 용기가 반드시 보답받기를.]두 사람의 결단을 확인한 주작이 조금 나아진 목소리로 응원했다.
* * *
─그러니 저를 믿으세요. 저것은 살렸다, 다시 죽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걸로 끝날 거예요.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니 새끼 맹세가 어디 쓸데는 있답니까?”
한편, 데스브링거는 마법사들의 특징 중엔 지랄맞은 뻔뻔함─법사 나리 제외─도 있는지 따위의 상념을 뇌까리며 결국 고개를 주억였다.
“뭐, 됐어요. 뒈져도 혼자 뒈지지만 않으면 되겠지.”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그럼, 여기까지 와서 도망갑니까?”
하얀까마귀를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얀까마귀의 인품과 별개로 그가 자신의 목숨마저 판돈 삼아 대악마와 결전을 치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
데스브링거의 선택은 그저 적의 적은 잠깐의 아군이라는 논리에 의거하여, 이 신용 불량자에게 제 몫의 판돈까지 걸어 보는 것뿐이었다. 유대에서 오는 신뢰라기보다는 이것밖에 선택지가 없는 사람의 도박성 믿음이라고 해도 좋았다.
데스브링거의 녹색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래서, 난 뭐 하면 돼요.”
─별거 없습니다. 당신이 일정 거리 내에 자리를 잡으면, 저는 제 몸에 그 존재를 강령시킴으로써 부활하게 만들 예정입니다.
“강령?”
─음, 대충 흡수나 봉인 같은 겁니다. 실제로 원리도 비슷하고.
“아니, 개념을 모르는 건 아닌데.”
─오, 강령의 개념을 알고 있습니까?
“…댁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거야 제가 그 실험의 최초이자 최후의 실험체였으니까요? 이제 와선 그 어떤 의미도 없어졌습니다만.
실험. 그리고 하얀까마귀와 스카일라의 관계. 데스브링거의 손끝이 순간 차가워졌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당신은 나태를 가둔 제 몸을 베어 버리면 됩니다. 모종의 사유로 육체의 생명 줄을 다소 질기게 만들어 두긴 했지만, 아까처럼 목을 떨궈 낸다면 1초 정도는 정신 못 차릴 테고요. 그 틈을 타 심장도 찔러 주시고 두개골도 부숴 주시면 되겠네요. 그 정도 상처까진 재생 못 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거, 나태랑 같이 죽겠단 소리?”
─대악마를 잡는 일입니다. 이 정도 희생은 응당 감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이런 고민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데스브링거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희생을 논하는 하얀까마귀를 보며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막고 싶진 않지만, 묘한 감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나태가 들어간 육신을 완벽히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당신이 필요하다 여긴 이유고요.
“…좋습니다요. 좆같은 악마랑 좆같은 댁을 동시에 죽일 수 있다니,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작전이네요.”
─후후. 마음에 들었다면 다행입니다. 이것으로 우리의 목적은 완전히 일치했군요. 자, 그러면 슬슬 준비를 해 볼까요? 당신이 제법 훌륭한 암살자임은 알지만, 그래도 위치와 환경, 거리가 받쳐 줘야 더 편해질 것 아닙니까.
하지만 이 기묘한 기분도 잠시였다. 데스브링거는 암살 환경을 맞춰 주겠다는 하얀까마귀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요.”
─음?
“마침 제가 좋은 물건을 하나 가지고 있어서 말입죠.”
훌륭한 암살자는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할 때를 대비해 두 번째, 세 번째 길도 파 두는 사람을 뜻하니.
데스브링거는 딱 하나 받아 낸 고농축 성수와 스크롤 두어 개를 꺼내 흔들었다.
“여차하면 일대를 날려 버릴 수 있는 함정을 파 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