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academy's narrow eye, but i'm not evil RAW novel - Chapter (160)
제160화
160화. 악연(8)
“……내가 구해 내라고?”
“그래, 진짜 영웅이 되는 거다.”
“난 이미 공식으로 인정받은 영웅이거든? 그만한 업적도 이뤘고.”
“너 자신이 인정하지 않고 있잖느냐.”
루시아가 움찔했다. 자기 생각을 들켰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카론은 이랬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귀신처럼 알아차렸다.
마치 머릿속을 엿보기라도 한 것처럼.
“친구도 지키지 못한 주제에 영웅은 무슨…….”
그렇다. 루시아는 스스로를 영웅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제국과 카론의 도움으로 남보다 우월한 스타트라인에서 시작한 탓도 있지만.
‘난 운 좋게 살아남았을 뿐이야.’
친구와 전우의 시체 위에서 만들어진 영웅.
그 칭호를 자랑스럽게 여길 만큼 루시아는 뻔뻔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영웅과는 동떨어진 행동을 시작했다.
임무를 마칠 때마다 최대한 길게 갖는 휴식, 흐트러진 몸가짐, 제국에서 둘째라면 서러운 게으름뱅이가 되기까지.
영웅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행보를 선보였다.
인정할 수 없는 칭호가 스스로 나가떨어지기를 바란 거다.
문제는 대중들이 그런 루시아의 모습조차 인간답다며 찬사를 보냈다는 거?
루시아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영웅이 되라는 개소리는 그만하고 좀 도와줘. 당신이라면 이 지긋지긋한 칭호를 떼어 줄 수 있잖아?”
“안 된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
“방금 말했잖아! 친구와 동료들도 지켜 내지 못한 내가 영웅이라 불리는 건……!”
“그래서 더욱 네가 영웅이 되어야 하는 거다, 루시아.”
고통을 겪고, 아픔을 느끼고, 슬퍼하고.
전쟁으로 인해 망가진 자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이번 전장에서 증명해라. 네가 강해졌다는 걸, 모두를 지켜 낼 준비가 되었다는 걸, 그리고…….”
영웅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카론이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본 루시아가 생각에 잠겼다.
감정적으로 상황을 대하지 말고 논리적, 합리적으로 임해라.
카론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그가 눈을 감았다는 건 충분히 생각을 한 후에 대답하라는 뜻이고.
카론이 루시아를 잘 알고 있듯, 그녀 또한 카론이라는 남자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멀어졌지만, 한때 함께 전장을 누비던 사이이기 때문이다.
‘……영웅이라.’
솔직히 말해 영웅이라는 칭호가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
자신이 가는 곳마다 따스하게 반겨 주고 환영해 주는 건 물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따랐다.
누군가가 자신을 의지한다는 건…… 뭐랄까.
기분을 좋게 해 주는 뭔가가 있다.
말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아무튼 그런 거였다.
‘뭐, 내 스스로 무덤을 판 탓도 있고.’
그렇다. 자신이 ‘만들어진 영웅’이라는 걸 알아차린 루시아.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그때는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영웅이라는 칭호를 떼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영웅’이라는 칭호를 방패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루시드 일가에 걸린 악마의 저주.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젠가 루시드 가문이 악마의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이 알려질 것이고,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 시작될 거다.
그때 영웅이라는 칭호는 훌륭한 방패막이가 된다.
제국을 위해 헌신했다는 증거니까.
어쩌면 가벼운 징계 선에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만들어진 영웅’을 받아들였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델린이가 나를 자랑스러워하니까.’
점잖은 로델린이지만, 주변에서 루시아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면 일장 연설을 시작하곤 했다.
자신이 로델린의 자랑거리라는 뜻이다.
어디에서나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있는 자랑거리.
그러다 보니 영웅이라는 칭호를 버리려야 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만들어진 영웅이라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슬퍼하는 로델린의 모습을 떠올리자, 어쩐지 가슴이 아파진 루시아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루시아.
그런 자신에게 카론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진짜 영웅이 되라면서.
이것은 기회일까, 아니면 비극으로 끝날 악연의 연속일까.
“……증명에 실패하면?”
“그때는 내가 책임지고 영웅이란 칭호를 떼어 내 주마. 물론, 네가 원한다면 말이지만.”
증명에 실패하든 말든, 선택은 자신이 하라는 뜻인가.
이상하리만치 조건이 좋다.
“대가도 없이?”
