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08
108화
ep35. 남쪽으로 향하는 이유 (1)
* * *
황금 지침을 꺼내서 바라보았다. 다음 행선지는 남쪽.
정확히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침이 있으니 방향은 큰 문제 없더라도 거리는 대략적으로라도 파악해야 했지.
“서연 씨. OWIC이 유일하게 진출한 곳이 남쪽이라고 했죠?”
“네. 이계의 독기가 유독 약하기도 하고, 남쪽은 인적이 드물기도 하거든요. 우리가 활동하기에 여러모로 좋은 상황이라네요.”
“그럼 남쪽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대로 줄 수 있어요? 사례는 할게요.”
“사례는 필요 없지만, 흠…….”
진서연은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저는 연구원이라 잘 모르니 지훈이한테 한 번 이야기해 볼게요.”
진서연은 이 말을 끝으로 차원문을 넘어 지구로 돌아갔다. 그리고 차소희는.
“좋은 아침!”
“아침은 무슨 우리 점심 먹은 지 두 시간 지났어.”
“나도 밥! 먹을 거 남았나? 가서 사 올까?”
며칠째인지 모르게 2층에 눌러앉아 있는 차소희가 리리와 함께 계단에서 내려왔다. 둘 다 같은 브랜드에 색깔만 다른 츄리닝 바지에 집업 재킷을 세트로 입고 있는 게 좀 웃기게 보였다.
“너 집에 안 가도 돼?”
“쫓아내는 거야? 으어엉 나 너무 슬퍼어엉.”
“아니 그건 아닌데.”
차소희는 방긋 웃으며 냉장고를 열었다.
얘가 청소 등을 해 주는 덕분에 짐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나는 그저 그 건강과 개인사가 신경 쓰였을 뿐이었다.
“회사는?”
“나 잘렸지롱.”
“잘렸다고?”
괜한 걸 물어봤나 싶었는데, 차소희는 담담한 태도였다.
“이번에 회사 사정 많이 안 좋아져서 자꾸 꼽 주더라고. 물론 그런 걸로 뛰쳐 나갈 정도로 내가 철없는 건 아닌데 권고사직은 쩔 수 없더라.”
그렇구만.
회사를 잘렸다는 이야기가 유쾌하지 않게 들리는 건 당연했는데, 차소희의 표정에서도 걱정이 조금 엿보였다.
하지만, 녀석은 언제나처럼 활기찬 태도를 유지했다. 저런 걸 보면 확실히 아버지인 차태식 씨를 닮긴 했다니까.
“모아 둔 돈도 있고, 커리어도 있으니까 재취업이 안 되진 않겠지.”
이계 회사들이 말하는 커리어라는 게 도통 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굳이 사사건건 관심을 둘 생각도 없고.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너 독기 때문에 이계에서 사흘 있으면 하루는 지구에서 쉬어야 한다며. 지금 며칠째야?”
“어, 닷새인가?”
“문제없는 거야?”
소파에 앉아 있었던 서지아가 대답을 대신 했다.
“두어 달 전부터 베이스캠프의 독기가 점점 옅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아. 이제 좀 견딘다 싶은 인간들은 차원문 넘어와도 잠깐 멀미만 하는 정도라는데.”
“왜?”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기 때문이지 않을까?”
서지아는 머그컵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날 가리켰다.
“최근 이계 쪽에서 변화가 생겼다고 하면, 대부분 자기 때문이니까.”
“뭐, 그런가.”
“읏차!”
그 사이에 차소희가 소파에 몸을 던졌다. 서지아가 들고 있는 커피가 출렁거렸다. 서지아는 엘프 특유의 민첩함으로 그걸 수습하면서도, 차소희를 바라보며 살짝 인상을 썼다.
차소희는 그런 서지아와 눈을 마주치더니 낄낄 웃으며 얄밉게 혀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다시 내게 말했다.
“선후야. 너 지구 넘어가면 좀 놀랄지도 몰라.”
“놀라다니?”
“인플루언서라고는 아나? 우리 선후 너무 옛날 사람이라.”
“음…….”
옛날 사람이라는 말이 너무 꼬운데, 저 단어가 익숙하지 않은 게 사실이라 너무 분했다. 그래도 모르진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구글에 너 검색하면 관련 기사, 관련 포스트 관련 유튜브 영상이 몇 개나 나올까?”
“……대답은 안 들을게.”
“감은 잡았나 보네. 이계 렉카 유튜버들이 네 얘기 엄청 다뤄.”
“나쁜 이야기는 없지? 있어도 상관없긴 한데.”
