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is said that his brother possessed the novel RAW novel - Chapter 176
176화
【리셋】
왕은 몸집을 줄여 왕좌에 앉았다. 그러곤 제 앞에 널브러진,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을 조용히 응시했다. 얼굴만 겨우 남은 한지언이었다.
―…겨우 이런 것에 노심초사하였다니.
저것을 죽이려, 온갖 변수를 고려해 상대하였으나, 돌아온 것은 허무뿐이었다.
이리 약하게 숨을 다하는 것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 힘을 다하였다는 것이, 졌다는 것이, 전부 본인에게 있었던 사실이라 치욕스럽기 그지없었다. 당장 저것을 찢어 짐승의 먹잇감으로 줘도 이 치욕은 벗겨지지 않을 것이었다. 저것의 피로 담근 와인을 삼키더라도.
―아니… 그래도 그리하는 건 아깝지.
왕은 껍데기만 남은 것을 응시했다. 텅 비긴 했어도 그릇 자체에 충분히 효용성이 있을 터. 그래. 이날만을 기다려 왔는데, 이 정도 보상은 있어야지.
저것이 약해진 것은, 온 우주가 나를 바라보고 있기에, 나의 승리 쪽으로 손을 들어 주었기에 그런 것일 터였다. 그래. 운명은 내 손에 쥐어져 있다!
왕은 승리를 만끽하려, 한지언의 사체에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검고 검은 손들이 바닥에 튀어나와 시체를 붙잡았다. 이제 저 무한한 그릇만 꺼내면 자신의 완벽한 승리이리라.
―…뭐지?
그때 한지언의 몸을 붙잡은 검은 손이, 재가 되기라도 한 듯 공중에 흩어져 사라졌다. 파도의 포말처럼 일렁이다 이내 완벽히 사라진 제 능력을 본 왕은 미간을 움찔거렸다.
―이것의 아군은 아닌데.
그렇다고 어떠한 생명체의 방해가 느껴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허공에서 갑자기 능력이 흩어졌다. 이상 현상에 왕은 가만히 한지언을 바라봤다.
살랑. 하얗게 빛나는 무언가가 허공에서 생겨나 내려앉았다.
―종이?
찢어진 종이가 팔랑이며 한지언의 몸에 내려앉고, 거의 동시에.
―…….
한지언의 몸이,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수복되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왕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당연했다.
우주가 본인을 위해 움직여, 시간을 되돌아왔다고 생각했거늘. 역시는 역시나다. 약해졌어도 이 정도는 가능하다 이건가.
―하!
그래. 너무 약하다 싶었다. 이런 잔재주를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하하하! 그래야, 그래야 네놈이지!
왕은 호박빛 눈을 부릅뜨고 한지언이 어떤 행동을 취할까 생각하며 바라봤다.
눈도 깜짝하지 않고, 꼭 동상처럼 멈춰 서서, 한지언이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 무슨 힘을 보여 줄지, 그 어느 것이든 좋으니, 무엇이든 좋으니 본인을 기쁘게 할 것이라, 실망한 마음을 돌려놓으리라 생각하고 하염없이 쳐다봤다. 최초로 불을 발견한 인간이라도 된 듯.
한지언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몸만 수복되고 숨은 이미 멎기라도 한 듯이. 그러나 한지언은 분명히 되살아났다.
꾸득. 왕이 손톱으로 제 왕좌를 긁었다. 의도한 행동은 아니었다. 의문스러운 행동을 한 제 몸을 확인한 왕은, 이내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이건…….
왕의 두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손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도망치라 소리치고 있었다. 저 시체로부터? 아니. 더 큰 무언가로부터. 생전 처음 느끼는, 아니. 딱 한 번밖에 느껴보지 못했던 그 느낌이 어째서 지금 느껴지는가.
뚜벅.
누군가의 발소리에 왕은 곧장 고개를 들었다.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이 공간에 있었던 거였다. 한지언이 아닌, 한지언의 옆에, 무언가가.
―넌… 누구냐.
