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00
100화 ep32. 바다의 도시, 해적의 꿈 (4)
이곳, 잊힌 도시는 처음부터 바닷속에 지어진 게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 내는 풍화에 고스란히 부딪힌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지상에 만들어진 도시는 해류를 견뎌 낼 수 없었으니까.
눈을 뜬 거인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도시의 영광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았지만, 그게 이 도시에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오래전 전쟁에서 필멸자의 편에 선 거인, 디오네의 표정은 슬픔과 그리움으로 사무쳤다.
품속에서 잠들어 있었던 고래는 꼬리를 천천히 휘저으며, 여유롭게 거인의 품속에서 벗어났다.
고래들은 거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제 주인의 기상에 기쁜 듯, 하나 고래가 가진 여유로움을 잃지 않으며 거인의 주변을 맴돌았다.
호흡이 다시 가빠지기 시작했다.
리리는 자신을 지배하는 이 감각이 뭔지 이제야 깨달았다.
거인 역시 용과 같이 불멸자였다. 그 어떤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사실이었다.
용을 마주했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감각이었다. 키호테가 뿜어내는 태생적 권위는 절제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시대의 지배자로 군림했던 용은 위엄을 정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인은 아니었다. 용과는 달리, 그가 뿜어내는 권위는 너무나 거칠고 야성적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왔다. 눈이 흔들렸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도망칠 곳도, 도망칠 이유도 없었으나 자꾸 뒤로 가고 싶었다.
그 순간 강선후는 거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도 리리의 손을 꽉 잡았다. 리리는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떨림이 멎었다.
강선후는 이 거인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거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강선후는 이 거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거인도 강선후를 아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리리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거인과 필멸자가 서로에게 적대심 없는 눈빛을 보내는 것도, 고대 도시의 주인이 강선후를 바라보는 시선에 친근함이 담겨 있다는 사실도.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디오네는 강선후를 그렇게 내려다보았다.
「……그대를 바라볼 때,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느껴집니다.」
“날 알고 있어요?”
디오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크 벨라는 저를 완전히 풍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디오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시간은 제 도시를 풍화시켰군요.」
디오네는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막 일어난 듯한 그 눈빛에 슬픔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북받쳐오르는 듯한 감정이 디오네의 눈가를 스쳤다가 지나갔다. 디오네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억지로 평온을 되찾은 뒤 말했다.
「제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니, 해소되지 않는 그리움은 마음속에 남아 고통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디오네는 다시 고래를 끌어안았다. 흩날리는 금발 사이사이를 유영하는 고래들이 그녀를 껴안듯, 그 품속으로 들어갔다.
「그대가 무슨 이유로 이 폐허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헛걸음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이 도시의 지하에는 ‘대지의 돌’이 있습니다. 제가 앉아 있는 왕좌의 아래에 그곳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습니다.」
리리는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강선후는 태양의 돌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대지의 돌은 이 도시의 지하에 있었다.
막대한 양의 모래가 나락을 거꾸로 흐르는 이유가 그 돌에 있지 않을까?
리리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강선후는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럼 우리 초면이라고 치고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디오네는 다시 시선을 내려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저는 거인입니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말이 통하고, 적의가 없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어요? 나 질문 하나만 할게요.”
디오네는 그저 강선후를 내려다보았다.
“왜, 계속 이 도시에 있어요? 딱히 어디 묶여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
디오네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왜 나는 계속 이 도시에 있는가?
몇 번의 로크 벨라가 울리든, 어떤 시대가 시작되든, 왜 이 폐허에 계속 남아 고생을 사서 하는가?
디오네는 생각지도 못한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건, 디오네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어째서 나는 여기에 남아 있는가?
휘이이이—
그 순간, 고래가 울었다.
마치 디오네의 기억을 끌어내려는 것처럼.
디오네는 억지로 대답을 끄집어냈다.
「지상은 제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입니다. 이 시대는,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까.」
“하지만요.”
이 시점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던 뱀파이어가 나섰다.
뱀파이어는 아직 두려움을 지우지 못했으나, 용기를 내고 있었다.
“당신 같은 존재가 그러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디오네는 리리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이들은 그에 걸맞은 보답을 받아야 해요. 왜 아직도 이렇게 있는 거예요? 나가서 자유를 찾으면 안 되나요?”
강선후는 다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삐이이이—
이전보다도 훨씬 많은 고래가 머리 위를 수놓고 있었다.
그동안, 리리는 계속해서 용기를 내고 있었다.
