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academy's narrow eye, but i'm not evil RAW novel - Chapter (24)
제24화
24화. 광대와 영웅, 그리고 앵무새(6)
로델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저 비밀은 루시드 가문 사람들만 알고 있는 비밀이니까.
뭐…… 사실 저주가 아닌 ‘다른 것’이지만, 그걸 로델린에게 말해 줄 이유는 없었다.
“이런, 너무 놀라신 거 아닙니까? 그냥 던져 본 말이었는데요. 설마 루시드 일가가 진짜로 악마의 저주에 걸리기라도 한 겁니까?”
“……!”
로델린이 부들부들 떨었다.
일단 던져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핀다.
그리고 그때 보여 준 반응을 통해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아낸다.
마치 한국의 기레기와도 같은 행동이랄까.
‘귀족 자제가 평정심을 유지하는 훈련을 받는 이유지.’
자신의 섣부른 언행으로 가문에 피해가 갈 수도 있으니까.
로델린은 지금 자신이 당했다고 생각할 거다.
물론, 게이머인 나는 저주의 진실을 알고 있지만.
“……악마의 저주라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랬을 뿐이다.”
“그렇군요. 제 착각. 일단은 그걸로 해 두겠습니다.”
“바빠서 이만 가 봐야겠군. 제로 군, 주말에 보도록 하지.”
“예, 조심히 가십시오.”
로델린이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괜한 짓을 해서 사이가 나빠진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게 맞아.’
나를 수상하게 여기는 관계가, 조금 거리를 두는 애매한 관계가 좋다.
로델린은 1파티의 멤버니까.
이번 공략을 위해 잠깐만 손을 빌릴 뿐이다.
그러니 이런 적당한 관계가 좋았다.
“쯧, 이제 선배도 괴롭히네? 너 그러다 큰일 난다.”
“후후, 루나 양은 걱정 안 되십니까?”
“뭐가?”
“제가 바쁘게 돌아다닌 이유를 들으셨지 않습니까. 악마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굉장히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이죠.”
루나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모습이 마치 병아리 같다. 분홍 병아리.
“……상관없어. 제국을 수호하는 것도 귀족의 역할 중 하나니까. 악마가 나오면 싸워야지. 그리고.”
그리고?
“내가 아니면 누가 너를 지켜 주냐? 기술을 쓰면 흔적이 남는다면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게.”
이번에는 내 쪽에서 루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다고?
우리 루나가 언제 이렇게 컸는지.
이래서 부모들이 애를 키우는 건가 싶다.
“뭐, 뭐야? 왜 그렇게 보는데?”
“후후, 루나 양…… 저 진짜 감동받았습니다.”
“돼, 됐고, 맛있는 거나 사.”
얼굴을 살짝 붉힌 루나가 총총 앞으로 뛰어갔다.
먹을 거를 사라고?
그래, 뭐. 딸(?)이 정신적으로 성장했으니까.
오늘은 기쁘게 지출해 줘야겠다.
그런데 뭘까. 이 싱숭생숭한 기분은.
“후후, 뭔가를 까먹은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는군요.”
나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루나가…….
광장에서 빌렸던 2실버를 아직도 안 갚았다는 걸!
* * *
주말이 하루 남은 금요일.
대마법사 엘레스터의 수업이 한창 진행되던 때였다.
허공에 둥둥 떠오른 분필이 칠판에 무언가를 적었다.
침식.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 변경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기괴한 현상이죠.”
검붉게 물든 땅.
물이 메마르고 땅이 갈라지며, 식물이 자라나지 못한다.
건축물도 조금씩 부식되다 무너졌으며, 생명체도 이를 피할 수 없다.
그 무엇도 살 수 없는 땅.
죽음의 땅이라 불리기 충분했다.
풍토병은 아니다. 그와 다른 ‘무언가’지.
“침식의 무서운 점은 뭘까요?”
“점차 반경을 넓혀 나간다는 겁니다. 마치 생물체가 성장하는 것처럼요.”
“테르온 군, 훌륭합니다.”
“마수가 강해지기도 하지만, 활동에 제약이 걸리는 것도 문제입니다. 침식 3단계 이상부터는 마나와 오러 운용에 문제가 생기니까요.”
