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academy's narrow eye, but i'm not evil RAW novel - Chapter (95)
제95화
95화. 첫 번째 보스, 르앵(13)
잠시 품속을 들여다보자는 내 제안.
물론, 레제가 앞섬에 소중하게 품고 있는 아공간 주머니 얘기였다.
위장이 가능한 상자가 가득 든, 아공간 주머니 말이다.
‘얼굴은 왜 빨개지는 거람?’
설마 상자를 보여 주는 게 창피한 걸까?
조금 전에는 상자를 숨풍숨풍 잘만 꺼내 놓더니.
참 이상한 아이였다.
“으, 으아아…… 아, 안 돼요. 자, 잡아먹지 마세요오……. 저, 전 맛없단 말이에요.”
갑자기 레제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잡아먹는다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내가 무슨 육식 동물도 아니고.
대체 대화가 어디서부터 어긋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단 안심을 시켜 줘야 하겠군.’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문제였다.
“후후, 걱정 마십시오. 하나도 안 아프도록, 아주 부드럽게 이용할 테니까요.”
소중한 상자가 아프지 않게, 조심스럽게 사용하겠다는 뜻이다.
“물론, 깨끗이 쓰고 돌려드릴 겁니다.”
상자를 최대한 깨끗이 쓰고 돌려주겠다는 뜻이다.
“후후, 저랑 비밀 친구 하시겠습니까?”
상자를 공유하는 비밀 친구를 하자는 뜻이다.
오들오들-.
참 이상한 일이다.
어째 내가 말을 하면 할수록, 레제의 떨림이 강해지는 느낌이다.
어째서일까?
“……이 변태 자식. 죽어라!”
퍽퍽!
루나가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더니,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억울하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난 그냥 위장용 상자를 빌리려고 했을 뿐인데!
삐빅-! 삐비빅-!
“폭력은 벌점 사유다!”
반가운 호각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역시 로델린이다. 나를 구해 주러 왔구나!
“흠…….”
우리 곁에 도착한 로델린이 우리를 번갈아 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한쪽 팔을 잡고 뒤로 꺾었다.
“제로 군! 자네를 현행범으로 체포하겠네!”
크아아악! 루나야! 레제야! 도와줘!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건 경멸 어린 시선뿐이었다.
깨끗하게 쓰고 돌려주겠다는 말이 뭐 어때서!
그리고 친구끼리 비밀 친구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크윽…… 선배님, 억울합니다.”
“음? 뭐야. 또 오해인가?”
로델린이 루나와 레제를 향해 물었다.
“예, 선배님. 아니에요.”
역시 우리 루나다.
뭐, 애초에 내가 이 꼴이 된 게 루나 때문이긴 하지만.
로델린이 내 팔을 놓으려던 때였다.
루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주아주 불길한 미소가.
“폭행죄가 아니라 변태 행위로 인한 체포. 그거면 또 모르겠지만요.”
“그, 그런 망측한……! 제로 군! 자네를 현행범으로 체포하겠네!”
내 팔이 다시 한번 꺾였다.
진짜 억울하다. 상자를 빌리는 것도 죄란 말인가?
“제로!”
그 순간, 저 멀리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레이몬이었다. 그가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띤 채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를 알렉스가 따르고 있었고.
“잠깐! 접근 금지!”
“마, 마귀할멈! 오늘은 반드시 제로를 받아 가겠습니다!”
“누가 마귀할멈이야!”
루나와 레이몬이 서로의 양쪽 손을 잡고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진짜 가슴이 웅장해지는 대결이다.
내가 상품이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오늘도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네.”
“후후, 알렉스 군. 이런 경우, 보통은 오늘도 다사다난하다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런가? 내가 봤을 땐 재밌어 보이는데.”
알렉스의 눈에는 내 팔이 꺾여 있는 게 안 보이는 걸까.
우리 루나와 하루만 같이 지내 봤으면 좋겠다.
저런 말이 쏙 들어갈 텐데.
“그래서, 어쩌다 이렇게 된 건데?”
알렉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 팔을 단단히 잡고 있는 로델린의 귀에도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됐다.
