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academy's narrow eye, but i'm not evil RAW novel - Chapter (40)
제40화
40화. 명예(5)
거대한 저택. 그곳에 자리한 실험실.
검은 가면을 쓴 여자가 일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치이익!
어깨에 있던 문신이 타들어 가더니, 이내 흉측하게 살이 일그러졌다.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 그럼에도 여자는 신음 하나 내지르지 않았다.
“……악마의 편린이 죽었다고?”
악마가 있을 것이라고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등잔 밑.
2개의 퀴즈.
여기에 몰래 심어 둔 첩자들까지.
꼭꼭 숨겨 뒀었는데 어떻게 된 걸까.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의문은 짧았다.
아카데미에 숨겨 둔 첩자들에게서 보고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루시드가에서 사과문을 공표했다고?”
무려 20년 전의 일을 사과했다는 것만으로도 어이가 없는데, 심지어 친언니를 고발한 게 그 가문의 막내다.
그리고.
“악마의 편린을 죽인 것도 그 아이란 말이지…….”
여자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침묵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한 그녀의 입이 열렸다.
“로델린이라. 미리 처리해 두는 게 좋겠네.”
여자가 팔뚝에 있는 문신을 매만졌다.
무려 4계위 악마 비네스.
악마의 편린은 8계위 악마급에 속하니, 비네스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제거해라.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예, 리즈벨트 님.”
악마를 아카데미에 파견하는, 최악의 히든 피스가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게임에서 일반적으로 악마의 편린이 죽음을 맞이하는 건, 에피소드3 이후부터.
그때쯤에는 대륙 여기저기에 침식을 퍼트리느라 리즈벨트도 정신이 없는 상태.
8계위 악마가 죽은 것 따위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 막 에피소드가 시작된 상태니까.
제로는 모를 거다. 지금 이 히든 피스는.
배드 엔딩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걸.
4계위 악마 비네스가 아카데미에 도착하기까지.
D-30.
* * *
뒹굴뒹굴.
루시드 가문의 첫째.
루시아가 침대 위를 굴렀다.
한 달째 같은 행동을 반복했지만, 항상 새롭고 짜릿했다.
“어휴, 이 궁둥이에 살찐 것 좀 봐!”
찰싹!
중년 여성이 그런 루시아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하지만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다. 오히려 간지럽다는 듯이 비웃을 뿐.
“유모, 요즘 트렌드 몰라? 남자들이 이런 거에 환장한다고.”
“……예, 맞는 것 같네요. 저도 환장하겠거든요!”
철썩!
마나를 담아 내리친 일격.
그제야 루시아가 비명을 내질렀다.
“꺄악! 뭐야, 왜 때려!”
“좀 나가서 노셔야 그 환장하는 궁둥짝을 보여 주든 말든 할 거 아니에요! 제발 좀 밖으로 나가세요!”
“응, 오늘의 설교 다 끝났어? 그럼 이제 밥 좀 줘, 유모.”
벅벅.
루시아가 배를 긁으며 그렇게 말했다.
빠직-.
“……오늘부터 밥 없습니다. 나가서 드세요.”
“흥! 내가 갖다 먹을 거다 뭐.”
“다 버려서 없는데요? 드시려면 나가서 사 드셔야 할 거예요.”
유모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감돌았다.
루시아는 이제 꼼짝없이 밖으로 나가야 할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뭐? 유모 미쳤어?”
“미친 건 아가씨겠죠. 서른 중반까지 남자 하나 없는 게 말이 됩니까? 평생 노처녀로 사실 생각이세요!?”
푹!
노처녀.
루시아의 마음에 큰 상처가 새겨졌다.
평생을 함께해 온 유모가 이런 막말을 내뱉다니.
진짜 슬프다.
“유모! 나 어른이야! 결혼도 내가 알아서 잘 할 거라고!”
“어른은 이렇게 한 달 동안 뒹굴거리지도 않고, 밥을 달라며 배를 벅벅 긁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야 결혼을 하든 말든 하지 않을까요?”
푹푹푹!
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다.
루시아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였다.
“어휴, 막내 아가씨의 반이라도 닮으면 참 좋을 텐데.”
“엥? 그게 무슨 소리야. 걔가 날 닮아야지. 이렇게 훌륭한 어른으로 자랐는데.”
“막내 아가씨가 뒹굴거리며 배를 벅벅 긁는다니…… 그런 끔찍한 말은 하지도 마세요.”
“히잉! 유모는 나만 미워해! 밥 줘!”
루시아가 침대 시트를 몸에 감싼 채 뒹굴뒹굴 굴렀다.
