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is said that his brother possessed the novel RAW novel - Chapter 202
202화
눈 내린 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밟힌 눈에 남은 자국이 기다랗게 이어지고, 중간중간 만났던 몬스터들의 크기가 작아지다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계속해서 걸었다.
혹여 함정은 아닐까 싶어 입을 열려 할 때마다, 겔탄이 이를 눈치채곤 함정이 아니라며 질문하기도 전에 답했다. 아마 본인도 의심받을 것을 예상했기에 그런 거겠지.
이번에도 질문하려 하자, 겔탄이 함정이 아니라 말했다.
“…아니. 그거 말고.”
―그럼?
“어디까지 가야 하는데.”
―거의 다 왔어.
“그 말 아까도 하지 않았어?”
―이번엔 진짜야.
“…솔직히 내가 널 믿어야 할 이유조차 없는데,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답하면 더 이상 안 따라갈 거란 생각은 안 해?”
―말하면 재미없거든.
“재미는 뭔. 뭘 하든 이미 재미없어.”
―그래?
툭. 겔탄이 걷던 다리를 멈추곤, 뒤로 돌아 나를 바라봤다. 그 순간.
―이래도?
훅. 눈이 내리던 설원이, 단숨에 다른 공간으로 바뀌었다. 바닥에 깔렸던 새하얀 눈이 벽과 천장을 뒤덮은 것처럼, 사방이 온통 새하얬다.
째깍. 째깍.
하얀 공간 벽면에 붙은 시계들이 제각기 다른 시각을 나타내며 돌아갔다. 허공에 떠도는 다양한 시계들이, 꼭 내 정신 같았다.
멍하니 공간을 바라보고 있자, 누군가 저벅저벅, 하늘에서 내려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밟으며.
신화에 나오는 선녀 같은 화려한 옷자락이 흔들리고, 끝이 하얗게 물든 긴 주황빛 머리칼이 비단처럼 흘러내렸다. 얼굴은 치장된 사슴의 두개골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차근히 다가오던 존재는, 이윽고 나와 같은 땅을 밟고 나서야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개골로 가려진 얼굴에, 눈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가만히, 날 정면으로 보고 서서 응시하는 것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두 배는 되는 듯한 몸집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톡, 가볍게 점프해 앞의 존재가 머리에 쓰고 있는 두개골을 잡아 벗겼다. 당황해 하는 손짓을 무시하고 툭 바닥에 내려와 앞의 존재를 바라보았다.
“…변하셨네요.”
두개골 아래에 있는 얼굴은,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어째서 저런 모습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습이 변하였어도 누군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나는 두 눈을 찌푸린 자를 보며 작게 웃었다.
“오래간만이에요, 선생님. 외모가 화려하시네요.”
나의 스승이었고, 빛이었으며, 정말…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고마운 존재. 내가 살아남을 수 있게 많은 것을 알려 주었던 선생님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어.
“사람이 쉽게 바뀌진 않죠. 그래서, 소감이 어때요?”
―버르장머리 없어.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발밑에 스치는 존재를 확인했다. 겔탄이 내 발목에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확 낚아채 집어 들었다.
“얘는 왜 거두신 거예요? 별 쓸모도 없을 텐데.”
―가엾으니까.
―그리고 귀엽잖아!
“넌 입 좀 다물어라.”
―내가 너를 도운 것처럼, 이 아이도 돕는 것뿐이야. 때가 되면 홀로 설 수 있게 돕는 게 내 역할이지.
선생님이 내 손에 있던 겔탄을 넘겨받아, 본인의 어깨 위로 올렸다. 겔탄이 익숙하게 선생님의 목을 감싸고 하품을 하더니 넙죽 엎드렸다.
“저는 때가 안 됐는데 버리셨잖아요.”
―때라는 것은, 본인도 모르게 찾아오는 거다. 그리 … 그건 네 잘못도 있다.
“…앞으로 그런 잘못 할 생각 없으니 걱정 마세요. 그럴 생각조차 이젠 없으니까.”
―…….
나는 오래간만에 온 공간을 천천히 구경했다.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아 참으로 평화롭고 고요한 이곳은, 마음의 안식처와도 같았다.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뭐냐.
“선생님은, 시간의 관리인이신 건가요?”
처음 봤을 때 선생님은 나에게 시간이 멈춘 존재라고 하였다. 그리고 언젠가는 네 시간은 너무나 거대하다고 하고, 또 언젠가는 세상의 시간은 너무나 짧다고 하셨다. 뭐든 시간을 포함해 말하는 모습을 보면 시간과 관련이 있는 존재인 건 거의 확실했다.
관리인이라는 건… 솔직히 감이다. 강하면서 우리와 싸울 의지가 없는 존재들은 그들뿐이었으니까.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꽤 의외였다.
―아니.
“아니라고요?”
조금 놀랐다. 맨날 운명이니 시간이니 어쩌고 하더니, 시간과 연관이 없다고? 난 그동안 철석같이 선생님이 시계와 연관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난 뭘 추측하면 안 되나 보다. 뭘 해도 안 맞냐, 진짜.
“그럼… 선생님은 뭐예요? 관리인은 맞으신 거죠?”
