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09
109화
ep35. 남쪽으로 향하는 이유 (2)
여관에 묵고 있다는 별의 자손은 성녀가 분명했다.
“유령 사태 때도 그냥 여관 2층에 눌러앉아 있던 거야?”
“그런가 보지.”
“음…….”
내가 생각에 잠기는 동안 서지아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느낌이 나는 그 눈매가 순간 동그랗게 변했다.
“잠깐, 너 북쪽에 갔을 때 성녀를 만났다고 했지 않았어?”
“그걸 이제 기억하냐?”
“그땐 좀 마신 상태였으니까.”
당시의 취기가 기억을 덮어 버린 모양이었다. 서지아는 조금 더 기억을 더듬다가 말했다.
“저 별의 자손이 그러면…….”
“그 예언자겠지. 진서연도 그때 같이 들었잖아. 진서연도 까먹었대?”
“얘기해 본 적 없어. 기억하고 있을지도.”
서지아하고 진서연은 은근히 일 외적 이야기는 잘 나누지 않는 느낌이었다. 진서연은 서지아를 조금은 특별하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서지아는 진서연을 꽤 경계하는 느낌이었지.
어쨌든 서지아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지금 여관에 묵고 있다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내가 북쪽에서 만났던 성녀, 예언자의 상이라는 것을.
“……지배자의 상이 한 자리에 이렇게 모이다니.”
“문제 있나?”
“이상한 일이긴 해.”
전기포트에서 물이 끓는 걸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리리가 은근슬쩍 말했다.
“열둘의 지배자 중에서 자그마치 넷이 이곳에 있잖아.”
내가 포식자, 리리가 인도자, 서지아가 방랑자랬고, 성녀가 예언자랬나?
서지아와 리리는 이 상황을 꽤 진지하게 여기는 듯했지만, 나는 솔직히 별 감흥 없었다.
“자기는 어떻게 그렇게 감흥이 없을까?”
“뭐가?”
“이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
“우연이겠지.”
“말이 안 되지 않나?”
“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을 몇 번이나 겪어 본 거 같아?”
서지아는 조금 멈칫하다가는 웃었다.
“하, 내가 괜한 말을 했네.”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챙겨 입는 서지아.
“어디 가려고?”
“남쪽에 대한 정보가 필요할 거 아냐. 협회 사무소 한 번 털어야지. 그 잼민이가 아직도 부협회장이려나.”
“잼민이?”
“꼰대 하운드들이 간판용으로 부협회장 자리에 매달아 둔 잘생긴 꼬마애 하나 있거든. 사실 그놈은 철이 좀 든 편인데, 그 친구 놈들이 하나같이 애새끼들뿐이라 싸잡아서 그렇게 불렀어.”
20대 초반이 그런 거친 일을 한다고? 아니, 생각해 보면 그 나이라 가능한 건가.
“하운드 새끼들은 게을러터져서 지금부터 타박질 안 하면 쓸 만한 정보가 제때 안 나올 수도 있으니까.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서지아는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정보를 물어 오기 위해 지구로 갈 요량이었다.
나로서도 막을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았다.
서지아는 문을 나서며 말했다.
“첫 번째 태양이 지고 두 번째 태양이 지평선에 걸쳐 있을 때, 마을 서쪽으로 가 봐. 성녀는 거기에서 해가 질 때까지 남쪽을 바라본다고 하더라고.”
서지아가 나가고 나무 문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경첩이 끼익거리는 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냉동실에서 꺼낸 브리또를 데워서 오물거리던 차소희가 볼을 부풀린 채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했다.
“뭔가, 로망이네.”
“뭐가?”
“너 판타지 RPG 주인공 같아. 모험가 파티가 여관에서 대화 나누는 느낌이었어. 엘프하고 뱀파이어랑 모험 이야기하는 장면. 거의 클리셰 아냐?”
“너도 이제 우리 파티원이야. 행정 업무가 얼마나 중요한데.”
“흐음…….”
차소희는 고민에 빠진 눈치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뭔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나도 아이디어가 있긴 한데,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생각을 좀 정리해 봐야 할 것 같아서.”
알아서 일을 찾아서 하는 직원만큼 좋은 게 없지. 오랜만에 편안하고 깨끗한 곳에서 깨끗한 옷을 입고 늘어지는 기분을 만끽했다. 오후에는 리리와 텃밭을 관리했다. 과하게 자란 약초들의 가지를 치고 씨앗을 새로 심었다.
리리는 이런 작업에 굉장히 열중하고는 했다. 날 따라다니면서 하는 것들은 해야 하는 것이니 했다면, 이건 정말로 좋아서 하는 느낌이 강했다.
오늘은 의뢰 업무도 쉬기로 했으니 차소희도 빈둥대다가 나와서 우리의 일을 도왔다.
“왜에! 나 이런 거 진짜 못하는데, 애기들 죽으면 나 책임 안 져?”
“가서 흙이나 퍼 와. 자, 삽.”
“진짜 악덕 사장이 따로 없네.”
정확히는 내가 도우게 시켰다. 사장, 아니 길드장이 일을 하는데 감히 직원이 소파에서 뒹굴대다니, 참을 수가 없거든.
“집단생활 싫어하는 것 같더니. 길드를 운영하게 됐네.”
시간이 갈수록 한국어 실력이 크게 는 덕에 리리는 이제 한국어를 완전히 알아듣게 되었다. 말하기에는 아직 서툼이 느껴지지만.
그나저나, 리리의 말대로였다. 나는 단체 생활이 도무지 맞지 않아 회사 생활도 거부했었는데.
“사람의 차이가 아닐까?”
