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academy's narrow eye, but i'm not evil RAW novel - Chapter (189)
제189화
189화. 스승과 제자(8)
“당장 갈아입으세요! 대체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추태라니! 추억 삼아 오랜만에 입어볼 수도 있는 거 아니니? 그리고 갈아입을 옷도 없는걸!”
“그럼 그냥 다 벗으십시오! 차라리 그편이 덜 창피할 것 같으니까요! 큰언니는 뻔뻔하니 괜찮으시겠지만, 저는 고개를 못 들고 다닐 것 같단 말입니다!”
쿠궁-!
루시아가 마음의 상처를 받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델린이 너! 언니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
“언니가 언니다워야 언니라고 부르지 않을까요?”
“뭐, 뭐라고! 델린이 너 사춘기니? 흑흑! 옛날을 떠올려 델린아.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장난감을 사달라고 칭얼대던 때로 돌아오라고!”
“대,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투닥투닥-.
내 눈앞에서 바보 두 명이 싸우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여파가 나한테까지 미쳤다는 거다.
[루시아를 마음속 깊이 존경하는 누군가가 실망했습니다.] [루시아의 명성치가 18 감소합니다.] [명성치 감소로 인한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오늘 하루 동안 마나 회복 속도 –3.] [현재 루시아의 명성치. 44,930.]‘이런 18 같은!’
감소한 명성치 수치를 얘기한 게 아니다. 진짜 욕을 내뱉은 거지.
그렇지 않은가. 스승이 저지른 잘못을 내가 책임져야 하는 불합리한 시스템이라니.
욕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페널티가 약하다는 거?’
전투를 치를 만한 사건이 없기도 하지만, 기간도 하루뿐. 이 정도는 감내할 수 있는 페널티다.
하지만 만약 스탯이 깎였다면 루시아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쳤을지도 모른다.
‘……미래가 걱정되는군.’
유모가 은근슬쩍 접근하더니, 내 귓가에 속삭였다.
“후후후후! 어떠십니까, 제로 군. 저의 제복 작전. 마음에 쏙 드시죠?”
“…….”
유모의 제복 작전.
이게 통한 이유는 간단하다. 루시아가 ‘허당’이기 때문이다.
밥을 먹기 위해서 유모의 부탁을 들어준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허당 루시아가 아니었다면 씨알도 안 먹혔을 작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게 내가 미래를 걱정하는 이유였다.
‘젠장! 하필이면 첫 번째 제자가 되어서……!’
내가 없는 곳에서 루시아가 어떤 허당 같은 짓을 저지를지. 그로 인해 어떤 페널티가 내게 부과될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만약 사천왕이나 군단장과의 전투 중에 루시아의 이상한 행동으로 페널티를 받는다?
죽기 딱 좋았다.
“제로 군, 어떤가요. 집 있고, 돈 많고, 밥 잘 사주고, 여기저기 빵빵하고, 남편을 위해서라면 저런 귀여운 머리와 의상을 입어주기까지!”
“…….”
“이 모든 걸 단돈 0원에! 계약서만 작성하신다면 바로 가져가실 수 있답니다!”
뭐지. 홈쇼핑인가?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밥 잘 사주는 누나라…… 이건 좀 좋을지도?
“겨, 결혼을 위해서 그런 옷까지 입으신 겁니까? 이, 이런 천박한!”
“아니야! 난 몰랐다고! 그냥 유모가 밥 먹고 싶으면 입으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후후후, 제로 군! 저런 말은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걸요? 자, 서명만 하면 됩니다. 바로 이곳에요!”
계약서를 들이미는 유모의 눈이 반짝거리는 걸 넘어 번쩍거렸다.
계약서를 손에 들자 루시아, 유모, 로델린. 세 사람의 눈빛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내 선택은…….
“거절하겠습니다.”
‘아깝다’라는 표정을 짓는 유모와 살짝 충격을 받고 비틀거리는 루시아, 어딘지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로델린까지.
“저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한테도 차이다니……. 어린애면 보통 ‘크면 누나랑 꼭 결혼할 거예요’라고 말해 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역시 이번 생에 결혼과는 인연이 없는 걸까…….”
“불쌍한 우리 아가씨…… 저랑 평생 같이 사실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봐요…….”
중얼중얼.
갑자기 머리를 맞댄 채 절망 모드로 들어간 루시아와 유모.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 ‘크면 누나랑 꼭 결혼할 거예요’라니. 내가 무슨 다섯 살 난 아이도 아니고!
그리고 애초에 내가 루시아를 거절한 이유는 루시아가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최종 보스를 깨는 게 내 목표인데, 루시아한테 묶여있을 수는 없지.’
이게 게임이었다면 여기서 서명을 하고, 루시아와의 결혼 루트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조금 허당이긴 해도 루시아는 엄청나게 매력적인 여자니까.
‘숨겨진 스토리를 보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그랬다간 루시아에게 묶여 성장이 정체될 확률이 높다.
‘물론 루시아 쪽 세력과 인연을 맺고 폭발적인 성장을 노릴 수도 있지만…….’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루트라는 게 문제였다.
