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 It Bad That the Main Character’s a Roleplayer? RAW novel - Chapter (528)
528화 우리가 복될 것이노라
나는 별이 없는 먹빛의 하늘에서 눈을 떴다. 세계 저편에는 여전히 거대한 세계수가 거꾸로 뒤집힌 채 하늘을 향해서 뿌리를 뻗고 있다.
[미안해.]“…게스타스?”
[그리고 고마워.]아울러 세계수에서 뻗어 나온 가지 한 가닥이자, 굴곡진 대지의 하나를 이루고 있는 줄기에서 게스타스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예전처럼 자색 스톨을 두르고 오색 빛을 흘리는 모습이었다.
[네 덕에 세계가 안정되었어. 전부 네가 해낸 일이야.]그 모습이 예전처럼 얄밉지 않다는 건, 역시 모든 게 끝나며 내 마음도 한결 느슨해졌기 때문이겠지. 물론 뒤풀이 한번 못 하도록 이르게 내쫓은 건 좀 괘씸하지만.
“…사야가 더 고생했죠.”
그 아이가 사탄이 도망가야 될 정도로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직후 통로를 열어 주지 않았다면, 마지막에 백업을 해 주지 않았다면. 과연 사탄 토벌이 가능이나 했을까?
[하하, 맞아. 그 아이도 정말 힘냈어. 면목이 없을 정도야.]“면목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은데요. 하하.”
농담하듯 뼈를 때리니 게스타스가 눈치를 보듯 땀을 뻘뻘 흘렸다. 반은 농담이었기에 나는 곧장 표정을 풀고 손사래를 쳤다.
“절반은 진심이지만, 괜찮아요. 잘 끝났으니까.”
[…보통 이럴 땐 농담이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어?]“솔직히 제가 조금만 더 성질 있었으면 여기까지 안 왔을 거란 거 아시죠?”
[그건 그래… 그래서 네게는 항상 감사하고 있어.]게스타스는 귀를 축 늘어트리며 소심하게 감사를 표했다. 그마저도 얼마 가지 않아 부활했지만 말이다.
[음, 사탄을 끝까지 죽여 준 것도 고마워. 거기까지 해 줄 줄은 몰랐는데…….]“뭐어… 완전히 매듭짓지 않으면 뒷맛이 영 찝찝해서요. 도망간 건 성공 조건으로 안 쳐줄까 걱정되기도 했고요.”
[그, 우리 그 정도로 믿음이 없었던가……?]“그것보단, 계약으로 워낙 통수 맞은 게 많아서.”
이건 진심이다.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당한 것이 원체 많아야지.
“그보다 질문 하나 해도 되나요?”
그렇지만 이제 그들에 대한 건 내 소관이 아니다. 앞으로 엮일 일도 없을 것이다.
하여 나는 살짝 풀어진 마음으로 풀지 못했던 질문이나 던지기로 했다. 설마 이것까지 답 안 해 주고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내지는 않겠지.
[어, 어? 그럼. 당연하지!]내가 질문할 줄은 몰랐다는 듯, 처음엔 당황한 표정이던 게스타스가 이내 고개를 활달하게 끄덕였다. [뭐가 궁금해?] 꼭 로또 번호라도 다 말해 줄 것 같은─그가 우리 세계의 로또 번호를 알 리는 없지만─너름이었다.
“인퀴지터를 촉매로 쓰지 않으면, 돌아가는 데 더 걸릴 거란 건 대체 무슨 소리죠?”
그렇지만 그런 발랄함. 내게는 통하지 않는다.
아무렴 아무리 좋게 여기려 해도, 뒤풀이 하나 못 하게 내쫓은 부분은 역시 NG였다고. 내가 외부 출신이라서 이곳에 계속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하루 이틀 정도의 여유 시간은 줄 수 있던 거 아니야?