“음, 그런가. 오해였군.”
“후후, 처음부터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하지만 중의적인 표현을 사용한 건 사실이지. 벌점 1점으로 넘어가도록 하겠네. 다음부턴 언행에 주의해야 할 거야.”
수첩과 펜을 쥔 로델린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 자연스레 글씨가 흐트러졌다.
아주 조금뿐이긴 했지만, 완벽함을 추구하는 로델린이 할 만한 실수는 아니다.
‘그만큼 바쁜 일이 있다는 거겠지.’
레이몬의 허리가 뒤로 꺾이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무렵.
로델린이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네. 확인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제, 제로! 다음에는 꼭 구해 낼게요! 그때까지 건강해야 해요!”
“하하, 그럼 나도 가 볼게.”
세 사람이 그렇게 사라졌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거다. 모두.
예상대로였다.
“후후, 어서 따라갑시다.”
“응? 왜?”
오늘 미행 놀이를 할 대상이 바로.
“저 친구들이거든요.”
* * *
뽈뽈뽈-.
멈칫.
뽈뽈뽈-.
멈칫.
저 이상한 소리는 대체 뭐냐고?
상자 안에 들어간 우리가 움직일 때 나는 소리다.
커다란 바위 모양으로 위장한 상자.
미행은 손쉽게 진행됐다.
레제가 만든 상자의 위장 능력이 워낙 탁월하고, 상자에 밖을 볼 수 있는 구멍이 나 있기도 했지만.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나네.’
레제의 위기 감지 능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엄청났다.
인기척이 느껴질 때뿐만 아니라,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움직임을 멈춘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사람이 나타나 우리를 스쳐 지나가곤 했다.
정말 귀신 같은 능력이다.
저게 바로 극한까지 연마된 생존 본능의 힘인 걸까?
지금도 마찬가지다.
“음?”
“왜 그러십니까, 선배님?”
“아니…… 착각인 모양이야. 살짝 긴장했나 보군.”
전체적으로 스탯이 높은 로델린조차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로델린 무리가 멀어지자, 레제가 든 상자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뽈뽈뽈-.
‘훌륭한 지휘관이란 말이지.’
문제라면 외관상 별로라는 것 정도?
아무튼, 레제 지휘관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결과.
드디어 미행의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학교의 북서쪽에 있는 ‘푸른 숲’ 지역.
로델린 파티는 작은 건물 앞에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르앵의 개인 훈련실에 도착한 거다.
그리고 여기에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한 명 있었다.
“어라? 선배님? 그리고 알렉스 군이랑 레이몬 군까지?”
뜬금없이 유리디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가끔씩 친위대 몰래 학교를 탐험하곤 했다.
모험심을 참지 못한 거다.
겉과 달리, 속은 말괄량이 그 자체였으니까 말이다.
알렉스, 로델린, 레이몬, 유리디아.
「아카데미의 영웅」을 이끄는 주연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인 순간이었다.
그렇다. 주연 멤버들이 1장 보스를 공략하기 직전 합류하게 되는 마지막 파티원이자, 천재 마법사.
유리디아 드 로운터 되시겠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대화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호호, 그래요, 레이몬 군. 그간 우리가 너무 바빴죠?”
“아뇨. 하나도 안 바빴는데요?”
“그, 그랬나요? 그럼 먼저 말 좀 걸어 주시지 그랬어요. 반갑게 맞아 줬을 텐데.”
“음~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유리디아가 하인들을 하도 많이 끌고 다니다 보니 틈이 안 났어요. 그런데 이런 기회가 생기다니, 정말 기쁘네요!”
한 문장 안에 인사와 도발이 함께 들어가 있다니.
역시 느그 레이몬다웠다.
유리디아의 눈썹이 파들파들 떨렸다.
“……호, 호호! 하, 하인이 아니라 친구예요, 친구! 부럽나요? 누구와는 달리 친구가 많아서?”
“음, 부러우면서도 부럽지 않네요. 알렉스 한 사람보다 못한 인간들뿐이라.”