루시아는 아니지만, 비슷한 세력의 캐릭터와 결혼을 하는 루트는 스무 가지 정도 공개가 된 상태인데 생각보다 걸림돌이 많다.
세력 싸움, 외교, 강자와의 전투, 암살의 위협까지.
목숨이 하나뿐인 지금 그런 도박을 할 수는 없다.
‘루시아와의 결혼 루트는 이 게임을 클리어한 후, 다 회차 플레이에서 즐겨도 충분해.’
그래서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은 거지, 루시아가 매력이 없어서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밝힐 수는 없는 상황.
‘문제는 나에 대한 루시아의 호감도가 떨어져도 곤란하다는 건데…….’
루시아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주기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껏 엮어놓은 인연을 날릴 수는 없는 법. 절망에 빠진 루시아와 유모를 향해 말했다.
“루시아 님을 사고파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루시아 님은 물건이 아니니까요.”
“……!”
유모가 날 듯이 달려오더니 내 손을 양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인성까지 훌륭하다니! 역시 아가씨는 제로 군의 소유가 되어야……!”
“유모! 애들 앞에서 그게 무슨 소리야!”
“가기 전에 기정사실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아가씨, 당장…… 읍읍!”
하지만 유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루시아가 유모를 꽁꽁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유모의 입을 틀어막는 데 성공한 루시아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 냈다.
“어휴, 정말이지. 조금도 방심할 수가 없다니깐?”
“후후, 당한 쪽이 바보인 건 아닐까요? 스승님?”
“히이이이익!!”
루시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경멸 어린 표정은 덤.
갑자기 나한테 왜 저런 포상(?)을 주는 걸까?
“그냥 이전처럼 루시아 님이라고 불러. 스승님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직 늙지 않았거든?”
그렇구나. ‘스승님’이라는 단어에 익숙지 않아서 그런 거였구나?
뭐, 나야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루시아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니까.
그때였다. 루나와 레제가 다가와 곤란하다는 듯 물었다.
“그렇게 부르는 게 편하신가요? 맞는 말이긴 해요. 루시아 님이 늙은 나이는 아니니까요.”
“귀염둥이 내 제자들! 어제는 잘 들어갔니?”
루시아가 둘을 와락 끌어안았다.
음, 뭔가 대하는 게 다른 것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너희 둘은 스승님이라고 부르렴. 안 되는 건 저놈만이야.”
……그렇구나. 착각이 아니라 진짜로 차별을 하는 거였구나?
스승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니.
판타지 세계에도 홍길동이 존재한단 말인가!
뭐, 됐다. ‘스승님’이라는 호칭은 놀려먹을 때 써먹으면 되니까.
“다행이에요. 그나저나 놀랐어요. 저희를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해 주실 줄은…….”
“응?”
“저희와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제복을 입으신 것 아닌가요?”
루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래도 조금 전 우리가 나눴던 대화를 못 들은 모양이다.
거리가 멀어서인지, 아니면 눈치가 없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그럼, 그럼! 조금이라도 빨리 친해지려고 그런 거지. 아하하……!”
루시아가 필사적으로 내게 신호를 보냈다.
자신의 말에 호응해달라는 신호다.
“후후, 루나 양. 당연한 거 아닙니까? 루시아 님이 무슨 변태도 아니고 말이죠.”
“말에 뼈가 있다?”
루시아가 불평을 토했다.
도와주려는 사람에게 불평을 토하다니.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아공간]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단단하고 묵직한 그것.사진기다.
“후후, 오늘은 루시아 님이 떠나는 날이죠. 기념사진 한 장 찍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 사진을?”
루시아가 치마를 잡고 내리려 애썼다.
제복 사진을, 그것도 한껏 줄인 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제국에 떠돈다면 얼굴을 들고 살아갈 수 없을 거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일까. 루시아가 도움을 청했다.
이 시대의 지성인이자, 앤우드 아카데미의 권력자, 그녀의 동생인.
로델린에게.
루시아의 시선을 마주한 로델린이 싱긋 웃음을 흘렸다.
“제로 군, 허락 없는 촬영은 범죄라네.”
하지만 그 표정이 악귀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승인하도록 하지. 앤우드 아카데미의 부학생회장, 로델린 드 루시드의 이름으로 말이야.”
“델린아아아아악!!”
루시아가 절규했지만 흐름을 바꿀 수는 없었다.
찰칵-.
나, 루나, 레제, 로델린, 짧은 제복을 입은 루시아까지.
그렇게 루시아의 흑역사가, 또 하나의 추억이 내 사진기에 기록됐다.
“스승님, 왜 그러세요?”
“저, 정신 차리세요오…….”
혼이 나간 채 쓰러진 루시아를 아이들이 위로했다.
영문을 모르니 위로가 될 리 없었지만 말이다.
“제로 군.”
그 사이, 로델린이 슬쩍 내 곁에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후후, 무슨 일이십니까?”
“음…… 그게 말이지.”
로델린이 입을 우물거렸다. 의외의 모습이었다.
당당하고 당찬 사람. 그게 바로 로델린이었으니까.