새하얗게 빛나는 천 아래, 검은 손이 한지언의 등에서 손을 뗐다. 그러곤 몸을 돌려 왕에게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하얀 천과 대비되는 새까만 몸에, 글리치 효과가 일어났다. 꼭 이곳의 생명이 아니어서 세상이 부정하는 것처럼.
정체 모를 것에 의아해하기도 전에, 왕은 공포심에 몸을 떨었다.
―누구냐고 했다!
겁먹은 왕이 소리쳤다. 공간에 큰 진동이 일 정도의 외침이었으나 그것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왕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 진동에 한지언이 몸을 움찔거렸다가, 이내 눈을 떴다. 그리고 곧장 주변을 살피곤 당황을 금치 못했다. 첫 번째로, 죽었다 생각한 본인이 살아 있는 것에. 두 번째로는 왕이 당황하며 무언가와 대적 중인 것에. 세 번째로는 본인의 편처럼 보이는 그 무언가에.
한지언은 힘을 다한 몸을 겨우 일으키며 물었다.
“…누구야.”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 무언가에게 물었으나 돌아온 것은.
“…자.”
모든 생명의 목소리가 뒤섞인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그것은 그의 질문에 대한 답도, 그 어느 것도 아닌 자라는 말이었고, 한지언은 정말로 어이없게도 잠들어 버렸다.
쓰러진 한지언을 바라보는 듯, 무언가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다시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그 빈틈을 노려 기습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식은땀을 흘리며 무언가를 쳐다봤다. 왕의 머릿속에서는 오직 한 단어만이 요동쳤다.
도망쳐. 도망쳐야 한다.
―…뭣.
왕은 능력을 사용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성큼. 무언가가 왕을 향해 다가왔다.
―어째서… 어째서냐!
왕은 제 하얀 머리카락을 손으로 쥐어뜯으며 발광했다. 꼭 본인이 무능한 생명으로 변한 것 같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요동쳤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전능한 왕이며, 이 세상의 신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그건 저것 때문인 게 분명했다.
―도대체 뭐냐! 뭔데 나타나 나를 방해하는 거냐!
“…….”
―자리, 내 자리를 원하는 거냐? 그렇다면 주겠다! 너의 그 강함을 보아 네겐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그러니…….
뚜벅.
뚜벅.
무언가가 왕좌에 앉은 왕을 향해 다가왔다.
―멈춰라!
“…….”
―멈추라 하였다!
“…….”
―멈추라고!
왕이 소리치며 본모습을 드러냈다. 인간과 같은 모습이 아닌, 몬스터 그 자체의 모습. 거대한 검은 몸에 하얀 머리칼이 엮인 몬스터. 저 무언가에게, 왕은 겨우 그런 몬스터였다.
왕이 짐승과 같은 소리를 내며 팔을 휘둘렀다. 무언가는 그것을, 무척이나 느린 그 모습을 보며, 물 흐르듯, 제 몸으로 빚은 것만 같은 검은 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가볍게 휙! 휘두르자 왕의 팔이 힘없이 잘려 나가 융단 너머 대리석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
―뭣……!
왕이 놀랄 틈도 없이 툭, 검은 검이 왕의 다리에 닿자, 빨려 들어가듯 왕의 몸이 아스러졌다. 왕의 비명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우두둑거리며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화음 넣듯 들려왔다.
툭. 투둑.
검 아래, 구슬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 제 발치에 닿은 하얀 구슬을 빤히 보던 무언가는, 이내 발을 들어 그것을 밟았다.
빠각.
그렇게 왕은 허무히 죽었다. 한지언이 그리 죽이고 싶어 했던 것이, 참으로, 허무히.
♧♣♧
“한지운 헌터! 진정하십시오!”
쾅! 쾅!
한지언이 사라진 이후, 곧바로 몬스터 떼가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이려 하여도 죽지 않는 몬스터. 그것들이 기어코 사람들을 죽이려 한다.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이었기에 어서 다음 층으로 향하고 싶었으나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살아나는 몬스터는 본체가 따로 살아나게 하는 것이기에 그 본체를 찾으려 하였으나 그것도 없었다. 이곳은 그저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과도 같았다.
유아한이 작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제 재미없어서 죽이려나 봐요.”