“……네게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대가를 받는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카론이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다니. 급하긴 급한가 보다.
‘에휴, 모르겠다. 대충 가자. 이번 일이 끝날 때면 뭐든 결론이 나겠지.’
애초에 자신은 생각을 깊이 하는 스타일이 아니니까.
카론의 제안이 노림수든 아니든, 오해로 시작된 악연이 비극으로 끝맺음 맺든.
어떻게든 될 거다.
‘그래도 카론이 지금까지 날 열받게 한 건 분명한 사실이지.’
마음을 정한 덕분일까.
루시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흐응~ 말은 길었지만, 결국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잖아?”
“……그렇다만.”
“그런 것치고는 부탁하는 태도가 아니지 않아? ‘부탁합니다’라고 해야지.”
“…….”
“싫어? 싫음 말고.”
카론이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쪼잔한 복수라니. 그릇이 작아도 너무 작다.
‘충분히 영웅의 그릇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걸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아쉬운 건 자신 쪽이니까.
악연인 루시아를 토벌대에 포함시키고, 본인이 영웅임을 자각시킨다.
그리고 제국의 희망이 된다.
‘부탁합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저 세 가지를 얻어 낼 수 있다면, 엄청나게 싼 대가다.
카론이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중얼거렸다.
“……부탁한다.”
“그게 아니지. ‘합니다’라고 말하라니깐?”
“…….”
시선은 딴 곳을 향하고 있지만, 루시아의 미소가 보이는 듯한 건 어째서일까.
눈앞에 아른거리는 루시아의 의기양양한 미소.
카론이 필사적으로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다.
“부탁…….”
“응응!”
“……거절한다.”
“응?”
“부탁하는 걸 거절하겠다. 취소한다는 말이다.”
“부탁하는 걸 거절한다니! 그건 대체 어느 나라 말이래!? 그리고 취소라니! 이러면 곤란해! 나 진짜 안 간다?”
“오지 마라. 어차피 그 몸뚱이로는 와 봤자 방해일 뿐이니.”
자신에게 향한 카론의 시선.
루시아가 본능적으로 배를 가렸다.
“거길 가린다고 해서 다른 곳이 가려지지는 않을 텐데.”
카론의 시선이 여기저기로 향했다.
얼굴, 팔, 허벅지, 종아리, 당장 터질 것 같은 바지까지.
“이, 이 변태가! 어딜 보는 거야!”
“그 형편없는 몸뚱이는 대체 뭐냐. 항시 전투태세를 유지해야지. 전쟁터에서 배운 교훈을 과자와 바꿔 먹기라도 한 거냐?”
“그, 금방 빼거든! 그리고 이건 다 에너지라고, 에너지!”
“과자로 만든 에너지이니 틀린 말은 아니군.”
“이, 이이이이이! 내가 이래서 당신을 싫어하는 거야!”
카론은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지금 중요한 건 루시아가 토벌대에 합류하기로 했다는 거다.
“걱정 마라. 위험할 때는 구해 줄 테니. 그때처럼.”
함께 싸웠던 전쟁터를 말하는 거다.
카론에게 수백 번은 넘게 도움받은 전장의 기억.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루시아가 입을 삐죽였다.
“당신 몸이나 신경 쓰시지. 기척도 제대로 못 느끼는 것 같던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길 잃은 돼지가 들어왔다고 느꼈으니까. 돼지는 경계할 이유가 없으니 잠에서 깨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야!! 너 진짜 죽을래?”
“요즘 돼지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나? 이거 놀랍군.”
“아오! 됐어! 말 안 해!”
루시아가 발을 쿵쿵 굴렀다.
카론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가려던 와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레스터 가문의 일도 오해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닐까?’
레스터 가문의 가주인 레니아의 목을 들고 온 카론.
그래, 거기에도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처럼.
루시아가 빙글 몸을 돌렸다.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
“……싫다고 해도 물어볼 거 아니냐. 뭐냐.”
“그때 왜 그랬어? 당신이라면 레스터 가문에 죄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거 아니야.”
순간, 카론의 눈동자가 떨렸다.
하지만 아주 조금뿐이었다. 카론이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눌렀기 때문이다.
루시아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떨림.
과연 제국의 시궁쥐라 불릴 만한 감정 억제였다.
“알려고 들지 마라. 레스터 가문에 대해서도 그만 잊도록 하고.”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다칠 테니까.”