진짜 밉상이다, 밉상.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으면서 대체 왜 연애를 안 하시는지.’
실제 나이보다 10살은 더 어려 보이는 루시아다.
중매도 줄을 섰는데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다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애까지 낳고 인사를 오는 수준.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유모가 이내 무언가를 떠올렸다.
“참, 가주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여기 편지가…….”
“또 악마 놈인가? 이번엔 어디래?”
시트를 몸에 감은 채 꾸물거리던 루시아가 일순간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유모의 앞에 도달했다.
눈매도 매섭게 변했다. 조금 전의 순둥이는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편지를 읽은 루시아는 맥이 탁 풀릴 수밖에 없었다.
-사과문을 작성해라. 명령이다.
“에?”
서른 중반의 나이.
난데없이 사과문을 쓰게 생겼다.
* * *
“아하, 그런 거였어?”
루시아는 유모에게 설명을 듣고 나서야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뭐, 좀 억울하긴 하지만 그게 도움이 된다면야.’
이 사건이 터질 당시 루시아는 3학년.
졸업반이었기에 제국을 이리저리 떠돌며 경험을 쌓을 때였다.
루터스라는 아이의 얼굴은커녕 이름도 지금 처음 들어 본다는 뜻이다.
하지만 자신의 명예가 조금 깎이는 것만으로 루시드 가문, 로델린, 루터스, 이 셋이 이득을 본다.
손해보다 이득이 훨씬 큰 거래.
루시아는 사과문을 작성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귀여운 막내가 사고를 쳤네. 어쩜 사고도 자기처럼 귀엽게 칠까?”
가문의 막내가 자신을 길거리에 내건 상태였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향한 든든한 신뢰의 끈을 느낀 루시아였다.
루시아가 벌러덩 드러누웠다.
새로운 악마의 처치 명령서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고, 막내가 자신을 고발한 이유도 영 싱겁다.
도전장 같은 거였다면 사랑으로 돌봐 줬을 텐데.
“아~ 우리 가문은 왜 이렇게 명예에 집착하는 걸까?”
“봐주시는 겁니까? 막내 아가씨를 편애하시는군요.”
“뭐, 내 명예가 좀 떨어지면 어때. 명예 따위 신경도 안 쓰지만, 떨어뜨릴 일도 없는걸. 이럴 때 좀 깎아 먹으라고 하지 뭐.”
게으름뱅이의 입에서 저런 시건방진 말이 나오다니.
하지만 유모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시아 드 루시드.
지금까지 그녀가 이뤄 온 업적만 해도 제국연대기의 두 장은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루시아라는 이름이 가진 업적과 위엄은 그 무엇으로도 흠집 낼 수 없었다.
아, 딱 한 가지만 빼고.
“그 드높은 명예가 노처녀라는 것 하나만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잖습니까.”
“아! 유모! 내가 그 소리 그만하랬지!”
“애초에 남자와 연이 있으신 적은 있습니까?”
“마, 많거든!? 지금까지 내가 만난 남자만 해도 책으로 세 권이거든!?”
예~ 예, 그러시겠죠.
맨날 악마만 잡으러 돌아다니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침대에서 뒹굴기 바쁜데.
세 권은커녕 세 단어만 되어도 다행일 거다.
“참, 그래서 누구래?”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이런 계략을 우리 귀여운 막내가 생각해 낼 리 없잖아. 누군가 조언해 준 거겠지. 그게 누구냐고.”
“……막내 아가씨를 너무 무시하시는 거 아닙니까?”
루시아가 꺄르륵 웃었다.
“내가 우리 막내를 모를까? 이런 유연한 생각은 불가능한 아이야.”
고결, 강직, 신념.
고리타분한 세 가지를 모두 가진 게 바로 로델린이라는 아이다.
더 큰 명예를 얻을 수 있다고는 해도, 가문의 사람을 팔 정도로 의리가 없는 성격은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두 분은 나름 친하시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유모가 살짝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제로라는 학생이라고 합니다. 평민이라는 것과 입학시험에서 3위를 차지했다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정보가 없네요.”
“에이~ 뭐야, 별로 숨길 것도 아닌 정보였잖아? 난 또 철천지원수 가문의 사람인 줄 알았네.”
“루시드가에 그런 가문이 있습니까?”
“없지. 덤비는 놈들은 모조리 제 위치를 깨닫게 해 줬으니까.”
언뜻 듣기에는 가벼운 말.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것.
현재 루시드 가문의 위치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흠흠, 아무튼…… 오랜만에 막내 얼굴이라도 보러 갈까나?”
