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is the nanny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38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38화
루스 네이븐은 온도가 변한 집사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고개를 치켜들고는 클로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은 어떻게 놀아 드릴까요? 암브로시아 공자님.”
그가 말을 꺼내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영식들이 하나둘씩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아, 지난번에 체스 게임은 지루하다고 하셨으니 오늘은 색다른 걸 준비했습니다.”
“제가 마침 좋은 선물을 가져왔죠. 암브로시아 공자께서 가지고 놀기에 충분할 수준일 겁니다.”
그들은 하나둘씩 클로드에게 다가가 주변을 감싸며 교묘하게 론다를 클로드에게서 떼어 냈다.
“내가 맡겼던 선물이 있지 않나. 그걸 이리로 가져와 줘.”
“암브로시아 공자님이 기다리실 동안 다과도 들었으면 좋겠는데. 준비해 줬음 좋겠군.”
기다렸다는 듯이 이것저것 시키기 시작하는 것은 자리를 비켜 달라는 말이었다.
베론은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뒤로 물러섰다. 이쯤 되면 빠져 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집사가 주인의 유희 자리에 계속해서 지키고 서 있는다면 여기저기 말이 나오기 쉬웠다.
시녀장인 론다 또한 자리에 얌전히 잘 앉는 클로드를 보며 안심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다른 사용인들이 있으니 그녀는 조금 더 멀리서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그렇게 집사와 시녀장이 자리를 비우니 루스 네이븐은 기다렸다는 듯 본색을 드러내었다.
“표정이 참 어두우십니다? 암브로시아 공자.”
“아무리 우리가 싫어도 그렇지 표정 관리는 해야죠.”
“어린애 상대로 뭘 하라는 건지……. 아버지도 진짜 시시하게.”
클로드는 제 머리 위로 쏟아지는 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먹을 꽉 쥐었다.
날 선 비난의 목소리와 은연중에 풍겨 나오는 악의.
아이는 이런 미묘한 것들을 잘 눈치챘다. 심지어 익숙하기까지 했다.
한 번씩 클로드를 쿡쿡 찔러 본 이들은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흥미를 잃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네이븐 자작님이 이번에 말을 선물했다던데. 구경해도 됩니까?”
“언제 한번 저택에 초대하겠습니다, 파블 백작 영식.”
“와!”
대화는 이제 클로드를 완전히 제외하고 흘러갔다.
네이븐 자작 영식을 중심으로 귀족 영식들은 클로드가 보이지도 않는지 그의 비위를 맞취 주며 맞장구를 치기 바빴다.
어린아이들일수록 서열에 민감하기 마련이었다.
그것도 보이지 않는 화술로 상대를 견제해야 하는 사교계에서 활동하게 될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자신이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이에 불과하다는 것도 잊고 다 큰 귀족 청년을 흉내 내는 광경이 펼쳐졌다.
“아버지가 여우를 사냥하는 법을 알려 주기로 했으니, 다들 시간 되면 구경 오십시오.”
“꼭 가겠습니다!”
“저도 잊지 말고 초대해 주세요, 네이븐 자작 영식!”
이들은 이 자리가 암브로시아 공자와 친분을 쌓기 위한 자리임을 망각한 것처럼 행동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머리로는 자신들보다 훨씬 어리고 소심한 클로드에게 비위를 맞추라는 집안 어른들의 지시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각자의 가문에서 금이야 옥이야 원하는 것은 전부 다 들어주며 키웠으니 그 고고한 자존심에 신분이 높다는 이유로 어린아이와 놀아 주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다.
“…….”
클로드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빌었다.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 노골적으로 보이는 귀족 자제들과의 만남은 정말 고역이었다.
클로드는 지난 모임 동안 자신에게 쏟아졌던 폭언들을 똑똑히 기억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라며 첫인사를 했을 때는 아주 친절하게 미소 짓던 이들이, 아이들끼리만 남게 됐을 때 노골적으로 클로드를 비웃으면서 했던 말들 전부 다.
‘너 때문에 공작 부인이 죽었다는데 진짜야?’
‘그래서 공작님이 널 싫어한다며? 아직 황궁도 못 가 봤다며?’
‘아버지한테 선물 받은 것도 없지? 미움받는 자식이랑 친해져서 무슨 소용이야?’
‘야, 우리가 싫어? 그럼 아버지한테 일러 보든가! 일러라, 일러! 아하하!’
약자에게 잔인한 것은 어른들보다 아이들의 세계가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 하지 않았다.
그리고 클로드에겐 어른들보다 이런 아이들의 세계에서 고립되는 것이 더 무섭고 괴로웠다.