[아, 그거…….]다행히 게스타스도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는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세상을 지키는 대가로 인간 시절의 감정을 잊고 있다던 샤기가 자신의 콧등을 살살 긁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일단, 그, 너를 급히 보내게 된 건 우리가 의도한 게 아니야. 아니, 따지고 보면 우리가 그런 결론을 내린 여파로 일이 이렇게 된 거니 완전히 의도한 바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긴 한데… 으. 이것만은 믿어 줘. 원래라면 우리도 네가 원하는 만큼의 시간은 주려 했어. 진심이야.]…혀가 길어지는 걸 보니 확실히 사정이 복잡하긴 한가 보다. 변명이 길되 두서가 안 맞는 걸 보면 경황도 없는 것 같고.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작정 이해하고 배려해야만 하는가?
“진심이고 뭐고 제대로 설명부터 하세요. 이해는 그 뒤에 해 줄지 말지 결정할 테니까.”
[넵.]그건 아니지.
나는 철벽을 두르며 은은하게 웃었다. 게스타스의 무릎이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털썩 굽어졌다.
[요약해서 말하면, 우리 해산해.]“…우리라면, 열매랑 나무요?”
[응.]“죄송한데 자세히 말해 주실래요?”
어른을 앞에 무릎 꿇려 두고 이야기 하는 취미는 없다. 나는 게스타스를 따라 무릎을 접어 앉았다. 땅이 굽이굽이 굴곡져서 무릎이 조금 아팠다.
[으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티 안 냈다고 생각했는데, 게스타스가 내 앉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더니 손가락을 딱 튕겼다. 방석이 생겨나며 나를 쑥 들어 올렸다. 푹신푹신했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로 뭘. 그래서… 음, 우리가 신을 대리하는 역할이었던 건 기억하지?]“네.”
[원래라면 이 일은 계속될 예정이었어. 그런데… 아까 너희의 싸움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말하더라고.]모두를 위한다는 이유로 소수의 존재들이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대의인가 독재인가. 질서를 책임지는 자들이 사라지고 모두가 각자만의 판단을 떠맡는 것은 과연 자유인가 무법인가.
게스타스가 자신의 고개를 뒤편으로 돌렸다. 하여 나 또한 그의 시선을 따라 여즉 스스로 빛나는 세계수를, 뿌리는 하늘로 가지는 대지로 뻗는 그 나무를 보았다.
[하지만 당시의 최선이었던 선택이 지금마저도 최선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일궈 낸 이 나무가 진정 영원을 지탱할 수 있나?]거대하여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나무의 뿌리가 천천히 천천히 빛 가루로 화해 스러졌다.
[고이는 걸 경계하여 순환되게 만들었어. 하지만 내용물이 바뀐다고 해서 구축된 시스템이 변화를 이루는 건 아니지.]그 모습이 참으로 찬란하다. 애처롭도록 아름답다.
나는 천천히 떨어지는 나무의 잔해 사이로 멍하니 손을 뻗었다. 그러자 빛이 내 손바닥 위에 소담히 쌓였다. 온기를 앗아 가는 백설과 달리 따스함을 남기고 스러지는 빛 가루가 마치 재와 같았다.
[그렇다면 결국 이것도 언젠가는 타락의 길로 들어설지 몰라. 우리가 가장 경계했던 그 형태로 정작 우리 자신들이 변질될 수 있다는 거야.]“…그래서?”
[응, 그래서. 그래서 차라리 그만두기로 했어. 지금의 인간들이라면 얼마든지 믿고 맡길 수 있으니까.]“그럼 여러분들은…….”
[다음 생을 원하는 이들은 다음 생을 찾아갈 거고, 그러지 않고자 하는 놈들은 세계를 보호하는 한 겹의 결계로 승화할 거야.]“결계?”
[아, 참고로 그건 시스템이 아니라, 그냥… 음. 말 그대로 보호 장치니까 타락할 걱정은 없다?]“아니, 전 그런 걸 걱정한 게 아니라…….”
나는 소복히 쌓이고 사라지는 빛 가루들을 가만히 보다가 그대로 손바닥을 말아 쥐었다.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동정이라고 차마 칭하고 싶지 않고 공감이라고 하기엔 얕으며 존경이라고 하기엔 다소 거친 감정이었다.
“그런 끝으로도 충분한 거예요?”