― 그런 칭호가 꼭 필요한 거라면, 관리인은 맞아. 다만 시간의 관리인이 아닐 뿐이지. 시간은 그 누구도 관리하지 못해. 세상의 흐름이니까. 흐름을 관장한다는 것은 신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시간을 멈추는 것, 과거로 돌아가는 것, 미래로 시간을 옮기는 것. 전부, 단순한 생명체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특이한 능력이 있다 해도.
“그럼 전 신이겠네요.”
―틈만 나면 헛소리.
“하하.”
선생님과 함께 있다 보니 옛날 생각이 무럭무럭 떠올랐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회차 때, 선생님이 말해 주셨다. 나는 그저 거대한 강물에 휩쓸린 피해자일 뿐이라고. 그것이 불쌍하여 본인이 도우러 왔다고.
그때는 선생님이 한 줄기의 빛과도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억지로 따라 할 뿐,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조차 없었으니까. 그걸 알려 준 것이 눈앞에 있는 선생님이니.
나도 그때까지는 왜 내가 강물에 휩쓸린 걸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생각이 바뀌었다. 거대한 강물에 휩쓸린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빠진 거라고. 처음에는 휩쓸렸을지 몰라도, 그다음부터는 내가 스스로 빠진 것이라, 그렇게 생각한다.
“그럼 선생님은, 무슨 능력을 지니셨기에 저를 도와주고도 멀쩡하신 건가요. 왕이 가만두지 않았을 것 같은데.”
―관리인에 대해 알고 있기에 어지간한 건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지. 왕은 관리인을 굳이 건드리지 않아.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이상.
“저를 도와주는 것 자체가 심기를 건드리는 거 아니에요?”
―그때 왕은, 너에게 관심조차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은 아니었지.
“…다 아시네요. 혹시 뭐 관찰의 관리인이라도 되시는 거예요?”
―아니.
선생님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답을 알려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뭐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야지.
“선생님.”
선생님이 고개를 다시 나에게로 원위치시켰다.
“왜 제 앞에 나타나신 거예요?”
몇십, 아니, 몇백 번은 회귀한 뒤에야, 인제야 왜 내 앞에 나타나신 걸까. 아무리 힘들여 찾아도 절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존재가, 하필 이변이 나타나고 나서야. 내가 아닌 이변에 더욱 신경 쓰는 것처럼.
“힘들 때 불러도 안 나오시더니.”
―투정 부리냐?
“미워서 그래요.”
―지금은.
“…알면서 묻지 마세요. 안 미워해요. 그럴 마음조차 없어요, 이젠.”
―그래, 아가야. 나 없는 동안 잘 지냈고?
“언제나 늘 아가네요, 저는.”
사실 선생님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나에게 도움을 준 소중한 존재인 것만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을 뿐이었다.
…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이 다시 눈앞에 나타나실 때까지는.
다시 만났을 때 처음 든 생각은, 난 아직도 미성숙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사람이 참 웃기다. 나이를 먹고, 시간이 그렇게나 흘렀는데, 마음은 크질 못했으니까. 정말, 몇백은 훌쩍 넘게 산 것 같은데 아직도 이러다니. 나도 참 웃긴다.
‘어쩌면 욕망일지도 모르지.’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욕망 말이다. 그래서 더욱 보호받고 싶어 하는 거고.
선생님이 앞에 있으니, 나 자신이 참으로 웃겼다. 가라앉았던 욕망과 감정이 올라오는 것만 같아서. 난 여전히 나약하구나. 이기적이고.
“힘들었어요. 많이.”
―그래.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익숙하지 않나 봐요.”
―그래.
“전 제가 되게 무신경한 줄 알았는데, 그냥 회피하는 거였고요.”
―그래.
“…그래도 지금은 마냥 회피하진 않아요. 아니에요. 확실히 새로운 변화가 사람을 뒤바꾸더라고요.”
그 순간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무언가가 머리를 꾹 누르곤 이리저리 흔들었다. 선생님의 큰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거였다. 그 아래로 큰 소매가 내 뺨을 스쳐 지나갔다. 편안한 향기에 드러눕고 싶었다.
―수고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냐.
“선생님은 뭐 하시는 분이세요, 도대체? 공간도 마음대로 바꾸고.”
왕의 힘을 받았다는 괴인들도 이렇게까진 못 하던데. 관리인이라 그런가. 하지만 사서 역시 자신의 공간을 조종하지 다른 공간에서 누군가를 불러올 수는 없었던 거 같았다. 입구는 열더라도. 혹시 설원까지 선생님의 구역이었던 걸까.
쓰다듬던 손이 멈추더니, 이내 선생님이 내 머리에서 손을 떼어 냈다.
―…글쎄다.
잠시 고민하던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가끔 나도 내가 어디서부터 존재하였는지 생각한다. 하지만 끝내, 답을 찾을 수 없었지.
“저랑 비슷하네요.”
난 회귀의 이유를 생각하지만,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조금 다르지만.
―…시간이 되었다.
“무슨 시간이요?”
―왜 만나러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지.
선생님의 물음에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널 만나기엔 내가 너무 나약해서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