“당연히 없지. 이계 사냥꾼 키워드 들어가면 그냥 조회 수 보장이라니까.”
“사냥꾼?”
소파에 애매한 자세로 엎드려 있던 차소희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너 별명. 사람들이 너 본명은 잘 모르니깐 대충 그렇게 불러. 스캐븐 울프에, 이번에는 유령에, 그 뭐냐 와일드 헌트에……. 완전 싸움꾼이잖아. 그게 약간 로망을 자극하나 보든데?”
탐험가가 아니라 사냥꾼으로 비춰지다니.
“……나는 싸우는 거 싫어하는데 말이지.”
멍하니 앉아 있었던 리리가 괴상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서지아도 대충 비슷한 눈빛이었다. 왜 저렇게 봐?
“동물원 호랑이가 비건 선언하는 게 차라리 더 설득력 있겠네.”
지구에 과적응한 K-엘프를 애써 무시하며, 사진을 꺼내 바라보았다.
창백한 청록빛으로 빛나는 공기, 만지면 동상에 걸릴 것 같은 흙 위에 오랜 기간 방치된 공동묘지.
존슨은 그 배경에 어우러져 있었다.
분명 찍을 당시에는 웃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웅크린 채 자는 모습이었다.
“신기하네.”
유령을 찍은 사진은 신기하다. 영상처럼 자연스럽게 재생되는 것도, 사진처럼 고정된 화상인 것도 아니었다.
멈춰 있는 것 같다가도 가끔 꺼내 보면 그 장면이 바뀌어 있었다.
이 안쪽의 안락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게 참 다행이란 말이지.
* * *
오랜만에 밀린 일을 처리했다. 청소나 가구 정리 같은 일들을 제외하고서라도 할 게 많았다.
전부 시시콜콜한 일들이었다. 지구로 건너가 재산으로 잡힌 이계 쪽 건물에 대한 세금 문제를 해결하고, 계좌도 몇 개 더 만들었다. 나도 엄연한 이계 사업자니 사업자 등록을 하고 계좌가 필요하다더라.
너무 소홀했으니 조금은 더 현실에 충실할 필요는 있는 거지. 가끔은 잠시 꿈에서 멀어지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그래야 꿈이 즐겁다는 걸 계속해서 알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나로서는 현실도 퍽 나쁘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옛날에는 현실이라는 단어를 생각만 해도 답답했는데.
이유는 단순하고, 말이 무색할 정도로 간단하다.
<잔액: 235,311,004원>
여행을 떠난 사이에 해결한 의뢰 몇 개의 잔금이 들어와 있었다. 다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음…….”
소파에 누운 채 통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걸 신경 안 쓰는 내가 너무 소홀한가?
물론 내가 지구인보다는 이계인에 가까울 정도로 지구와는 관련이 없이 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멀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렸을 때는 이런 문제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잘 곳이 없다면 공원 벤치에서 하룻밤 때우면 된다는 마음가짐이었으니까. 실제로 그랬던 적도 있고.
물론 남들이 말하는 어른이 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지 않겠다는 이유로 가진 걸 밑 빠진 독처럼 방치하는 건 철없는 행동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문 바깥에서 차소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뢰는 이게 전부고……. 오래 안 걸릴 거 같아요. 금방 연락드릴게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내가 잠시 지구에 갔다 온 사이에 의뢰 상담자가 방문해 있었다. 차소희가 그 사람을 상대하는 중이었고, 어렵지 않은 사항이라 본인이 다 끝내겠으니 들어가서 쉬라고 말했었지.
차소희는 종이 한 장을 들고 거실로 들어왔다.
“발광 버섯 다섯 개. 스타트업 제약 회사인데, 이번에 뭐 약 같은 거 만들려고 하나 봐. 연구용이래.”
너무나 자연스럽게 서류를 검토하며 책상 위에 올려 두는 차소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봐? 오늘따라 화장이 잘 먹었나?”
어디 괴담 속에서 나올 것 같은 숲속 오두막이 아니라 진짜 번듯한 건물과 전용 업무실까지 생겨 버리니, 뭔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벌 수 있는 돈을 포기할 필요가 있나? 신경을 안 써서 그렇지 한 번 탐험을 나갈 때마다 들어가는 돈만 수백이다.
흙이 묻은 손을 닦으며 안으로 들어오는 리리를 바라보았다. 며칠 휴식을 취하며 안색이 많이 좋아졌다.