[그럼.]하지만 이 감정은 내게도, 저들에게도 필요 없는 것이다. 나는 차오르는 마음 중 긍정적인 것들만을 골라 혀 끝에 매달았다.
“그것이 당신들의 선택이라면… 네. 그간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게스타스의 눈이 일순 커졌다가 그대로 부드럽게 휘어졌다.
[응. 고마워.]정말 해사한, 인퀴지터의 신록처럼 밝은 미소였다.
[그래도, 일찍 돌아가게 만든 건 사과할게. 네가 해 준 걸 생각하면 얼마든지 남아서 누릴 거 누리고 가도 부족할 지경이었는데… 하필 해산 타이밍이 지금밖에 안 나서. 그렇다고 전부 해산시킨 후 너를 돌려보내자니 그건 또 십 년 이상 걸릴 것 같지 뭐야.]“…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니까요. 타이밍이 지금밖에 안 났다면 어쩔 수 없죠.”
[정말 미안…….]아니, 십 년이라면 그건 나도 ‘이건 좀.’ 싶으니까. 뒤풀이 하고 십 년 더 있기 vs 뒤풀이 포기하고 바로 가기 하면 당연히 후자 아니야? 아쉬움의 무게가 다르잖아.
“근데 인퀴지터가 하필 촉매가 되어야 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나무니 열매니 하나의 형태로 뭉쳐져 있던 우리가 천천히 흩어지고 있는 상황이니까. 인퀴지터처럼 힘을 밀집시켜 줄… 음, 그래. 채널이 없으면 곤란하거든. 정확히 말하자면 너보단 네가 쓰고 있던 육신 쪽이.]“아, 파우스트.”
나는 그제야 내가 물어봤어야 했던 주제를 떠올릴 수 있었다. 파우스트와 인퀴지터, 기타 남은 사람들의 안위도 물어본다는 걸 앞선 대화의 충격 때문에 잊고 있었어!
[네 영혼이야 해산하는 상태로도 언제든지 데려올 수 있지만, 남겨질 육신 쪽은 아니라서 말이야. 그렇다고 인퀴지터와의 채널을 끊었다가 나중에 다시 연결하는 건… 우리가 해산하기 시작하는 바람에 영 어렵게 됐거든.]“요컨대, 미리 만들어 둔 채널은 사용에 문제가 없지만 새 채널을 만드는 건 어렵다. 그래서 채널이 만들어진 상태인 지금밖에 때가 안 났다?”
[정확해.]그래. 대강이나마 이해했다. 이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좋아요. 이젠 더 이상 빨리 돌려보내는 문제로 뭐라 하지 않을게요. 사정 완전히 이해했으니까. 대신 파우스트는 괜찮은 건가요?”
[아, 응. 그 아이는 걱정 안 해도 돼. 그 아이를 도우러 간 이들이 있으니까.]“…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 맞죠?”
[그럼!]“마기 때문에 고생한다든가… 아니면 마기를 정화하느라 엄청 아프다든가…….”
이번에 겪어 봤는데 같은 성질의 힘으로 신체 구성을 교체하는 것도 진짜 죽을 맛이더라. 그런데 정반대의 성질로 몸의 체질을 바꾼다? 그건 진짜…….
[걱정 마. 아예 새 몸을 빚어서 영혼을 이식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니까. 새 몸이 한동안 낯설기는 해도 아프진 않을 거야. 이식할 때도 정말 잠깐! 진짜 인지도 안 될 만큼 짧은 시간 동안만 아플 거고.]“진짜요?”
[응!]새 몸을 빚어 이식한다는 게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는 가늠이 안 되지만, 메피스토펠레스도 멋대로 몸 바꾸고 다닌 걸 생각하면 큰 문제는 없겠지. 크게 아프지 않겠다는 말도… 그래, 믿을 수밖에 없고.
[그것 외에 더 궁금한 건 없어?]“…사야도 앞으로 아플 일 없겠죠?”
