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04
104화 ep33. 꽤 오래 비웠던 집 (2)
룬은 쓰다 보면 조금씩 그 원리를 이해하게 된다. 당연한 말이라고 느껴질 수 있지만, 풀어 설명하자면 조금 다른 의미가 된다.
요리를 아무리 많이 해도 손끝에서 맛이 느껴질 리가 없지만, 룬은 계속 사용하다 보면 손끝에서 그 작용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지기 시작한다.
바닷물에 설탕을 한 스푼씩 타는 것처럼, 미약하지만 확실하게 룬의 본질에 다가서게 된다. 이건 꽤 매혹적인 느낌이라 중독성을 느낀 이후에는 나름대로 경계를 해야 할 정도였다.
갑자기 이 생각을 왜 했냐 하면, 집행자의 검을 사용한 순간 발동된 미지의 힘에서 룬의 단편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크아아악」
유령이 사라지는 동안 검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한번 이리저리 살펴봐도 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드 부분에 적혀 있는 문자는 리빙 메탈 소환 룬이니까 불멸을 베는 기능과는 관련이 없는데.
「키에에엑」
확실히 나라고 해서 룬에 대해서 다 아는 건 아닌 모양이다.
이것 역시 싫지 않은 부분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면이 있고, 이 검이 그 의문을 해결할 열쇠가 되어 줄 테니까.
「구와아악」
아니 미친놈이.
유령에서 유, 령이 되어 버린 놈은 그 와중에도 끝까지 버텼다. 불멸이 사라진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는 모르지만, 유쾌하진 않겠지.
「키에에에엑—!」
유령은 끝내 사라졌다. 그리고 툭, 흉흉한 빛깔로 빛나는 작은 구슬 하나가 그 자리에 떨어졌다.
당연히 주워 들었다.
그걸 눈앞에 두고 바라보는 동안 이 거리가 정적으로 가득 찼다. 유령이 뿜어내는 흉흉한 소리가 사라진 탓이었다. 어색할 지경이다. 주변 건물들에서는 인기척이 잔뜩 느껴지는데.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사람은 서지아뿐이었다. 단검을 든 채,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 엘프를 보고 있자니 조금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 주변에 유령 놈들 더 없지?”
“어.”
서지아가 단검을 집어넣는 걸 신호로 하나둘, 건물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불안한 생각은 현실이 되었다.
짝짝짝짝—
건물에서 나오며 박수를 치고 무어라 외치는 사람들. 본능적으로 직감한 상황이 펼쳐졌다. 낯 뜨거워지는 걸 참지 못해서 도망치듯 여관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렐릭시나는 입구 근처에 세워 뒀다. 서지아는 내 뒤를 따라왔다.
이 여관 안은 지금 차소희와 진서연, 그리고 여관주인 윤민지와 헤드폰을 쓴 엘프 서지아뿐이었다.
“……용이랑 대화를 나누고, 정령을 끌고 오고, 와일드헌트를 붙잡아 애마로 삼더니, 이제는 유령을 벤 검사가 되었네? 다음에는 뭐야? 거인의 심장이라도 가져올 생각이야?”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거창한 거 같은데?”
“하나라도 과장한 거 있어?”
서지아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우리는 인사조차 넘기고 한동안 그 이야기로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누가 촬영만 안 했으면 좋겠는데.”
“그럴 리가 있어? 인스타 난리 났다, 이제. 우리 선후 인기남이네에.”
차소희는 팔짱을 낀 채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 ‘강선후!’하면서 멀리서 손을 흔드는 차소희의 모습을 상상했는데 이런 식의 재회가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이번에는 꽤 오래 있었네? 얼굴 까먹을 뻔했어. 안 다쳤어?”
“소소하게 다치고 낫고 하면서 돌아다니는 거지 뭐.”
“리리는?”
차소희는 방긋 웃으며 리리를 바라보았다. 리리는 그 모습에 조금 경계하듯 위축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소희는 그런 리리를 면밀히 살펴보다가 손등의 붉은 자국을 발견했다.
