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academy's narrow eye, but i'm not evil RAW novel - Chapter (37)
제37화
37화. 명예(2)
로델린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루터스의 학생부 기록을 복구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공식적인 공표와 묫자리 마련은 거절당했다.
게임에서 겪은 대화와 똑같다.
그리고 난 이 일의 해결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고인물이 올린 공략 중 하나가 있으니까.’
하지만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며 들었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와 변한 점이 몇 가지 있었기 때문이다.
“사흘 후, 루터스의 아버님이 찾아오시기로 했다네.”
“아버님이요?”
“그렇다네. 사과도 사과지만 보상안도 제대로 마련해 둬야 할 터인데…….”
루터스의 아버지. 마을에 있는 광대를 말하는 거다.
그가 아카데미에 방문한다니.
게임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원래라면 루터스의 학생부 명단 복구로 끝나는 에피소드인데…….’
여기에 고인물의 공략을 이용하면 묘비까지는 세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이자, 끝이었는데.
‘광대와 루터스가 부자 관계인 게 밝혀졌기 때문인가?’
여기서부터는 나도 가 본 적이 없는 길이다.
이게 어떤 히든 피스로 이어질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감이 와.’
광대가 아카데미를 방문하는 건 처음이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팍팍 온다.
최대한 그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
그게 최상의 결과로 이어질 확률이 높았다.
‘숨겨진 보상도 얻을 수 있겠지.’
히든 피스 속의 히든 피스라니. 군침이 싹 돈다.
우선 고인물의 지식을 이용하기로 했다.
로델린이 루크 후작을 설득해 루터스의 묘비를 세우는 것.
여기까지는 공략이 공개된 상태니까.
“후후, 가문의 힘을 사용해 압박하면 간단한 일 아닙니까?”
“……말을 삼가라. 그런 건 협잡배 놈들이나 하는 짓이니.”
“올바른 일을 하는데 명예를 잃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루시드가의 명예는 지금까지 그렇게 쌓아 올린 모양이군요.”
로델린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진짜 화가 난 상태다. 그녀에게 있어 가문은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하니까.
하지만 내 혀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명예가 실추될 것이 두려워 못 본 척하겠다니. 고고한 루시드가도 여타 귀족들과 다를 게 없군요.”
“……그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그러다 목이 떨어지는 놈들을 많이 봐 왔거든.”
“후후, 그렇습니까? 그건 조금 무서운데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짜로 로델린이 검을 휘두를 기세를 뿜고 있었으니까.
로델린을 지나치며 천천히 걸었다.
동시에 마지막 문장을 내뱉었다.
“불명예를 무릅쓰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명예’인 겁니다.”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 힌트만으로도 로델린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게임에서도 이 정도 대화만 하니까.’
생각에 잠긴 로델린을 뒤로한 채 기숙사로 향했다.
* * *
“후우…….”
새벽이 가까워지는 늦은 밤.
수정 통신구를 바라보던 로델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법이 없는 건가?’
아니, 사실 로델린은 방법을 찾아냈다.
가문이 아카데미의 일에 끼어들 수 있는 완벽한 명분을.
톡, 톡.
집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학생명부.
로델린의 손톱이 학생명부를 계속 두드렸다.
특이한 점이라면, 학생명부의 색이 굉장히 바랬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학생명부는.
20년 전의 것이니까.
촤락-.
로델린의 손에 의해 펼쳐진 학생명부.
그곳에는 그녀가 잘 아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
탁-.
학생명부가 다시 닫혔다.
로델린의 손톱이 다시 학생명부를 두드렸다.
벌써 수십 번째 반복하고 있는 행동.
하지만 로델린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고민이 심각하다는 방증이었다.
“로델린, 들리느냐?”
“아…… 가주님을 뵙습니다.”
“인사는 됐다. 그래, 새로 떠올린 게 있느냐?”
로델린은 차근차근 보고를 올렸다.
정신이 없는 나머지 미처 전하지 못했던 정보 몇 가지가 전달됐다.
