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academy's narrow eye, but i'm not evil RAW novel - Chapter (34)
제34화
34화. 광대와 영웅, 그리고 앵무새(16)
로델린이었다.
여기저기 옷에 구멍이 났다. 스타킹은 벗는 게 나아 보일 정도고.
아공간에서 외투를 한 벌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고맙네.”
로델린의 허벅지까지 가릴 정도로 큼직한 외투.
그녀가 외투의 단추를 끝까지 채워 올렸다.
“상처는 내가 치료해 놨다네. 출구는 저쪽에 있더군.”
“후후, 괜찮으십니까?”
“진짜 침식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었다. 자네 말대로 프로토타입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군. 실험실로 보이는 곳도 저기 있었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런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로델린이 입을 열었다.
“제로 군, 잠시 저쪽으로 같이 가 주지 않겠나? 의논할 게 있어서 말이야.”
그런 것치고는 눈에 깃든 감정이 묘한데.
설마 고백인가?
내가 매력적인 남자지만 그건 좀 곤란한데 말이지.
로델린이 날 끌고 간 곳은 악마의 편린이 죽어 있는 곳이었다.
음, 반으로 예쁘게 잘 갈려 있다.
갈라진 건 이놈뿐만이 아니었다.
땅도 반으로 쩍 갈라져 있었다.
‘이게 하늘 가르기인가. 루시드 가문 최고의 기술이라 불릴 만하군.’
잠재력 도박 중 [하늘 가르기]가 나온다면 최종 보스 이전까지는 다른 공격 스킬이 필요 없을 정도다.
정보창으로 확인한 결과, 로델린의 가문 검술은 C급.
C급에 불과한 [하늘 가르기]가 이 수준이니, S급은 두말할 것도 없다.
‘에피소드5 이후에나 해금되는 하늘 가르기가 여기서 펼쳐질 줄은 몰랐지만.’
“대단한 위력이군요. 왜 처음부터 쓰지 않으신 겁니까?”
“컨트롤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눈동냥으로 배운 기술인 데다…… 허락도 받지 못했으니까.”
로델린의 팔과 다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확실히 부담이 큰 기술이긴 한가 보다.
‘참, 깜빡할 뻔했군.’
악마의 편린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투명 슬라임에게 얻은 히든 피스. [포식]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악마의 편린이 갖고 있던 스킬은 [공간 장악], [침식], [마계술], 그리고 [부식].
운이 좋게도, 모두 쓸 만한 스킬들뿐이다.
이번에는 어떤 스킬을 얻을 수 있을까?
[포식의 힘으로 ‘공간 장악’ 스킬을 획득합니다. 등급이 F로 낮춰집니다.]‘나쁘지 않네.’
스탯이 뻥튀기되고, 다른 스킬의 효율과 위력이 증가하는 스킬.
F급이라 장악할 수 있는 공간이 좁고, 효율도 좋은 편은 아니지만.
미래를 보는 나에게 있어 나쁘지 않은 스킬이었다.
기분 좋게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스릉-.
내 목에 시퍼런 칼날이 닿았다.
로델린의 검이다. 나는 자연스레 양손을 하늘 위로 올렸다.
“지금 뭘 한 거냐?”
“……무슨 말씀이신지?”
“방금 악마의 사체에 뭔 짓을 하지 않았느냐. 다 봤다. 검은 파편이 네 몸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포식]에 이펙트가 있었나?아니면 악마에게서 스킬을 빼앗을 때의 고유 효과인가?
물론,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후후, 비밀이랍니다.”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마라. 애초에 처음부터 수상한 것투성이였지.”
“어떤 것 말입니까?”
“순식간에 풀어내는 악마의 시험도 그렇지만, 이놈과 나눴던 대화가 너무 자연스러웠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마치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말이야.”
전투 직전 악마의 편린과 나눴던 대화.
그걸 말하는 것이리라.
“후후, 정보를 빼내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분’이라는 지칭어를 썼지 않느냐. 그건 둘이 아는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지.”
“침식의 프로토타입이라는 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뜻이죠. 그래서 그분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글쎄. 그런 것치고는 많이 친해 보이던데. 한순간에 전략을 제시하는 것도 그렇고, 나를 끌어들이는 과정도 그렇고. 네놈…….”
로델린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대체 정체가 뭐냐?”
로델린의 눈빛과 기세가 제법 단단하다.