“이거 뭐야. 화상 같은데? 썬크림 안 발라줬어?”
“……아, 맞다.”
“아 맞다는 무슨 이 둔탱아! 한창일 애 데리고 다니면서 그 정도도 신경 안 써! 어!”
등짝을 때리려고 하길래 숙련된 솜씨로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농담이야. 당연히 발라 줬지. 발라서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난 거야.”
“……믿겠어. 지켜본다.”
차소희는 뭔가 리리를 아낀다. 이계에서 만났지만, 뭔가 동생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가? 학교 다닐 때도 후배 잘 챙겨 주기로 유명했었지.
“……오랜만에 만났으니 조금 더 감성적일 줄 알았는데. 지구인답게 메말랐네.”
서지아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이놈이 한 번 연락 두절되면 반년씩 행방불명되는 건 이제 너무 익숙해서요. 우리한테는 그냥 분기별 이벤트랄까.”
“아, 권태기구나?”
“그런가? 아하하하!”
차소희는 뭐가 좋은지 깔깔대며 웃었다. 서지아는 꾸밈없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안 죽어서 다행이야.”
서지아는 나를 제외하면, 아마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이계에 대해 제일 잘 알고 있을 테지. 내심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진서연은 자리에 앉은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한 게, 묻고 싶은 게 산더미지만 날 배려하기 위해 꾹꾹 억누르고 있는 게 보여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선후 씨.”
진서연의 눈빛에는 호기심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감정이 같이 담겨 있었다.
“선후 씨 뭔가……. 영화 속 주인공 같아요.”
“영화요?”
“그, 판타지 영화 속 주인공이요.”
그제야 진서연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먼지투성이에 조금은 지저분한 탐험 복장. 이런저런 개조를 거쳐서 현대 지구 복장이라기보단 이계의 모험가 복장에 가까워져 있는 모습.
거기에 한쪽 손에는 기사가 건네준 검을 들고 있었다.
“…….”
검을 다시 보석의 형태로 바꾸었다. 그 장면을 제대로 본 건 처음인 차소희와 진서연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황금 지침에 끼워 넣는 것까지 바라보았다.
“……너 왜 혼자 재밌는 거 하고 살아?”
“그러게. 다음에 따라갈래?”
“됐어. 나는 오래 살래.”
그러더니 흐흐 하고 웃는 차소희.
“어서 와.”
“고생했어요.”
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는 아직도 조금은 어색한지, 살짝 눈치를 보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 여관 주인 윤민지가 다가와 컵을 내밀었다.
“커피?”
우리 모두가 거절하자, 윤민지는 호로록거리면서 다시 뒤돌아 카운터 쪽으로 갔다.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차소희가 말했다.
“서연 씨.”
“네?”
“그, 이번에 코드 바이올렛 발령된 상태라고 했잖아요.”
“그렇죠?”
“그거 언제 해제될까요?”
“바로는 안 되죠. 지난번 용 사태랑 비슷할 거예요. 내일 오전쯤 해제되지 않을까요?”
“그럼, 난 오늘 밤도 여기서 대피 중인 거네?”
차소희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두가 눈치챘다. 진서연은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법인카드 안 들고 왔어요.”
“우리 선후가 쏜다! 안주는 내가 삼!”
“……나 이번에 술 가지고 온 거 있어. 그거 먹어 볼래?”
“사막에서 만들어진 거?”
고개를 끄덕이자, 차소희는 벌써부터 흥분하기 시작했다.
“어! 먹어 볼래!”
“나 우선 짐 풀고, 씻고 다시 올게.”
다들 여관에서 기다릴 줄 알았는데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올 생각인가? 굳이?
“…….”
신경 쓸 필요 없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왠지 이 사람들의 표정에서 일말의 기대감이 느껴졌다. 서지아마저 그러니 뭔가 있나 싶었다.