“유리디아 양도 훌륭합니다.”
엘레스터가 그들을 칭찬했다.
수석과 차석.
테르온파와 유리디아파의 대표자들.
파지직-.
두 아이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 사이에 있는 아이들은 죽을 맛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침식은 단순히 제국만의 문제가 아니게 됐습니다. 왕국과 공국, 성국 등, 대륙의 공통된 문제가 됐죠. 제국에 가장 최근 침식이 등장한 곳은 어딜까요?”
“경제도시 파스칼입니다!”
“경제도시 파스칼이에요!”
“맞습니다. 둘 다 훌륭하군요.”
엘레스터가 그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 경쟁이 즐겁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뭐, 그럴 만하지.’
지금은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야말로 귀족회의에서 잔뼈가 굵은 인간.
‘제국의 너구리’라 불리는 사람이었으니까.
“침식은 악마의 장난이라고도 불리곤 하죠. 실제로 침식된 곳에서 악마가 출현한 적도 있었고……. 그렇다면 이런 무시무시한 침식을 최초로 막아 낸 가문은…….”
“루시드 가문입니다!”
“루시드가예요!”
루시드 가문.
제국의 여덟 기둥 중 하나이자, 부학생회장인 로델린의 가문이다.
동시에.
‘처음으로 침식을 마주한 가문이기도 하지.’
대대로 북쪽의 변경을 수호해 온 루시드 가문.
120년간 전쟁에서 져 본 적이 없는 가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침식.
그와 동시에 시작된 마수들의 습격.
최대한 버텼지만, 루시드 가문은 결국 후퇴를 택했다.
그렇게 첫 전투에서 3개의 성, 그리고 지도상 반 뼘이나 되는 땅을 빼앗기게 된다.
단 두 글자에 불과한 패배라는 글자. 하지만 여파는 작지 않았다.
무려 120년 만에 맞이한 첫 패배였으니까.
평소라면 변경을 수호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반대파가 길길이 날뛰었겠지만, 루시드 가문에 패전의 책임을 묻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앞으로 우리가 한 번이라도 더 물러선다면, 루시드가의 무덤은 바로 저 땅이 될 것이오.”
당대이자 현 루시드가의 가주인 루크 드 루시드가 황제를 알현했을 때 한 말이다.
귀족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치뻗은 산발.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 몇 번을 짓씹었는지 걸레짝이 된 입술.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의 모습에 반대파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루시드가의 가주 루크는 그 상태에서 맹세를 했다.
한 번 더 물러설 바에는 모두가 그곳에서 죽겠다. 예외는 없다.
설령 그게.
가문의 피붙이라 할지라도.
그 맹세를 증명하겠다는 듯, 루시드 가문은 그 뒤로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른 왕국들의 변경이 박살 나며 영토가 줄어드는 동안, 제국의 토지는 하나도 줄지 않았다.
그 뒤로 단 한 번의 패배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현재 제국에서 루시드가의 명성이 가장 높은 이유지.’
그런데 그 침식의 프로토타입으로 보이는 걸 찾아냈다?
로델린으로서는 절대 웃어넘길 수 없을 것이다.
단 한 번의 패배, 잃어버린 반 뼘의 땅.
그게 루시드 가문의 유일한 치부이자 굴욕이니까.
“현재 부학생회장 직을 맡고 있는 로델린 양의 가문이기도 하죠. 아주 훌륭한 학생이더군요.”
엘레스터가 단상에 양손을 짚었다.
“침식이 문제긴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문제도 많습니다. 우리 제국이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개발과 상업을 통한 발전, 새로운 먹거리, 대륙 통일도 생각해 볼 만한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제국이 역대급으로 강력한 힘을 보유한 시기! 이런 때야말로 제도를 보수하고 인재를 육성, 내실을 다지며 먼 미래를 봐야 합니다!”
처음으로 둘의 의견이 갈렸다.
동시에 반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아슬아슬하게 얼어 있던 살얼음에 금이 쩌저적 간 느낌이랄까.
엘레스터가 들어 주는 손에 따라, 다른 한쪽은 지옥의 화풀이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꿀꺽.
모두가 엘레스터의 입을 주시하던 때였다.