“아카데미에 가시게요? 굳이 그럴 필요는…….”
“음…… 그 제로라는 아이도 한번 보고 싶고.”
“왜요?”
“어…… 똑똑한 아이면 영입하는 게 좋으니까?”
쯧.
유모가 혀를 찼다. 제로에 대한 정보를 숨기려 했던 이유가 바로 이거다.
‘괜한 빌미를 주기는 싫었는데.’
결혼 상대를 찾는 것만으로도 바쁜데 아카데미에 방문하겠다니.
쓸데없는 시간 낭비다.
하지만 괜찮다. 이런 상황도 예상했으니까.
“그러실 줄 알고 일정을 잡아 뒀습니다.”
“오, 진짜? 역시 유모야. 유능하다니깐?”
“칭찬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러면 준비해 볼까요?”
유모가 장롱에서 여러 물건을 꺼냈다.
장신구, 구두, 그리고 드레스다. 그것도 상당히 휘황찬란한.
“……아카데미에 갈 건데 그걸 왜 꺼내?”
“귀족 파티인데 당연하지요.”
“응? 웬 귀족 파티?”
“아카데미까지 가는 길에 있는 파티란 파티는 다 잡아 뒀습니다. 이왕 가시는 김에 결혼 상대를 찾으면서 가시죠.”
“……?”
루시아가 벽에 바싹 몸을 붙였다.
“아, 안 갈래. 살쪄서 드레스도 안 맞는단 말이야.”
“아주 튼튼한 코르셋을 준비해 뒀으니 걱정 마세요.”
유모가 걱정 말라는 듯 코르셋의 끈을 쫙 당겼다.
그녀의 눈동자가 희번덕 빛나더니, 한 바퀴 빙글 돌기까지 한다.
음, 저런 건 악마만 가능한 거 아니었던가?
“나, 나 요새 소문 안 좋잖아. 그나마 빵빵했던 명예도 방금 떨어졌고…….”
“괜찮습니다. 아가씨는 가문과 궁둥이가 빵빵하니까요.”
유모의 눈이 또다시 한 바퀴 회전했다.
악마다. 저건 결혼에 미친 악마다!
“꺄, 꺄아아아아아악!!”
루시아 드 루시드의 아카데미 방문까지.
D-30.
* * *
“음?”
눈을 떴지만 보이는 거라곤 곤히 잠든 아이들의 모습과 덜컹거리는 마차뿐이었다.
분명 어디선가 비명이 들린 것 같았는데.
다시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마차의 승차감 때문인지 잠이 좀처럼 오질 않는다.
결국 현재 상황과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던전까지는 아직 멀었나.’
현재 우리 반은 마차를 타고 던전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마수와 싸우는 실전 수업. 담당 선생은 카론이다.
‘걱정은 되지 않아.’
[신의 모방]을 얻은 이상, 1학년생들을 위한 던전의 마수 따위는 더 이상 적수가 아니다.그보다는 앞으로의 일이 더 문제다.
‘다음에는 어떤 히든 피스를 노려야 하나?’
고민에 빠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기존에 염두하고 있던 히든 피스 중 대부분이, 특히 공격 스킬이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B, C 등급에도 쓸 만한 스킬들이 제법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신의 모방]을 얻기 전까지의 이야기.
로델린의 [하늘 가르기]를 모방한 이상, 그 이하의 공격 스킬은 의미가 없다.
‘하늘 가르기에는 딱히 제한도 걸려 있지 않으니까.’
스킬을 사용하는 데 소모되는 마나나 정신력, 또는 비전 특유의 대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반복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쓸 만한 히든 피스는 좀 더 에피소드가 진행되고 나서야 얻을 수 있고…….’
아직 에피소드1의 보스도 마주하지 못한 상태다.
잠겨 있는 장소, 아이템, 인물 등 제약이 큰 상황.
‘너무 빨리 강해져도 좋지 않군.’
[신의 모방] 스킬을 제일 빨리 획득한 고인물의 기록은 에피소드3.그걸 에피소드1로 단축해 버렸으니, 말 다 했다.
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문제가 생기다니.
아, 이런 내 자신이 너무나도 두렵다.
“미안한데 좀 옆으로 가 주라.”
“더 바짝 붙어. 으, 저 불길한 미소 좀 봐.”
“수상한 계획을 세우는 게 틀림없어.”
“드디어 악마를 소환하려는 건가!?”
……천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못난 세상 같으니.
진짜 흑마법사로 흑화해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때였다.
“도착했군. 다들 내려라.”
개미굴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