그리고 내 오두막, 아니 정확히는 내 오두막이 있던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기억해 냈다.
이번에 떠나기 전, 정지훈에게 했던 부탁을 말이다.
“……내가 그렇게 오래 자리를 비웠나?”
“우리나라 몰라? 두 달이면 건물 두 채는 올린다고.”
차소희가 건물을 올려다보는 내 옆에 나란히 서서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올려다보았다.
“어때?”
“……내가 정지훈한테 부탁을 하고 갔던가?”
차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서연이 다가와 첨언했다.
“조금 애매하게 말씀하고 가시긴 했는데, 우리끼리 머리 맞대고 선후 씨가 뭘 원할지 고민해 봤어요.”
“OWIC에서 뭘 지으려고 했는지 알아? 무슨 빨간 벽돌 같은 걸로 저택을 지으려고 했다니까? 내가 아주 뜯어말리느라 고생 좀 했어.”
눈앞에 있는 건 나무집이었다. 내 손으로 직접 지었던 오두막이랑 비슷한 분위기였으나, 다 쓰러져 가는 이전의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딱 봐도 질 좋은 나무를 쌓아 만든 벽, 규모는 네 배 정도로 커졌고, 내가 보고 있는 소박한 창문은 2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당은 다듬어져 있었고, 나무로 된 테이블과 의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리리의 텃밭은 한쪽에 자리 잡혀 있었다. 그곳에는 온갖 연금술 재료가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조금 방치된 느낌이지만, 다듬으면 멋진 텃밭으로 금방 돌아올 터였다. 바로 옆에는 물을 끌어 올려 사용하는 급수대가 있었다.
마당을 둘러싼 간이 울타리는 넘어 다니기 쉬워서 방범용은 되지 못했으나, 덕분에 본래 가지고 있었던 개방감이 온전하게 유지되어 있었다.
여전히 그렇게 큰 모습은 아니었다. 나무로 된 단문을 열고 들어가자 경첩에서는 끼이익 소리가 정겹게 울렸다.
안쪽은 어두웠다. 그런데, 갑자기 바닥이 희미한 청록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마루의 틈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잘 지냈어? 셀피.”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우리의 주인.」
셀피의 발전기는 이 건물의 지하실로 옮겨진 모양이었다.
안쪽은 손님을 맞이하는 작은 접견실이 있었다. 평소에 사무 공간으로 써도 될 법한 공간이었다.
다음 방으로 넘어가자 큰 휴게실에 가죽으로 된 소파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개의 방. 작업실과 연구실로 쓰면 딱 좋을 만한 위치다.
“위층은 침실이야. 방 두 개에 침대는 세 개. 아직 가구는 안 들여왔어. 꾸미는 건 네 몫이니까.”
내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차소희는 나를 바라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다 지시한 거야?”
“나 말고 네 취향 아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 말을 듣고 뒤에서 진서연이 웃었다.
“완전 까다로웠어요. 나중 가서는 책임자가 소희 씨 얼굴만 보면 흠칫흠칫 놀랐다니까요.”
화려하지 않았다. 이전에 직접 만든 오두막의 소박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직접 지었을 때보다 훨씬 더 정겨운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벽 한쪽에 뚫려 있는 벽난로로 다가가 바라보다가 말했다.
“……좋은데.”
“오예! 봤죠? 내가 만족할 거라고?”
“소희 씨 말이 맞았네요.”
차소희는 서지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만 원!”
서지아는 그런 차소희를 빤히 바라보다가,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 지폐 두 장을 건넸다. 뭔 내기를 한 모양이네.
“흐흥~ 지아 씨는 엘프면서~ 무슨 대리석으로 벽하고 바닥을 깔자고~”
“……그게 예쁘잖아. 요즘 집 다 그렇게 짓는다고.”
“완전 K-엘프로 타락하셨네요. 엘프면 엘프답게!”
“그거 인종 차별이야.”