“당신은 이곳에 최후까지 남았습니다. 당신은 거인이지만, 다른 거인처럼 악하지 않아요. 당신은 거인의 본성을 극복해 냈어요.”
「……그 영광은 지난 지 오래입니다. 최소한 이 시대의 영광은 아닙니다.」
“엘 로크라 벨라가 울렸습니다. 황금의 시대가 열렸어요.”
처음으로 디오네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디오네는 늘어트렸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황금 왕좌의 주인이 다시 나온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이 기다리던 그 시대가 다시 왔잖아요? 밖으로 나가서 빛을 보세요. 의미 없는 고행을 끝내고, 누려야 할 걸 누려요.”
「…….」
“당신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요.”
정신 없이 이야기하면서도, 리리는 자신이 뭘 말하고 있는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숙명이든 신념이든,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들이 그에 응당한 보답을 받지 못하는 모습을, 그녀는 항상 참을 수 없었다.
강선후는 그 이야기를 가만히 경청했다. 그러면서도 역시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삐이이—
고래가 울었다.
디오네는 생각했다.
왜 여기 있었는가?
기억하려 하자, 문뜩 그 시절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디오네는 그때의 감정을 떠올렸다.
「나는 이 도시와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이 도시는 내 의미였고, 내 영혼이었고, 나의, 나의…….」
황금의 시대를 관통했던 하나의 단어.
그게 떠올랐다.
「나의 뜨거운 빛이었으니까.」
그게 디오네를 이렇게 만들었다.
“후회하세요?”
강선후는 오직 이것만을 물었다. ‘이 선택을 후회하는가?’
디오네는 이 질문에 대해서는 확실히 대답할 수 있었다.
「전혀.」
강선후는 그 대답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디오네의 왕좌 아래로 내려가, ‘대지의 돌’을 가지고 올라왔다.
삐이이이—
다시 고래가 울었다.
“그럼, 당신의 맡은 바를 이제부터 다시 하면 되겠네요. 이 도시를 계속 수호해 주세요.”
「여기는 더 이상 도시가 아닙니다. 폐허지요. 제가 지킬 더 남아 있지 않아요. 근데 뭘 지키라는 말입니까? 날 모욕하는 건가요?」
디오네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치부를 스스로 들추는 것 같아 조금 격앙되기까지 했다.
강선후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정말,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하세요?”
디오네는 처음엔 강선후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자, 보지 못했던 게 보이기 시작했다.
고래들이 모여 그녀를 위로했다. 이 고래들이 그녀를 섬길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해수면까지 이어지는 등대를 만든 기억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저런 걸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처음 저 등대를 봤을 때,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도시에 저런 등대가 있을 이유가 전혀 없는데, 마치 누군가 발견해 주길 원하는 것처럼 악착같이 해수면에 연결되어 있었으니까요.”
「대체 누가.」
“이 도시가, 당신을 위해서 스스로 움직였어요.”
디오네는 도시를 둘러보았다.
도시였던 폐허는 풍화되어 산호로 뒤덮여 있었다. 과거 자신이 기억했던 그 영광은 사라졌다.
디오네는 그 영광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당신이 이 도시를 사랑한 만큼, 이 도시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당신이 포기하지 않으니 이 도시도 포기하지 않았네요.”
디오네는 이 인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뭘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강선후는 그동안에도 계속해서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디오네도 위를 바라보았다.
삐이익—
어느새, 잔뜩 모여든 고래.
그 고래들은 어떤 룬 문자 형상을 만들어 허공에 고정하고 있었다.
“저 고래들이 지금 만든 룬 문자,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원래는 없었던 단어예요.”
「원래는 없었던 단어?」
룬에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는가?
룬이 창조될 수가 있는가?
디오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 말대로, 고래들이 만들어 낸 룬은 그녀가 알아볼 수 없는 종류였다.
“그래서 이해하는 데 한참 걸렸어요. 하마터면 이해못할 뻔했네요.”
강선후는 ‘대지의 돌’의 껍질을 칼로 얇게 벗겨 내었다. 그 조각이 땅에 떨어졌다.
강선후는 품속에서 숲의 씨앗을 꺼냈다.
리리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지의 돌 조각에 숲의 씨앗을 올리자, 솜털 같은 뿌리가 살짝 나와, 조각을 가볍게 안았다.
리리는 이 씨앗이 자라 뭐가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직 강선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리리.”
“……응.”
“너는 이 거인이 바깥의 빛을 보기를 원하는 거지?”
“……이 거인이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어.”