루크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조사단은 어제 새벽에 바로 출발했다. 일주일쯤 뒤에 도착할 게야. 그때까지 현장 보존을 부탁하겠다.”
“예, 가주님. 걱정 마십시오.”
“그래, 밤이 늦었구나. 오늘은 일찍 자도록 해라.”
이제 자신이 마지막 인사를 올리면 통신이 끊길 것이다.
로델린이 문안 인사를 올리려던 때였다.
문득, 제로의 말이 머릿속에 울렸다.
-불명예를 무릅쓰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명예’인 겁니다.
로델린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루크 후작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어쩌면 내게 실망하실지도 모르지.’
아니, 100% 실망할 거다. 하지만 용기를 내야 한다.
어제와 같은 결과를 맞이할지라도, 루크 후작에게 밉보인다고 할지라도 용기를 내야 한다.
지금 루터스와 앵무 군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는 건 오직 자신.
단 한 명뿐이니까.
“가주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흠, 뭔가 더 떠오르기라도 한 거냐?”
“아닙니다. 루터스 군의 처우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건 어제 얘기가 끝난 걸로 아는데. 그새 까먹기라도 한 것이냐? 아니면 머리가 아둔해진 것이냐?”
루크 후작의 눈매가 차갑게 변했다.
두렵다. 하지만 생각보다 두렵지는 않았다.
입 밖으로 내뱉은 이상,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진 탓도 있지만.
이게 올바른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분이 있습니다. 아카데미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이.”
“……말해 보거라.”
로델린이 학생명부를 펼쳐 들었다.
“20년 전, 당시의 학생명부입니다. 루시드가의 사람이 한 명 있더군요.”
“20년 전? 그렇다면…….”
“예, 맞습니다. 큰언니이십니다.”
로델린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한 여자아이의 사진이 있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칼. 안경을 쓴 모범생 스타일의 여자아이.
루시아 드 루시드.
루크 후작의 첫째이자, 장녀다.
로델린의 큰언니이기도 했다.
갑자기 왜 그 이름을 거론하는 걸까.
잠시 생각하던 루크 후작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로델린의 생각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로델린, 설마…….”
“예, 맞습니다. 저는 큰언니를 고발할 생각입니다.”
“……고발 사유는 뭐지?”
“후배를 못 지켰으니까요. 학생 하나 못 지켰을 뿐만 아니라 사라진 줄도 몰랐다니. 군인 실격입니다.”
억지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억지다.
다른 가문에서 이런 얘기를 꺼냈다면, 되레 역풍이 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긍지 높은 루시드가에서, 같은 가문의 사람을 고발한다?
이러면 얘기가 달라진다.
‘재조사는 물론, 희생자의 묘비도 세워 줄 수밖에 없지.’
아카데미에서도 루시드가의 개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루시드 가문이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입을 맞춰 주지 않으면 도리어 아카데미 쪽으로 역풍이 불게 될 테니까.
‘사과는 물론, 관련된 비용도 우리 가문에서 지급해야 하겠지. 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쪽이다.’
보상금과 묘비 건립비.
루시드가의 재력을 고려하면 새 발의 피 수준도 안 된다.
문제는 같은 가문 사람을 고발하고 잘못을 꾸짖는 데에서 발생한다.
‘그것도 막내가 큰언니를?’
가문의 불명예다. 제 살을 파먹는 일이다.
가문의 사람을 적으로 돌리는 위험천만한 짓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루터스의 명예가 바로 선다면.’
잊힐 뻔했던 영웅의 명예가 지켜진다. 동시에.
루시드가의 명예는 그보다 더 드높아진다.
‘루시드가에서는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내린다. 설령, 그게 같은 가문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저 문구가 박힐 것이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루시드가를 찬양할 것이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게 제국의 기둥 중 하나인 명문 귀족가(家)라면 더더욱.
“불명예를 무릅쓰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명예가 아닐까요?”
“허허…….”
불명예를 떠안으며 더 높은 명예를 취한다니.
미친 계략이다.