“뭐, 뭐라고요!?”
속은 말괄량이지만, 외적으로는 항상 이미지 관리를 하려고 애쓰는 유리디아다.
그런데 그 가면을 단숨에 깨부수다니.
레이몬, 무서운 아이였다.
“진정들 하게. 유리디아 양, 미안하지만 당장 이곳을 떠나 주지 않겠나?”
어지러운 상황을 로델린이 단번에 정리했다.
“예? 어째서죠?”
“……악마를 마주할 수도 있는 상황이거든. 휩쓸리기 전에 어서 이곳을 떠나게.”
유리디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학생회장 로델린이다.
매사에 진지하고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냉철하게 임하는 게 바로 로델린이란 사람.
그런 사람이 장난으로 악마란 단어를 입에 올릴 리 없다.
질 나쁜 장난이 아닌, 진짜라는 뜻이다.
“아, 악마라뇨? 선배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설명할 시간이 없다네. 어서 떠나게. 이곳은 우리에게 맡기고.”
그러자 유리디아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작은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저도 함께하겠어요.”
“유리디아 양, 이건 장난이 아니라네. 죽을 수도 있단 말이네!”
“저도 귀족이에요. 악마를 눈앞에 두고 도망칠 수는 없죠. 악마와 싸워 피해를 막으려는 선한 사람들이 있다면 더더욱 도망칠 수 없어요.”
살짝 침음을 흘린 로델린이 생각에 잠겼다.
유리디아를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거다.
사실, 학교 측에 이미 신고를 해 둔 상태다.
곧 르앵을 처리하기 위해 교관과 선생들이 몰려올 거라는 뜻이다.
자신들이 나서지 않아도 괜찮을 거다. 르앵이 도망치지만 못하게 하면 된다.
지금의 로델린은 그렇게 생각하는 중일 거다.
‘로델린의 생각과 대사를 기억하는 것 정도는 우습지. 나는 고인물이니까.’
확실히 로델린의 대처는 훌륭했다. 그 누구도 트집을 잡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전투가 끝날 때까지 지원은 오지 않아.’
앤우드 아카데미의 총학생회장이자, 졸업식 에피소드에서 최종 흑막으로 등장하는.
아윈 드 헤리제스. 그가 뒤에서 손을 썼기 때문이다.
쾅! 쿠구궁-!
르앵의 개인 훈련실에서 알 수 없는 진동이 일어났다.
안에서 뭔가……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선배님.”
“……말하게, 유리디아 양.”
“만약, 아카데미 학생들을 제물로 바쳐 악마를 소환하려는 거면 어떡하죠? 막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앤우드 아카데미는 제국 최고의 아카데미.
부지는 한눈에 담지 못할 정도로 크다.
즉, 모든 학생들을 제물로 바치는 건 불가능하다.
그 숫자에 비견되는 재료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 밑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면요?”
로델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카데미 선생님들도 방학에는 자유 시간을 갖지만, 그렇지 않고 다음 학기를 준비하는 사람도 있었다.
만약, 르앵이 방학 동안 마법진을 그리며 밑 준비를 끝마쳐 둔 상태라면?
막아야 한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 르앵의 행동을 저지해야만 한다.
하지만 자신들끼리 할 수 있을까?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상황. 고민은 짧았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네. 싸움이 끝난 뒤에 해도 충분할 테니.”
“예, 선배님. 지원은 저한테 맡기세요!”
빠밤! 유리디아 드 로운터가 파티에 합류했습니다!
……라는 문구가 떴을 거다. 이게 게임이었다면 말이다.
‘뭐, 사실 르앵은 오른팔을 컨트롤하지 못해 폭주하는 중이지만.’
아카데미 학생들을 제물로 바친다는 계획 같은 건, 그들의 착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뭐, 저렇게 착각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럼 진입하겠네!”
다다다다다-!
로델린 파티가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와 동시에.
뽈깍!
우리의 지휘관 레제가 상자 뚜껑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뽈깍!
나와 루나도 상자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르앵의 개인 훈련장. 그곳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후후후.”
모두 계획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