그가 점잖은 미소를 짓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제로 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예?”
“자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에 상점 1점을 주도록 하겠네.”
“……?”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테르온과 유리디아의 매서운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아니, 대체.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냐고!
‘내 쪽이 옳다고 말해!’
‘제 쪽이 옳다고 말하세요!’
테르온과 유리디아가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눈빛만으로 말을 전달할 수 있다니. 대단한 아이들이다.
‘젠장.’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걸까. 이 정도면 억까다.
나는 그저 우수반에 입학하고.
굴러다니는 히든 피스 좀 줍고.
배를 곯는 애들 좀 주워다가 방패로 쓰고.
최종 보스를 클리어하고 싶었을 뿐인데!
왜 저 둘의 견제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진짜 억울했다.
“어느 쪽이 옳다고 생각하나? 천천히 생각해서 잘 말해 보게.”
엘레스터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한 말이다.
그런 배려는 필요 없는데 말이다.
나를 바라보는 테르온과 유리디아의 눈빛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사실 내게 접근한 건 테르온파뿐만이 아니다.
유리디아 쪽에서도 접촉이 있었다.
입학시험 비공식 3위를 기록한 나다.
학기 초의 세력 구도에서 우위를 점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졌다는 뜻이다.
‘하지만 테르온파와 유리디아파, 어디에도 속하면 안 돼.’
테르온은 초중반 빌런 역할을 맡는 제법 비중 있는 조연이다.
나중에는 주인공 무리에게 털릴 예정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패스.
유리디아는 주인공이자, 아카데미의 다섯 손가락 중 하나가 될 몸이다.
1파티 멤버라는 뜻이다. 그런 존재와 가까워질 수는 없다.
스토리가 배배 꼬일 테니까.
하지만 양쪽 다 영입 의사를 밝힌 상태.
지금의 대답 한 번으로 내가 자기 쪽에 속한 사람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그건 반대 측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어느 쪽 편도 들어 주지 않는다.’
[신의 모방]을 얻는 건 내일이다.당장 오늘 반죽음을 당할 수도 있지만, 루나를 고기 방패…….
아니, 옆에 세워 둔다면 하루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엘레스터.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후후, 별생각 없습니다만.”
“……저, 저런 무엄한!”
“……!”
아이들의 얼굴이 모두 경악으로 물들었다.
대마법사 엘레스터 앞에서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말하다니.
솔직히 말하면, 대답한 나도 놀랐다.
난 ‘저는 잘 모르겠네요. 별생각 없습니다’라고 말하려 했으니까.
[오그라드는 말투] 스킬이 미치는 힘이 너무 강했다.나를 포함한 모두는 엘레스터가 경을 칠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 건방진 대답이었으니까.
하지만.
짝짝짝.
엘레스터는 박수를 쳤다. 그것도 아주 호탕하게 웃으면서.
“하하하! 바로 저게 정답에 가까운 해답입니다. 제로 군, 아주아주 훌륭하군요.”
박수와 함께 터져 나온 극찬.
나를 포함한 모두의 의문을 풀어 주겠다는 듯, 엘레스터가 입을 열었다.
“저게 바로 일반적인 평민의 생각입니다. 평민이란 계급은 무려 제국의 60%를 차지하는, 제국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계층이죠.”
예?
“그중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의 숫자는 무려 50%. 둘 중 한 명이 저축은커녕 그날 먹을거리를 고민하느라 바쁘다는 뜻입니다.”
아니…….
“그런 그들이 방금 테르온 군과 유리디아 양이 한 말을 들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뜬구름 잡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겁니다.”
저기요? 할아버지, 제 말 안 들리시나요?
“그들에게는 경제 발전도, 대륙 통일도, 먼 미래를 봐야 한다는 것도 다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지금 저 둘이 한 말들은…….”
쿵!
“X랄 옆차기를 하는 개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먹으로 교탁을 내리침과 동시에 내뱉은 욕설.
아이들이 숙연해지기에 충분했다.
그런 우리들을 향해 엘레스터가 싱긋 웃었다.
“제로 군은 이걸 다 생각해서 별생각이 없다고 말한 거겠지. 그렇지 않나?”
“예…… 뭐…….”
그냥 그런 걸로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