강선후는 고개를 들었다.
“디오네.”
거인은 그저 강선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계속해서 이 도시의 수호신을 하고 싶은 거죠?”
「……그게, 내 뜨거운 빛이니까.」
강선후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고래들이 그려 낸 룬 언어는 단순히 바닥에 그려질 수 있는 평면 형태가 아니었다.
고래들이 그려 낸 룬 언어는 입체적이고 아름다운 도형 그 자체였다.
영원에 가까운 시대 동안 한 거인의 사랑을 받은 도시는, 거인에게 보답하고자 했다.
최소한, 자신을 사랑해 준 거인이 실망하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거인의 의지는 도시의 의지가 되었으며.
도시의 의지는 기적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게.」
디오네는 불멸자의 권능으로, 고래가 만들어 낸 룬에 내재된 힘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죠?」
“가능해야지. 당신이 그렇게나 고생했는데. 리리 말대로 그 고생을 했으면 그만한 보답을 받아야 하는 거니까요.”
「그게 말한다고 이루어지는 일인가요?」
저런 말을 당연하게 해 대는 인간을 디오네는 이해할 수 없었다.
허황된 꿈을 좇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었다. 이 인간은 꿈에 젖어 현실을 보지 못하는 걸까?
강선후는 말했다.
“그게 말한대로 이루어지는 시대가 돌아왔으니까.”
강선후는 반지 낀 손으로 위를 가리켰다. 그의 손에서 룬 문자 하나가 쏘아져, 고래들에게 향했다.
고래들이 만들어 낸 룬 문자, 그곳에 강선후의 시동어가 조합되며, 하나의 아름다운 기적이 되었다.
숲의 씨앗은 해저 바닥 아래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그건 파고들고, 또 파고들었다. 신의 시체가 놓여진 그 깊은 곳에 거의 닿을 정도로.
줄기는 이 도시를 감싸안았다. 거기에 필요한 에너지는 바다를 보라색으로 비추는 거대한 마력과 대지의 돌에서 가지고 왔다.
고래들은 일제히 자리를 비켰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푸르게 빛나는 룬 문자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저 위에는 당신이 지켜 줬으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거대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새로운 수호신이 되어 주세요.”
* * *
베두헨들은 어제와 같은 오늘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파도 치는 모래 위를 내달렸다.
크라켄이 죽은 덕분에 끊긴 교역로를 복구할 수 있었다. 이건 오래전 잃어버린 풍요를 다시 되찾을 기회가 되겠지.
하무디는 교역품으로 가득찬 배를 이끌고,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락을 차지한 괴물이 사라졌으니, 북동쪽의 소왕국과 교류를 재개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저, 상단장님!”
상단원 중 하나가 갑판 위 모래를 쓸다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 하무디를 불렀다.
“문제 있나요?”
“아뇨, 그, 뭔가 흔들리지 않습니까요?”
“배가 흔들리는 게 문제라도……?”
“제가 배 한두 번 타보는 게 아닌디, 그런데 이건 뭔가…….”
그 순간이었다.
촤아아아악—!
어마어마한 물줄기가 저 멀리 나락이 있는 곳에서 솟아 올랐다.
물줄기는 거의 하늘에 닿을 정도로, 화산이 폭발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끝을 모르고 솟아 올랐다. 태양빛을 가렸으며, 순식간에 소금기 가득한 비를 내렸다.
하무디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좋지 않은 상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크라켄……?”
크라켄이 다시 살아온 건가? 하무디는 영웅이 나락 아래로 내려갔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혹시, 그 아래에서 영웅이 홀로 크라켄과 싸우다 패배한 것인가? 그리고 복수심에 가득 찬 그것이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 것인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저게 뭐야. 거인인가?”
“아니야. 저건…… 도시?”
“저 나락 아래 물이 있었다고?”
상단원들은 자신의 일마저 잊고 갑판 위에 우두커니 선 채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누구도 전방을 주시하지 않고 있었다. 하무디마저 그 책임을 물을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쏴아아아아——
생전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막대한 양의 폭포가 나락으로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폭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줄기 위에 안착된 도시에서 시작되어 있었다.
도시 가운데에는 거대한 분수가 있었다. 나무 줄기가 아래에 있는 물을 끊임 없이 끌어올리고 있는 걸까.
나락 아래에서 솟아오른 정체를 알 수 없는 도시.
하무디는 볼 수 있었다.
그 중앙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는 한 아름다운 거인을.
너무 멀어 제대로 볼 순 없었으나, 거인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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