‘이게 나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인가.’
고백이 아니었다니. 아쉬우면서도 다행이다.
까딱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 위기지만, 긴장은 되지 않았다.
로델린을 설득하는 건…… 아니.
‘속여 넘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로델린을 설득하려면 논리도 중요하지만, 감정적인 설득이 더 중요하다.
대표적인 외강내유의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후후, 선배님.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나를 마치 동물처럼, 동물원에 놀러 온 사람들처럼 멀리서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
로델린도 그걸 똑똑히 봤을 것이다.
“모두가 당신 같지는 않습니다. 이따위 외모로 살다 보면 여러 일을 겪기 마련이죠.”
“…….”
“악마가 제게 친근함을 표시하는 것도 여러 일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친한 척을 하며 방심을 유도한 겁니다.”
“하! 살면서 많은 악마를 만났다는 고백처럼 들리는데?”
“예, 맞습니다. 수많은 악마들이 저를 유혹했죠. 외모만으로 차별하는 저 버러지 같은 인간들을 죽이자고!”
로델린이 움찔했다.
내가 소리친 탓도 조금은 있지만, 악마와의 만남과 대화, 거래는 화형당하기 충분한 사유이기 때문이다.
악마와의 만남을 고백했으니, 로델린은 내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상태가 됐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쾌재를 불렀겠지만, 로델린은 그 반대다.
부담스러울 거다. 당장 놓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악마어와 악마의 장난을 쉽게 풀 수 있었던 겁니다. 악마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짠 것도 같은 이유고요.”
“믿을 수 없다. 지금까지 악마와 여러 번 조우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악마에게 회유를 당해 대륙에 혼란을 가져왔지.
그 사실을 떠올린 것일까. 로델린의 검에 힘이 들어갔다.
악마란 존재는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에 생긴 빈틈을 파고드는 존재들.
그런 악마를 자주 마주했다는 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악마의 흔적을 발견해 조사를 하고 싶다고 알린 게 누굽니까?”
“……너지.”
“악마의 편린에게 정보를 빼내고, 죽이는 데 협력한 건 누굽니까?”
“……너지.”
“마지막 순간, 모든 공격을 몸으로 받아 내며 기회를 준 건 누굽니까?”
“……너다.”
“그런데도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악마가 제게 친근감을 품었다는 이유로?”
한 발짝 크게 다가갔다.
목에서 흐른 피가 검을 타고 흘러내렸다.
로델린이 움찔 몸을 떨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악마를 혐오하는 건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로델린.
“…….”
침묵했지만, 로델린에게는 그렇게 들렸을 거다.
마음이 약한 그녀이기에 충분히 설득됐을 것이고.
애초에 한 발자국 물러난 시점에서 끝났다.
철컥-.
깔끔한 납검.
자신의 패배를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방금 제가 했던 건 조사의 일환입니다. 악마의 사체는 큰 도움이 되거든요.”
“……허울 좋은 변명이로군.”
호감도가 많이 깎였겠지만, 상관없다.
수상쩍은 놈과 부학생회장. 우리의 관계는 그 정도가 딱 좋으니까.
머릿속이 복잡하다는 듯, 로델린이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당장은 판단이 어렵군. 처분은 잠시 유보하도록 하겠다.”
“그것참 영광이군요.”
“비꼬지 마라. 그리고 악마와 여러 번 마주했다는 허언은 그만두도록.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바로 잡혀갔을 거다.”
일단 못 들은 걸로 해 두겠다는 걸까?
로델린이 포션을 꺼내더니, 손수건에 묻혀 내 목에 갖다 댔다.
“내가 항상 주시하고 있다는 걸 명심하도록.”
말과 달리, 눈동자에는 미안한 감정이 잔뜩 서려 있다.
호감도가 깎이긴 했지만, 그렇게 많이 깎이진 않은 모양이다.
‘내게 관심을 꺼야 활동이 편해지는데 말이지.’
앞으로 어떤 사고(?)를 쳐야 호감도를 깎을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두근두근하다.
‘고백이라도 박아야 하나?’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할 때였다.
“제로! 이쪽으로 와 봐! 앵무가 이상해!”
저 멀리서 루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달려가 보니, 깨어난 건 루나뿐만이 아니었다.
레이몬도 앵무새의 주변을 빙빙 돌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제로! 빨리 와 봐! 앵무가…… 앵무가!”
