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academy's narrow eye, but i'm not evil RAW novel - Chapter (84)
제84화
84화. 첫 번째 보스, 르앵(2)
가문의 배신자.
르앵의 뒤에 붙은 꼬리표였다.
몇 년 뒤 플뢰르 가문의 가주가 사망하고, 플뢰르 가문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전까지.
지긋지긋할 정도로 르앵의 뒤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르앵이 유명해진 뒤로는 가문의 배신자라는 말이 쏙 들어갔다.
오히려 그를 찬양하며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이 늘었다.
여러 가문의 검술을, 그것도 비전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는 흔치 않았으니까.
‘하지만 르앵은 결국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지.’
모방의 르앵이라는 이명을 지키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더 많은 비전 기술을 사용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을까.
네가 원하는 모든 비전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악마의 유혹.
르앵은 악마와 계약서를 작성하고, 상대의 비전 기술을 모방할 수 있는 마검을 손에 넣게 된다.
마검의 힘을 빌릴수록 점차 잠식되는 조항이 숨겨져 있었지만, 르앵이 이걸 알게 된 건 한참 뒤의 이야기.
세월이 흘렀고, 마검의 잠식은 어느새 오른팔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더 이상은 위험하다고 판단.
잠식을 멈추고자 마검을 멀리하고, 앤우드 아카데미의 정식 선생님 자리를 제안받아 이곳에 오게 됐지만.
‘그게 오히려 독이 됐지.’
재능이 넘치는 아이들이, 명문가의 검술을 사용하는 아이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르앵은 결국 또다시 마검의 힘을 빌렸고, 마검이 폭주하게 된다.
그리고 마검이 폭주한 흔적을 뒤쫓는 것이 바로 로델린을 비롯한 주연 인물들.
르앵은 결국 그들의 손에 처단당하며, 끝을 맞이한다.
‘여기까지가 공개된 르앵의 스토리야. 게임 중후반부에도 르앵의 이름이 나올 때가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모방의 르앵’이라는 이름으로서였다.
‘플뢰르 가문의 르앵’에 대한 정보는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있는 것이라곤.
-아우야, 미안하다. 내가 널 이끌어 주지 못해서.
폐허로 변한 플뢰르 가문의 저택에서 발견된 낡은 편지.
플뢰르 가문의 가주가 르앵에게 보내려던 편지로 추정되는 종이 한 장뿐이었다.
자, 그럼 한번 정리를 해 보자.
‘나는 르앵을 회개시켜야 해.’
회개시키라는 건, 현재 르앵이 잘못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뜻.
그리고 이건 ‘모방’일 확률이 높았다.
모방으로 유명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검의 능력도 모방이다.
심지어 모방한 검술로 제 가문을 꺾으며 플뢰르 가문의 멸문을 앞당기지 않았던가.
그게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걸 일깨워 주고 회개시키는 것.
퀘스트가 요구하는 회개는, 이것일 확률이 가장 높았다.
‘다른 이유일 수도 있지만, 확률은 낮아.’
르앵에 관해 공개된 스토리는 이게 유일하니까.
그리고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있었다.
‘모방’이라는 단어.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 내가 가진 스킬 중 하나.
[신의 모방].‘르앵을 회개시키라는 퀘스트는 처음 봐.’
다른 고인물들조차 받은 적 없는, 그야말로 처음 보는 퀘스트다.
그렇다, 이건.
‘히든 피스다.’
어떠한 이유로 르앵과 관련된 히든 피스가 발동됐고, 그게 메인 퀘스트에 영향을 끼쳤다는 소리다.
1장의 종반부에 들어선 시점.
평소 게임을 플레이할 때와 크게 달라진 것 중, 몇 가지를 꼽는다면.
‘악마의 편린 처치, 신의 모방 획득, 카론과의 거래, 다이크와의 대리 결투.’
이 네 가지뿐이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르앵과 관련된 걸 꼽자면?
[신의 모방], 이것 하나밖에 없었다.‘나와 르앵, 둘 다 모방을 하는 존재다. 그래서 히든 피스가 발동한 거야.’
문제는, 어떻게 해야 회개시킬 수 있느냐는 것.
이게 문제였다.
‘사실 회개를 시키지 않고 죽여도 상관은 없지만…….’
르앵을 죽이는 게 바로 메인 퀘스트의 클리어 조건.