이렇게 돌아와서 쉬고 놀고 하는 것도 전부 지출이다. 나야 여전히 흙바닥에서 자도 만족하지만, 할 수 있다면 고생하는 리리를 위해서 조금 더 안락한 휴식을 보장해 주고 싶기도 했다.
그럼 고집부릴 필요 없지.
“너, 내 동료가 돼라.”
“……?”
게다가 돈으로 돈을 벌기에 충분한 돈이 있었고, 나는 그걸 가속할 능력도 있었다.
“동료?”
“너를 이제……. 음. 뭘로 하지? 이 탐험가 길드의 대리 경영인으로 임명하겠다.”
“초장부터 직급이 너무 높은데? 어, 뭘 해야 하는데?”
“우선 의뢰 받아서 정리하기. 내가 여기에 있는 동안은 틈틈이 할 거니까. 너무 어려운 건 말고 근처에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종류로.”
“다른 건?”
이제까지 탐험에서 얻은 걸 한 아름 꺼내 휴게실에 늘어놓았다.
“이런 거 팔면 돈 좀 되지 않을까?”
차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되는 정도가 아닌데. 한 번 탐험할 때마다 이 정도로 가져온다면 장사만 해도 되겠어.”
“나머지는 이제 네 재량껏 알아서 해 봐. 나 없는 동안 사무실 관리할 사람도 있어야 할 거고……. 계좌하고 비밀번호도 알려 줄게.”
회계부터 경영까지 차소희에게 맡겨 버리기로 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만큼 월급은 줄 생각이다. 벌이가 훨씬 많을 게 당연하니까.
너무 파격적이었는지, 차소희는 한동안 입을 벌리고 눈을 굴릴 뿐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서지아가 피식 웃었다.
“이제 꼼짝없이 상사네. 앞으로 깐족거리지는 못하겠…….”
“너라고 자유로울거라 생각하나?”
“……?”
“입사 지원서 들고 와.”
“아니, 내 의견을 먼저…….”
“그런 거 없어. 좋소기업이 괜히 좋소기업이냐?”
“…….”
서지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개소리하지 말라며 거절하진 않았다.
얘가 하운드 그만둔 지 꽤 지난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 원래 돈에 대한 집착이 심했는데, 이제 모아 둔 돈도 슬슬 떨어지는 상황이겠지?
서지아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뭘 하면 되는데.”
“정보 요원. 너 하운드 인맥 좀 있다며? 가끔은 OWIC보다 그쪽이 더 도움이 될 때가 있더라고.”
서지아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움직임이 너무 미세해서 하마터면 못 알아들을 뻔했다. 자존심이 끝까지 허락하지 않은 모양이지?
결국 돈 앞에 굴복한 그 모습에 차소희가 꺄르르 웃었다.
“이제 내가 상사네?”
“누구 멋대로 네가 상사야?”
“나는 경영인이잖아요? 최소한 현장직보다는 위지. 자, 서지아. 와서 발부터 핥아 보거라.”
서지아는 그런 차소희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벌써 알려 줄 정보가 하나 있어.”
“벌써?”
서지아는 호로록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잠시 시간을 끌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여관 2층에 삼 주째 묵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어. 당연히 지구인은 아니고.”
이계인이 이 마을에 방문하는 건 간혹 있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오늘 베이스캠프 들르면서 빨간 깃발을 본 적 있었다.
저 깃발은 베이스캠프에 약속된 일종의 신호였다. ‘이계인들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으니, 이계 원주민인 척 연기를 해야 한다.’라는 신호.
그렇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어서, 적당히 지구 물건들만 품속에 감추며 돌아다니면 그만이었지.
“가끔 나와서 남쪽을 바라보는 걸로 봐서 조만간 출발할 생각인 거 같아. 내 예상인데 날씨를 가늠하고 있을지도.”
“멀리 갈 생각인가 보네.”
내 예측에 동의한다는 듯 서지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 없이 혼자 왔고, 종족은 별의 자손이야. 기억하지? 빨간 머리에 눈동자 이상한 친구들.”
기억하지. 북쪽 천공섬으로 여행 갈 때도 한 명 만났었거든.
여기까지는 그렇게 특별할 거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서지아가 그다음 내뱉은 말은 내게 생각을 많아지게 했다.
“지금 OWIC이 그 여자 때문에 꽤 바쁘거든.”
“보통 여행객은 아니란 뜻인가?”
“단검을 입에 물고 있더라고. 절대로 입에서 안 뗀다더라.”
단검을 물고 있는 별의 자손 여성.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나저나, 혼자 왔다고?
“혹시 뱀파이어 동료가 없었어?”
서지아는 이 질문에 살짝 의문을 느끼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