“방금 그 사진을 한 장 복사해줄 수 있겠나?”
멋쩍은 듯 내뱉은 말.
나는 알 수 있었다. 로델린이 사진을 갖고 싶어 하는 건, 루시아를 협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루시아와의 추억을 보관하고 싶은 모양이네.’
즉각 사진기를 조작해 복사본을 한 장 내어줬다.
사진 속 부끄러워하는 루시아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함께 서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로델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후후, 다음에는 선배님도 저렇게 입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만.”
“제복을 줄이는 건 교칙 위반일세.”
“그런가요? 그럼 예전에 선배님이 하셨던 행동은…….”
“우, 우와아아앗! 그, 그만!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로델린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학기 초에 치마를 1cm 줄인 로델린이다.
물론, 그 사실을 아는 건 내가 유일했다. 워낙 미미한 변화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도 느꼈지만, 제로 군은 참 눈썰미가 좋군.”
‘그때’가 아니라, ‘그때도’라? 그렇다면…….
“지금도 여전히 줄인 상태라는 뜻이군요.”
“뭐, 뭐야! 알고 있던 게……!”
로델린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이건 나도 예상치 못했다.
‘일탈하는 걸 들켰으니, 로델린의 성격상 곧바로 바꿀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미 들켰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들켰어도 예뻐 보이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 걸까.
어느 쪽이든 귀엽기 짝이 없었다.
“후후, 더 줄이셔도 괜찮습니다만.”
“다, 다시 복구시킬 거다! 이, 이런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거란 말이다!”
곤란하다. 로델린의 일탈 아닌 일탈을 나 때문에 못 하게 할 수는 없다.
자신이 어른인 양, 군인인 양 행동하는 게 바로 로델린이란 캐릭터다.
그런 상황에서 마주한 사춘기. 예뻐 보이고 싶다는 욕망과 군인이라는 자아가 충돌하게 되고.
치마를 티 안 나게 줄이는 일탈을 저지르게 된 거다.
‘즉, 달리 말하면…….’
1cm 줄인 치마는 로델린에게 그나마 주어진 ‘여유’이자, ‘아이다운 모습’을 상징한다.
그런 상징을 내 손으로 없앨 수는 없다.
이렇게 된 이상…….
“1cm 더 줄이겠다고 약속하신다면, 이 일은 비밀로 해드리겠습니다.”
“뭐, 뭐라고!?”
그렇다. 이게 바로 내가 한 선택이다.
1cm에 불과했던 여유를, 아이다운 모습을 2cm로 늘려주는 거다.
설사 내가 변태로 몰린다고 할지라도!
“그, 그건 곤란하네만.”
“괜찮습니다.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저만 빼고 말이죠.”
“……협박인가?”
아니, 이건 협박이 아니라 비밀이다. 선후배의.
“은밀한 비밀이죠.”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는 걸까, 아니면 포기를 선언한 걸까.
로델린이 고개를 푹 떨궜다.
“……어쩔 수 없군.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제로 군이니 믿겠네.”
“후후, 물론입니다.”
그렇게 로델린과의 은밀한 비밀을 구축한 때였다.
훈련장에 걸린 시계를 보던 로델린이 소리쳤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3구역 순찰을 돌 시간이로군.”
로델린이 상의 재킷을 벗더니, 좌절하고 있는 루시아의 허리춤에 묶기 시작했다.
“날이 쌀쌀합니다.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우우……! 역시 나를 챙겨 주는 건 우리 귀여운 델린이밖에 없구나!”
“구, 군인은 귀엽지 않습니다!”
루시아가 로델린을 꼭 끌어안았다.
잠시 손을 헤매던 로델린도 이내 그녀를 마주 안아주었다.
“조심히 가십시오.”
“방학 때 보자꾸나, 우리 귀염둥이. 말투는 귀엽게 바꿨으면 좋겠네.”
“……군인의 말투는 귀여우면 안 됩니다.”
그렇게 로델린이 떠났다.
보통 이런 날은 루시아를 배웅해 줘도 괜찮을 텐데 꿋꿋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다니.
로델린다운 이별이다.
이제는 우리와 루시아가 이별의 순간을 가질 차례.
제복을 입은 루시아에게 물었다.
“흐음, 그래서 그 모습을 보여 주시기 위해 여기 오신 겁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빠악!!
루시아가 내 정수리를 내리쳤다.
A등급 판정을 받는 [반사신경]조차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다.
‘……쪽지 시험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군.’
제법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6성 기사급은 이기지 못하고, 8성 기사인 루시아의 공격은 보이지도 않는 수준.
그게 현재 나의 위치였다.
“어휴, 이런 놈이 제자라니. 내가 놀러 온 줄 아니? 다 너희를 위해서라고.”
“저희를 위해서요?”
“그래, 제자인 너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함도 있지만…….”
루시아의 시선이 레제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시선을 받은 레제가 몸을 움찔 떨었다.
“우리 레제의 수련이 마지막 단계만 남겨둔 상태거든.”
아무래도 우리 토끼가.
진화를 하려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