“그래도 실추된 레스터 가문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네 가족 또한 피해 갈 수 없다 해도? 그렇다 해도 괜찮겠느냐?”
루시아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속한 루시드 가문은 레스터 가문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레스터 가문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러하겠다 말하겠지만.
루시드 가문은 가족을, 변방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가문.
‘만약, 우리 가문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레스터가의 사람들은 우리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겠지.’
루시드 가문에는 변방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지만, 레스터 가문은 그런 게 없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니냐고?
아니다. 이건 그냥 가문의, 사람의 차이다.
긍지를 중시한 레스터 가문. 한 점 부끄러움이 없던 가문.
루시아는 다시 한번 레스터 가문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다.
“복수는 포기해라. 그건 루시드가의 몫이 아니니.”
“하지만……!”
“레스터 가문 최후의 생존자가 있다. 바로 이 아카데미에.”
“……!”
루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반응하고 말았다.
앞쪽 말이 아닌, 뒤쪽 말에.
그 모습을 확인한 카론이 웃음을 흘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제로에게 뭔가를 듣긴 했나 보군.”
“아닌데?”
“그러시겠지. 생존자가 있다는 건 들었지만, 아카데미에 있다는 건 듣지 못한 모양이군?”
“……젠장.”
카론이 입을 가린 채 쿡쿡 웃었다.
자신에게 보고할 때는 루나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흘리지 않았다고 말한 제로다.
그런데 슬슬 잘만 흘렸다.
덥석 물 수밖에 없는 맛있는 부분만 반절 뚝 잘라서 말이다.
‘가르침을 받는 대가로 사용했을 확률이 높지. 루나를 써먹다니. 건방진 놈 같으니.’
하여튼 음흉하기 짝이 없는 놈이다.
문제는 동시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다.
“그러니 넌 그 아이와 연을 맺어라. 그게 네가 해야 할 일이니.”
“……누군지 알려 줘야 인연을 맺든지 말든지 하지.”
“그건 네가 직접 알아내야지. 아직도 남에게 의지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거냐?”
“치사하긴! 됐어! 내가 알아낸다, 알아낸다고!”
버럭 짜증을 내며 동굴 밖으로 향하던 루시아.
몸을 빙글 돌리더니, 또다시 자신의 앞에 섰다.
“……또 뭐냐.”
“그래서 레니아 님 일은 어떻게 된 건데? 당신이 죽인 거야?”
“……아까 말했잖느냐. 그런 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아닌 거지? 아닌 거 맞지?”
사실을 알려 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을 기세다.
깊은 한숨을 내쉰 카론.
이내 그의 입이 조금씩 열렸다.
“내가 죽인 걸로 해라. 그게 서로에게 편할 테니.”
“안 죽였다는 뜻이네?”
“……아니, 내가 죽인 게 맞다.”
“이 애매모호한 대답은 대체 뭐지? 카론 맞아? 아까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조는 것도 그렇고…… 너 카론 아니지?”
루시아가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매만졌다.
보자 보자 하니 보자기로 보이나 보다.
카론이 폭발하려던 순간이었다.
그의 생각을 눈치챈 루시아가 재빨리 자리를 떴다.
“치사하게 화를 내려 하다니! 두고 보자!”
삼류 악당 같은 대사를 내뱉으면서.
루시아의 기척, 그리고 그 뒤에 있던 또 다른 기척.
두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카론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나도 늙긴 했나 보군.”
아카데미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오랫동안 전장을 떠나있었던 탓일까.
칼 같은 감각이 희미해진 건 물론, 상당히 유순해졌다.
저런 장난을 받아 줄 정도로.
“시대의 흐름은 따라가기 힘들군.”
전장에서 울던 아이가 어느덧 영웅이라는 자리를 눈앞에 두기까지.
아이의 성장은 눈부시기 짝이 없다.
엘레스터의 말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 카론이었다.
그래서일까. 조금 서글퍼졌다.
자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발전 없이 멈춰 있는 사람일 뿐이니까.
‘피곤하군.’
2시간이나 잠을 청했는데도 또다시 피로가 몰려오다니.
확실히 늙긴 늙었나 보다.
‘만약 꿈을 꾼다면…… 아까와 같은 꿈이면 좋겠는데.’
간절히 바란 덕분일까, 아니면 레니아의 이름이 거론되었기 때문일까.
카론은 꿈을 꾸었다.
레니아를 처음 만난.
그날의 기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