“유아한 헌터!”
“왜요, 맞잖아요. 한지언 헌터가 다음 층으로 가는 길을 내주는 거였다면 진즉 내줬겠죠. 근데 조용하잖아요. 그럼 죽은 거겠죠. 한지언 헌터도.”
유아한의 말에 한지운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러곤 유아한을 매섭게 노려보니, 유아한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몰려오는 몬스터에게 주먹을 날렸다. 다른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하던 류천화가 입을 열었다.
“유주한 헌터가 많이 힘든 거 같은데.”
“…….”
유주한은 더 이상 대답조차 할 힘이 없었다. 몸만 겨우 움직여, 생존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곧바로 비틀거리며 가물가물 감기는 눈과 풀리는 다리에 쓰러지려는 유주한의 몸을 옆에 있던 유아한이 받아 부축했다. 유아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
그 말에 류천화가 답했다.
“어차피 우리도 곧 죽을 거 같으니, 들어오건 안 들어오건 똑같았을 것 같군. 아무것도 못 하고 이리 허무하게 죽을 줄이야.”
한지운은 조용히, 피 나는 손으로 검을 쥐고 몬스터들을 공격했다. 계속해서 살아나는 몬스터임을 앎에도, 길을 뚫어 제 동생에게 가야 했기에. 놓아 버린 제 동생의 손을 다시 잡아야 했다. 놓지 말고, 손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붙잡고 있을 것을.
쫑긋. 거의 늘어진 유주한이 귀를 움직였다가 이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곤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뭐야. 왜 이래.”
“…뭔가 있어.”
유주한은 텅 빈 허공을 보며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승현이 곧장 막아섰으나, 유주한은 계속해서 나아가려 했다.
뒤이어 한지운 역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뒤로 돌았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낌새는 더욱 거대해져, 어쩐지 보호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제는 온몸이 안전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한지운 씨!”
지화연의 목소리에 한지운이 곧장 고개를 돌리자 몬스터가 입을 쩍 벌리며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한지운은 방심해 미처 검을 들기도 전에 뜯기리라 생각하였으나.
살랑.
새하얀 천이, 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퍼버버벙!
지금껏 죽지 않았던 몬스터 무리가 단 한 순간에 터져 나갔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S급들조차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던 것들이, 단숨에.
한지운은 멍하니 눈앞에 있는 것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몬스터들이 죽어 나간 땅 위, 새하얀 천을 쓴 무언가가 서 있었다. 몬스터의 피가 흩뿌려졌음에도 새하얗게 빛나는 천은 너무나 순백하였다. 꼭, 다른 세상의 것처럼.
그것은 할 일을 끝마쳤다는 듯 넘실거리는 천으로 허공을 갈랐다. 그러곤 고개를 살짝 돌려 까닥였다. 꼭 따라오라는 듯. 그러곤 갈라진 틈 안으로 쏙 들어가 사라졌다.
지화연이 말했다.
“따라가야겠죠?”
“…함정일 가능성은…….”
“글쎄요. 어찌 됐건 저희를 구해 준 거잖아요? 방금 전보다 더 나쁜 상황이라도 오겠어요?”
한지운은 넘실거리는 공간 너머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곧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려 나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다른 사람들 역시 당황할 새도 없이 그를 따라 넘실거리는 공간 너머로 향했다.
만져지는 천자락을 무시하고 곧장 몸을 던지듯 갈라진 공간에 들어선 한지운은 이내 멈춰 서 멍하니 풍경을 바라봤다.
“한지운 헌터! 그렇게 갑자기…….”
승현 역시 넘어선 공간의 모습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공간을 넘어왔다. 류천화가 말했다.
“여긴… 꼭 왕이 있을 거 같은데…….”
그러다 그는 말끝을 흐리고 제 눈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왜 한지언 헌터가 있는 거지.”
한지운은 조용히,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알 수 없는 광경을 바라봤다.
붉은 융단이 길게 깔린 너머, 거대한 왕좌. 그곳에 한지언이 희미하게 내려앉은 빛을 받으며 눈을 감은 채로 힘없이 앉혀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