[어, 일단 우리로 인해 고생할 일은 없을 거야. 용사의 문양도 거둬 갈 거고, 신탁도 내릴 일 없어졌으니까. 하지만 그 아이가 아플 일이 전혀 없을 거라 확답은 못 하겠네. 본인이 자처하는 것까진 우리도 어떻게 할 수 없는걸.]“본인이 나서서 고생하는 건 뭐 어쩔 수 없죠. 앞으로 휘둘릴 일 없다면 그걸로 족해요.”
[응, 응!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사야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고… 음, 혹시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많나요?”
[어, 미안. 아는 사람의 기준을 잘 모르겠어.]“저랑 대화 20번 이상 한 사람이요.”
[음, 음. 없는 것 같아.]“그럼 됐어요.”
사실 나랑 친하게 지냈던 일행 대부분이 멀쩡한 건 알고 있다. 마지막에 얼굴 봤으니까. 하지만 도시에 남아 얼굴 보지 못한 이들도 분명 있으니까… 그들의 안부가 좀 걱정됐을 뿐이다. 살아 있다니 그걸로 됐지만.
“…이제, 가면 되나요?”
[갈 거야?]“네.”
어쩌면 돌아가서 미처 묻지 못한 것들이 떠오를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미련과 후회가 될지도 모르지만.
“아쉬움만큼이나 그리움이 너무 커져서요.”
당장 보고 싶은 얼굴들이 있는 이상 이 이상 멈춰 있고 싶진 않다.
[응. 보내 줄게.]“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걸. 나야말로 고마워. 정말로.]나는 게스타스를 따라 일어났다. 그러자 게스타스가 내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잘 가렴.]“네.”
그의 손이 내 이마에 톡 닿는 순간, 내 눈이 절로 감겼다.
삐익.
그리고…….
삐익.
“요백아?”
“전요백?!”
다시 눈을 떴을 땐, 익숙한 격자 무늬 천장이 나를 반겨 주었다. 손에 가득 들어찬 온기와 함께.
“아.”
호흡기, 불편해. 나는 무심코 그것을 떼어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래도 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다만 내 시야에 오밀조밀 모인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을 뿐이지.
“다녀왔습니다.”
“…이, 이 바보야!!”
“깨, 깨어나 줘서 고마흐어어엉.”
“얼마나, 얼마나 걱정했는데…….”
침대 옆, 창문으로부터 아침의 볕뉘가 흘러 들어왔다. 손목에 둘둘 말린 팔각체인형 목걸이 겸 팔찌가 일순 반짝였을 정도로.
* * *
인퀴지터는 모험가를 휘감았던 새하얀 광채가 사그라드는 것을 보았다. 그 가운데 누군가의 신형이 비치는 것을 보고 혹시나 하는 심정이 들었으나, 그 마음은 곧장 사라졌다.
“이 아이는…….”
그녀는 사라진 빛 사이로 천천히 내려앉는 소년을 품에 안으며 그 얼굴을 보았다. 모험가의 흔적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어?”
“우왓!”
더불어 모험가가 떠난 그 자리, 빛이 내려앉았던 그 점으로부터 황폐했던 대지가 천천히 복구되기 시작했다. 탁하고 불길했던 색이 말간 황토색으로 변하는 것도 모자라 푸르른 초목이 돋아난 것이다.
“…꽃이 핀다.”
또한 그 초목 사이로 작고 하얀 꽃이 오밀조밀 피어났다.
“꼭… 별 같아.”
“많아.”
“하면 이것은 은하수인가.”
별의 꽃이 저주받았던 땅 위로 무수히 늘어지는 순간이었다.
꿈틀.
“아, 깨어납니다!”
마지막으로 낮에도 볼 수 있는 별의 폭포가 이 땅을 전부 덮었을 때, 빛에서 태어난 소년이 눈꺼풀을 살며시 들었다. 모험가와 닮은, 그렇지만 모험가가 아닌 회색 눈이 초점을 잡지 못해 어렴풋하게 흔들렸다.
“…….”
이사야는 그것에 참 묘한 감각을 느꼈다가, 이내 밝은 웃음을 입가에 내걸었다. 누군가가 떠났다면 또 누군가와 마주치는 것이 인생임을 배웠기에, 새로운 만남을 반길 준비를 했다.
“…내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다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