‘회개시킨 후 죽여라’라는 건 어디까지나 히든 보상을 받기 위한 조건일 뿐이다.
게다가 히든 보상이라곤 [눈 뜨기]의 등급 상승 하나뿐.
포기해도 문제될 건 없다. 다만.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네 번째 메인 퀘스트임과 동시에, 1장을 마무리하는 퀘스트다.
그런데 보상이 고작 2레벨 업과 10골드라니.
짜도 너무 짰다. 그렇다면.
‘숨겨진 보상이 있다는 거야.’
투명 슬라임을 처치하고 얻은 ‘투명 물질’ 같은 부산물.
그런 종류의 드롭 아이템일 확률이 높았다.
처음 보는 퀘스트, 거기에 숨겨진 보상의 존재 유무까지.
어떻게 해서든 클리어하고 싶어졌다.
나는 고인물임과 동시에, 이 게임을 즐기는.
한 명의 게이머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르앵이 모방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는 건데.’
그가 모방에 집착하는 이유. 그건 바로.
‘열등감 때문이야.’
남과 비교하고, 남보다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
사람을 조금씩 좀먹으며 망가뜨리다가, 끝끝내 스스로 부숴 버리게 만드는 최악의 감정.
악마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그들이 가진 것을 저울에 올려놓고 비교해 주면.
악마의 계약서에 쉽게 손을 뻗곤 했으니까.
‘열등감을 극복하게 만드는 것.’
이게 르앵을 회개시키는 열쇠가 될 것이다.
찌리릿-.
‘응?’
생각하던 와중, 난데없이 발동한 [초감각].
머리를 살짝 긁적인 후, 양팔을 휘적거리며 훈련장의 구석으로 향했다.
휘적휘적-.
“너 갑자기 뭐 해? 미쳤어?”
“후후, 그럴 리가요. 이쯤에 있을 것 같은데…….”
툭-.
내 한쪽 팔이 무언가에 걸렸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인데 말이다.
가볍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콰직-!
종이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허공이 일그러졌다.
동시에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훈련장 벽 모양으로 위장을 한 상자였다.
완벽했던 모양이 일그러지자, 착시의 효과가 사라진 것.
그리고 이 상자의 주인은…….
뽈깍!
“히, 히이이익!”
앞머리가 길어 눈이 보이지 않는 여자아이, 레제였다.
“뭐야? 쟤가 왜 여기서 나와?”
그러게. 오랜만에 마음이 통했구나, 루나야.
“후후, 레제 양. 여기서 뭐 하십니까?”
“그, 그냥 있었어요. 그, 그보다…… 어, 어떻게 절 찾으신 거죠?”
후후, 그건.
“비밀이랍니다.”
“그, 그렇군요. 그, 그럼 전 이만…….”
레제가 상자를 이리저리 손보더니,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사람이 말을 하고 있는데 상자 안으로 들어가려 하다니.
이런 커뮤니케이션으로는 친구를 만들 수 없을 거다.
‘어쩔 수 없군.’
루나의 위치를 알려 주는, 혁혁한 공을 세운 아이다.
이 거지 같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좀 바꿔 줘야겠다.
나는 착한 아이니까.
콰지직-!
상자를 찢은 후, 잘근잘근 밟았다.
순식간에 상자가 폐지로 탈바꿈했다.
“내, 내 집이이이이-!!”
레제가 폐지 앞에 엎드린 채 바들바들 떨었다.
이게 집이었단 말인가? 기숙사는 뒀다 뭐 하고?
같은 의문이었던 걸까. 루나가 물었다.
“뭐야? 기숙사에서 생활 중인 거 아니었어?”
“마, 맞아요.”
“그런데 이게 집이라니. 무슨 말이야?”
“제, 제 방에 있는 사, 상자 안에서 자거든요.”
“……?”
루나가 내게 시선을 보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는 뜻이다.
하지만 레제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음, 천천히 해석해 보자.
그러니까 기숙사 안에 있는 자신의 방.
그 방 안에 있는 상자.
그 상자 안에서 잠을 잔단 말인가?
“어째서죠?”
“펴, 편안하니까요.”
“후후, 전혀 편안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 이 세상에는 포식자가 가득해요. 하, 항상 조심해야죠. 자, 잠든 시간이야말로 가장 조심해야 할 때라고요.”
“누가 포식자라는 거죠?”
“저, 저를 제외한 모두요.”