투덜대는 서지아를 뒤로한 채 차소희는 다시 멍하니 서 있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맘에 들어?”
“……괜찮네.”
“다행이야.”
내심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차소희의 표정이 더 뿌듯한 것일 수도 있지.
내 머릿속에는 이미 작업대와 가구 배치에 대한 경우의 수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리.”
“응.”
리리도 멍하니 건물 내부를 살펴보고 있었다.
“짐 풀자. 수도도 연결되어 있어요?”
“응. 욕실하고 화장실도 분할이야. 개쩔지?”
“리리 먼저 씻어. 짐은 내가 풀게.”
리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가방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을 대충 풀어서 창고에 넣었다. 생각보다 더 넓은 창고 크기가 만족스러웠다. 내가 한 번 탐험을 가면 이것저것을 가져온다는 걸 고려한 모양이었다.
대략적으로 당장 정리할 수 있는 것만 풀어 낸 뒤, 나머지는 다시 가방에 넣었다. 제대로 된 정리는 내일 하면 되겠지. 이제 앞으로 한동안은 다시 여유로울 테니까.
그렇게 다시 휴게실로 나왔다. 불을 켜자 이곳저곳에 설치되어 있던 조명이 환하게 밝혀졌다.
차소희는 벌써 소파에 누워 있었고, 진서연은 이번 기회에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거 소파 짱 푹신함!”
“OWIC이 이렇게까지 해 줄 줄은 몰랐는데.”
“빚이라고 생각하세요. 예전에 와일드헌트, 기억하죠?”
진서연 덕분에 떠올렸다. 그때 본부장을 만났었지.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OWIC이 나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는 걸 몇 번 느꼈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지.
렐릭시나를 보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려는 찰나.
쿵쾅, 우당탕—!
위층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넉넉한 복도에 두 개의 침실, 그리고 복도 끝에 욕실로 보이는 방문이 있었다.
방문은 조금 열려 있었고, 안쪽에서 수증기가 뭉게뭉게 나오고 있었다.
차소희가 앞서 다가갔고, 그 뒤를 내가 따라갔다. 차소희가 먼저 안쪽을 바라보고는 날 제지했다.
“소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으면 거기서 멈춰.”
나는 그 말을 이해하고, 그 자리에 멈췄다. 차소희는 조심스럽게 안쪽에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야?”
“뜨, 뜨거운 물이 나와…….”
리리는 더듬거리는 한국어로 조급하게 말했다.
뜨거운 물?
뒤늦게 따라온 서지아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이계는 온수 같은 거 없어.”
“이거 뭐야? 룬? 룬이야?”
“……리리, 그거 돌리면 차가운 물도 나오니까, 온도 맞춰 봐. 아니, 내가 알려 줄게 그냥.”
차소희가 안쪽으로 들어갔고.
“이렇게 된 거 언니랑 같이 씻을까? 아니, 그렇게 반응할 필요는 없지 않아? 쫌 상처 받음…….”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계단을 내려가 바깥으로 나왔다.
렐릭시나는 마당 한편에 배를 깔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중에 침대 하나 만들어 줘야겠네.”
건초를 쌓아 주면 되겠지. 예전에 이계 조난 생활 시절에는 나도 그런 침대에서 자곤 했다. 다르게 말하면, 흔들림 없는 침대 회사도 안 부러울 건초 침대를 만들 자신이 있다는 거다.
그렇게 생각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탐험을 막 끝내고 돌아온 터라 피로는 무겁게 몰려왔다. 하지만 동시에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새로 만들어진 내 안식처를 바라보고 있자니 더 그랬다.
문 옆에 금속 간판이 있는 무언가를 방금 발견하고 다가갔다.
무릎 높이로 새워진 철봉 형태의 나무 구조물 가운데에, 쇠사슬에 매달린 간판이 끼익거리며 그네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탐험가 길드 사무소>
그곳에 적힌 걸 읽고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