“루나 양, 진정하십시오. 그리고 앵무라니. 대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앵무 말이야! 내 친구!!”
루나가 버럭 소리 질렀다.
벌써 애칭까지 만들어 준 모양이다. 앵무새한테 앵무라니.
네이밍 센스가 영 별로다.
“어떻게 좀 해 봐! 앵무가 아파하잖아!”
그새 추억이 쌓인 걸까. 눈물까지 뚝뚝 흘린다.
조심스레 앵무새의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미 치료는 다 끝난 상태야.’
내 목을 매만졌다.
조금 전 로델린이 내 목에 냈던 상처.
피가 흐를 정도로 깊게 베였지만, 아주 깨끗하게 아물어 있었다.
상급 포션 이상의 것을 사용한 것일 터.
로델린의 성격상, 앵무새에게도 같은 걸 사용했을 확률이 높다.
즉, 앵무새의 상태가 좋지 않은 이유는 단순한 부상 탓이 아니라는 거다.
노화, 물리적 충격으로 인한 스트레스, 복수라는 삶의 목표를 달성한 데에서 오는 탈력감.
이 모든 것이 겹쳐진 여파다.
그도 아니면.
‘이게 앵무새에게 주어진 역할이기 때문이겠지.’
사실 이쪽일 확률이 가장 높았다.
스토리를 감동적으로 끝맺기 위한 개발자의 농간.
“친구…… 친구…….”
앵무새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대답한 건 내가 아니었다.
루나가 나를 홱 밀치며 말했다.
“그래, 앵무야! 흑흑…… 나 여기 있어!”
“…….”
앵무새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홱 꺾었다.
죽음이 머지않은 상황에서도 루나를 친구로 인정할 수 없다는 저 기개를 보라.
석상이라도 하나 세워 줘야 할 기세다.
“앵무우우우우야!!”
물론, 루나에게는 턱도 없었다.
앵무새를 안아 든 그녀가 마구 얼굴을 비비며 눈물을 흘렸다.
저러다 더 빨리 죽지 않을까 싶다.
“루나 양, 진정하세요. 그러다 큰일 나겠습니다.”
“친구가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진정해!”
“……앵무 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말이죠.”
“뭐?”
루나가 눈을 부릅뜨더니, 그 상태 그대로 앵무새를 바라봤다.
저 말이 진짜냐는 듯이.
“…….”
앵무새가 아픈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루나가 중얼거렸다.
“안 되겠어. 직접 물어봐야지.”
“……직접이요? 누구한테 물어본다는 겁니까?”
“하데스라도 만나서 물어봐야지.”
죽음의 신을?
만나기도 힘들겠지만, 만나려는 이유가 ‘앵무새가 저를 친구로 생각했나요?’를 물어보기 위해서?
진짜 제정신이 아니다.
“……만나서 뭘 하실 건데요?”
“앵무를 되살려 달라고 해야지. 거부하면 목을 따 버리고.”
아하, 그러시구나?
그러면 앵무를 되살릴 수 있구나?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니?
“앵무가 나를 친구로 생각 안 할 리가 없어! 나를 지켜 준 아이라고!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아니, 앵무새가 지켜 준 건 네가 아니라 나거든?
네 머릿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니?
“보내 줄 때는 보내 줘야 합니다. 그래야 어른…….”
“싫어! 갈 거야! 내 친구 앵무를 되찾아올 거라고!”
진짜로 그럴 기세다. 같은 걸 느낀 걸까.
앵무새가 다급하게 외쳤다.
“친구! 친구!”
“흐윽…… 앵무야!”
앵무새가 루나를 친구라고 선언했다.
자신을 놓아 달라는 외침으로 들리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나 뭔가 위험한 애를 친구로 사귄 게 아닐까?’
레이몬을 베프라고 칭했을 때의 반응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친구’라는 존재에 대한 루나의 집착은 무시무시할 정도다.
“내 친구…… 아프면 안 돼…….”
앵무새를 꽉 끌어안은 루나가 훌쩍였다.
그 모습을 본 로델린도 코를 훌쩍였다.
눈시울이 벌건 게 억지로 울음을 참는 모양새다.
“음, 아름다운 우정이야.”
……저게요?
이 정도면 내가 이상한 놈이다.
[정신 방어] 스킬이 감동이란 감정까지 차단하는지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할 때였다.“케흑!”
앵무새가 검은 피를 토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