이건 어른들이 해결해 줄 수 없는 아이들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인 에단 암브로시아에게 가서 이를 수도 없었다.
‘괜히 아버지가 날 더 미워하시게 되면 어떡해.’
클로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꾹 입을 다물었다.
루스 네이븐을 포함한 다른 영식들은 그런 클로드를 힐금 보며 자기들끼리 묘한 시선 교환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가만히 풀 죽어 있는 모습을 보니 슬슬 좀 더 건드리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밖에 나가면 암브로시아라는 이름만 입에 올려도 수많은 관심과 질문이 쏟아졌다.
그들은 그런 관심을 앞으로 클로드가 받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 배알이 뒤틀리고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저 별것도 아닌 어린애 따위는 자기들에 비하면 별거 아니라는 걸 끝없이 깨닫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검술 훈련을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진짜 칼은 들어 봤습니까?”
“나무칼이라면 들어 봤습니다.”
“겨우 나무칼 가지고는 흥이 안 나지.”
루스 네이븐은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다과용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은으로 만들어진 나이프의 날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렇게 작은 칼도 흥이 안 나기는 마찬가지인데……. 그래, 이건 암브로시아 공자 수준에 딱이겠군요.”
루스 네이븐은 그 칼을 가만히 앉아 있는 클로드에게 불쑥 내밀었다.
“한번 휘둘러 보시겠습니까?”
“……나, 나는.”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암브로시아 공자께서는 싫은 것도 참 많습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도리질을 치는 클로드를 보고 킬킬 웃은 루스 네이븐은 강제로 클로드의 팔을 끌어다가 억지로 나이프를 손에 쥐여 주었다.
“내가 친히 봐 줄 테니까 한번 휘둘러 보라고.”
“이얏, 이얏 하면서 말이지요.”
“흐흐. 이건 좀 볼만하겠습니다.”
아르델 파블과 빌리언 유겐 역시 낄낄거리며 나이프를 들고 곤란해하는 클로드의 얼굴을 비웃었다.
그 암브로시아 공자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꼴이 딱 보기 재밌었다.
루스 네이븐은 비릿하게 웃으며 클로드의 팔을 잡아당겨 제 앞에 세웠다.
어디 암브로시아 공자가 제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꼴을 감상해 볼 참이었다.
“어머나?”
하지만 그때, 그들의 머리 위로 까만 그림자와 함께 고운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를 만큼 갑작스러웠다.
루스 네이븐을 포함한 영식들이 화들짝 놀라 위를 바라보았다.
“유모!”
사라를 발견한 클로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크게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죄송해요, 클로드 님. 제가 조금 늦었죠?”
사라는 웃으며 클로드에게 다가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기울이며 시선을 맞추었다.
다정한 목소리, 부드럽게 바라보는 시선, 호의가 가득한 표정.
클로드는 지금 이 순간 유모인 사라가 그 누구보다 자신의 편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악의로 가득 찬 사람들과 그런 클로드의 곤란을 알면서도, 혹은 알려고 하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오직 사라만이 클로드를 올곧게 바라봐 주는 내 편이었다.
“멋진 신사분들이시네요, 저희 클로드 님과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셨나요?”
사라는 루스 네이븐을 포함한 어린 귀족 자제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
그들은 잠시 숨을 참고는 멍하니 사라를 바라보았다.
어린 그들의 눈에도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사라의 모습은 숨이 막힐 것처럼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을 따라 저택에 방문하는 레이디들이나, 황궁에 갔을 때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한 여인들을 수도 없이 많이 봐 왔다.
하지만 사라처럼 무늬가 없는 단정한 예복 차림만으로도 청초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레이디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저 여자는 누구지?’
눈치가 빠른 루스 네이븐은 클로드가 사라를 유모라고 부른 것을 듣고 머릿속으로 상하 관계를 그리기 시작했다.
공작가, 그것도 암브로시아 공작가에서 클로드의 유모를 한다는 것은 보통 신분은 아닐 것이다.
후계자를 맡길 만큼 신뢰가 있는 가신 가문에서 뽑은 사람일 테지만, 후계자가 성장할 때까지 곁을 지키는 것이 유모의 임무이기도 하니 가문에서 적당히 입지가 좁은 사람이 선택되곤 했다.
한마디로 신분만 좋고 힘은 그냥저냥일 것이란 말이었다.
“그대가 우리 클로드 암브로시아 도련님의 유모로군. 처음 보는데?”
머릿속으로 상하 관계에 대한 정리를 끝낸 루스 네이븐의 입술에서 자연스러운 하대가 흘러나왔다.
앞으로 장차 가문을 이끌어 갈 본인과 고작 어린 꼬맹이의 유모를 하는 사라와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여기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