……이 정도면 초식동물이 아니라 지상 최고의 최약체 아닌가?
게임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였지만, 눈으로 보니 더하다.
레제가 부서진 상자를 회수하더니,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주섬주섬.
툭.
상자 하나를 꺼냈다. 훈련장 벽 무늬와 똑같은 상자였다.
“……하나가 더 있었군요?”
“비, 비상용이에요. 오, 오늘 같은 사고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사, 상자당 3개씩 만들어 두는 편이에요.”
그렇구나. 하나도 아니고 3개라.
좋게 말하면 꼼꼼한 스타일.
나쁘게 말하면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이라 할 수 있겠다.
가만, 그렇다면…….
“후후, 레제 양. 저번에 본 돌 모양 상자도 3개인가요?”
“네? 네……. 워, 원본까지 포함하면 4개죠.”
“……대체 상자를 몇 개나 갖고 계신 건가요?”
“그, 글쎄요. 세 보지를 않아서. 하, 한…… 100개쯤 되지 않을까요?”
어느 공간에나 녹아들 수 있는 상자가 100개라.
이 정도면 무서운 수준이다.
“그, 그럼 전 이만…….”
레제가 상자 안으로 들어가 뚜껑을 닫으려던 때였다.
루나가 손을 뻗더니 레제의 머리칼을, 머리 위에 삐죽 솟아 있던 바보털을 휘어잡았다.
“가긴 어딜 가.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네, 네?”
“저 바보는 속여 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못 속여! 이 스파이 자식!”
루나가 레제를 상자 밖으로 끌어냈다.
발라당 엎어진 레제. 그 위로 루나가 올라타더니, 다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루나의 전매특허. 코브라 꺾기 자세다.
“저번엔 놓쳤지만, 이번엔 어림도 없어! 누가 보낸 거야? 누구의 사주를 받고 우리를 감시하는 거냐고!”
“히, 히이익! 그, 그런 적 없어요!”
“거짓말! 그럼 왜 우리를 지켜본 건데?”
“지, 지켜본 건 맞지만 오해예요! 후, 훈련장에도 제, 제가 먼저 와 있었잖아요. 제, 제가 있는 곳에 여러분들이 온 거라고요.”
음,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하다.
우리가 온 뒤, 훈련장의 문은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으니까.
레제가 은신의 달인이라고는 하나, 문을 열지 않고 들어오는 건 불가능했다.
“……스파이.”
“예?”
“스파이니까 무슨 방법이 있겠지!”
“그, 그게 무슨……! 어, 억지예요오오오!”
“시끄러워! 이거나 먹어라! 코브라 꺾기!”
“꺄, 꺄아아아악!!”
루나가 레제의 허리를 꺾기 시작했다.
음, 종종 보는 거지만 예술적이다.
이 세계에 프로레슬링이 있다면 훌륭한 레슬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삐비빅-!!
“괴롭힘은 벌점 사유다!”
훈련장 창문 밖.
로델린이 얼굴을 빼꼼 내밀면서 외친 소리였다.
문제라고 한다면 2층 창문이라는 것 정도?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야 저기서 나타날 수 있는 걸까.
일반인인 내 입장에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 사사사……!”
“응? 뭐야. 얘 또 왜 이래.”
“사, 사자예요! 도, 도망쳐야 해요!”
“으악!”
루나가 벌러덩 넘어졌다.
레제가 폭발적인 스피드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생존 희망자].스탯을 2배로 뻥튀기해 주는 특성이 발동한 거였다.
그나저나 로델린을 보고 사자라고 하다니.
‘루시드 가문의 상징이 사자이긴 하지.’
하지만 사람이 사자인 건 아니다.
즉, 도망가는 레제가 이상한 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저, 저는 이만…… 오, 오늘 즐거웠어요!”
레제가 상자 안으로 들어가 뚜껑을 닫았다.
순식간에 벽과 융화되는 상자.
동시에 레제의 기척이 점점 멀어지더니,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초감각]의 범위를 벗어난 거다.“뭐야? 어디로 사라진 거야?”
“후후, 이 안에 있을 겁니다. 찾기는 힘들겠지만요.”
루나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진짜 신기한 애네. 저렇게 신기한 건 네 얼굴 이후로 처음이야.”
“…….”
내 얼굴이 저 이상한 애와 동급이라니.
어쩐지 서글픈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