불명예를 떠안는 건 첫째인 루시아뿐. 그것도 아주 잠시뿐일 거다.
말을 마친 로델린이 고개를 푹 숙였다.
가족을 고발한다는 선택은 그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을 항상 아껴 주는 큰언니였기에.
“큰언니께는 제가 직접 사과드리겠습니다.”
“……말에 어폐가 있구나. 잘못을 바로잡는 일인데 어째서 사과를 한다는 것이냐?”
“그, 그건…….”
로델린이 어물거렸다.
루크 후작은 여기서 두 가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첫째는 로델린이 자신의 생각보다 더 강직한 성격이라는 것.
그리고 둘째는.
“누구냐.”
“예?”
“로델린, 이건 네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계략이 아니다.”
로델린은 편법을 모르는 강직한 아이다.
아카데미에서 1년을 보내고 나서야 겨우겨우 ‘융통성’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그 강직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2학년이 되자마자 이런 묘안을 생각해 낸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문을 향한 로델린의 마음은 루크 후작도 잘 알고 있었다.
가문의 명예에 자그마한 생채기를 내는 것조차 불안해하는 아이.
그런 아이가 가문이 불명예를 끌어안는다는 전제를 떠올린다?
불가능한 일이다.
누군가 조언해 준 게 분명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제가 떠올린…….”
“누구냐고 물었다. 이 내가, 누구냐고 두 번째 물었어.”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라는 말이다.
로델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제로…… 군입니다.”
“제로? 악마의 편린을 공략할 때 큰 공을 세웠다는 아이 아니냐.”
“예, 맞습니다. 악마의 장난 두 문제를 풀어낸 것도 제로 군이고요.”
본래라면 여기서 끝났을 이야기다.
하지만 제로의 외모와 [불길한 기운].
광대와 루터스의 사이를 밝혀내며 발동한 히든 피스.
제로에 대한 로델린의 호감도.
이 세 가지가 새로운 히든 피스를 발동시켰다.
“외모도 외모지만 악마어에 능통. 게다가 그 나이에 이런 계략을 생각해 내다니, 수상쩍은 놈이로군.”
“그렇지 않습니다! 추리력이 비상할 뿐입니다! 루터스 군의 아버지를 찾아낸 것도 제로 군이고 외모와는 달리 마음씨가 따스한……!”
로델린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도 모르게 후작에게 반발하고 말았다. 그것도 큰 소리를 치면서.
“…….”
“…….”
짧은 정적이 흘렀다.
당황한 건 루크 후작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요새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실수를…….”
“……많이 피곤한 모양이구나. 푹 자도록 해라. 첫째에게는 내가 연락해 둘 터이니.”
“그,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가주님.”
수정 통신구가 검게 물들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루크 후작이 입을 열었다.
“알베르, 공표문을 준비하게. 내일 아침이 밝는 대로 바로 공표할 것이니 빨리 움직여야 할 거야.”
“예, 영주님. 첫째 아가씨께는 제가 연락할까요?”
“그래, 사과문을 작성해 두라 이르게. 상황 설명도 잘 부탁하지. 아, 내 명령이라는 것도 전하고.”
“알겠습니다.”
가주의 명령이니, 로델린에게 악감정을 품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집사 알베르가 집무실 문을 닫고 나갔다.
실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과 40년이 넘도록 합을 맞춰 온 그니까.
“루터스라…… 아까운 인물이 갔구나.”
루크 후작은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루터스의 영웅적인 기상은 그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처음부터 그에게 작은 묫자리라도 마련해 주고 싶었다.
명분만 충분하다면 말이다.
‘가신들과 회의를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지.’
그런데 가문의 막내가, 그것도 강직한 로델린이 그 방법을 떠올리다니.
“불명예를 무릅쓰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명예……라.”
홀로 남은 어두컴컴한 집무실.
별안간 루크 후작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 로델린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괴상한 계략을 들고 왔을 뿐만 아니라.
가주인 자신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고 따박따박 말대꾸까지 하다니.
“아이들의 성장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단 말이지…….”
오늘 밤은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루크 후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