“어디든 똑같지. 누구랑 하냐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리리는 넌지시 나이에 맞지 않는 말을 던졌다.
* * *
무소속 마제토 마을.
지구 측 베이스캠프의 위장용 이름이었다. 이계 사람들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OWIC은 위장을 선택했다.
거대한 차원문의 아래를 파서 절반 정도 지하에 묻은 다음, 튀어나온 위쪽 절반은 인공 바위산으로 덮어 가렸다.
모든 걸 완벽하게 꾸밀 순 없었으나, 사소한 틀어짐은 의외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프로파간다로 이계인들의 사고방식을 통제하고, 블랙 요원을 보내서 위험 요소를 기만했다.
아직까지는 성공적이었다. OWIC이 진실을 숨기고 있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으나, 최소한 베이스캠프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여관, 그 주인이자 카운터 담당 윤민지는 지금 앞에 서 있는 특별한 손님을 보고 조금은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여관에는 다른 손님도 많았다. 지금은 하루 일을 끝낸 하운드들이 술을 팔아 주기 시작하는 시간대라 매출에 중요한 시기였다.
가끔은 술병과 잔이 날아다니기도 해야 하는 때인데도, 지금은 정적과 약간의 수군거림만이 가득했다. 여유로운 평일 오전의 커피숍 분위기에 가까웠다.
전부 카운터 앞에서 멀뚱멀뚱 서 있는 이 붉은 머리의 이계 사람 탓이었다.
“어…….”
윤민지는 이계 공용어를 할 줄 몰랐다. 애초에 의사소통은 불가능했으나,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이계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게 큰 의심을 받을 이유가 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대화가 가능한 상대가 아니었다.
베일을 뒤집어쓰고, 수수한 사제복을 입은 별의 자손이 단검을 물고 있었다. OWIC에서 파견해 준 이계어가 가능한 요원이 종업원으로 위장하고 대신 상대했다.
“숙박비를 지불하시면 오늘 하룻밤 더 지내실 수 있습니다.”
별의 자손은 고개를 살짝 돌려 요원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동그랗기 그지없는 그 눈이 표정 변화 없이 움직이기만 하는 모습에 섬뜩함을 느낄 정도였다.
별의 자손은 소지품에서 가죽으로 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줄로 묶인 입구를 연 뒤 안쪽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주머니가 텅 비어 있다는 건 이미 윤민지와 요원 모두가 알고 있었다.
“돈이 없다면 우리도 곤란해요. 여기는 마구간이 없으니까.”
별의 자손은 고개를 들어 요원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신이 차고 있는 목걸이를 벗어 카운터에 조심스럽게 올려 두었다.
“…….”
이게 주신교의 성물이라는 사실을 요원은 알고 있었다. 이전에 방문했던 순례자 무리가 선물로 주고 간 것과 같은 형태였으니까.
그리고, 그 상징물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유령의 습격에서 사람들을 지켜 냈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보통 가치를 가진 물건이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다른 것들보다도 품질이 월등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요원은 순간 놀란 눈빛을 급하게 거둔 뒤, 짐짓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걸로는 조금 부족하겠네요.”
별의 자손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사제복의 안에서 손바닥만 한 책자를 꺼냈다. 요원은 카운터 위에 올라온 그걸 보자마자 눈빛을 반짝였다.
조심스럽게 들어 펼쳐 보았다. 수기로 작성된 그것은 주신교의 성경이었다.
OWIC에서 해석할 수 있는 언어로 이루어진 아홉 주신교의 성경.
이건 굉장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물건이었다.
‘이건 장난이 아니야.’
실적 평가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줄 수 있는 물건.
요원은 동요하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애썼다. 우선 지금은 눈앞의 이계인을 속이는 게 먼저였다.
“이 정도라면 하룻밤 정도는 더 있어도 되겠군요. 좋습니다. 이걸로…….”
그 순간, 여관 입구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사람들 중 몇은 그곳으로 시선이 쏠렸고, 한 번 쏠린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관심을 두지 않다가도, 친구나 동료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쏠려 있는 것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문을 바라봤고, 그들도 역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강선후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듣자 하니 너무하네.”
요원은 이제까지 유지해 온 표정 관리를 끝내 실패했다.
“어…….”
“여관 숙박비가 얼마라고요?”
별의 자손은 조심스럽게 목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동그란 눈으로 강선후를 빤히 바라보았다.
강선후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그는 이 성녀가 놀라서 입에 문 단검을 놓치는 것까지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성녀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강선후는 움직이지 않는 그 눈빛에서 놀람과 반가움, 그리고 당장 해석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읽어 냈다.
“잘 지냈어요?”
강선후는 이계 공용어로 말했다. 윤민지도, 요원도, 그리고 아마 이 카페테리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강선후가 이계어에 능통하다는 사실은 이제 모두가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별의 자손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 순간 요원은 놀랐다.
이 대화는 둘이 구면이라는 걸 뜻했으니.
강선후는 잠시 성녀를 바라보다가 카운터에 바짝 붙어 윤민지에게 인사를 한 뒤, 요원을 정면으로 주시했다.
“정말로 여기 숙박 하루 하는데 이계 보물 두 개가 필요해요? 내가 없는 사이에 물가가 많이 올랐나?”
강선후가 윤민지를 바라보자 윤민지는 과장된 자세로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나는 이 둘이 뭔 말을 했는지 알아들은 게 없어서요. 아니면 우리 요원님께서 나도 등쳐 먹으려고 했나?”
요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윤민지의 말도 사실이기에 부정할 수 없었다. 이 물건으로 숙박비를 대신 받은 뒤, 아무것도 모를 윤민지에게는 그저 웃돈이나 조금 얹어 주고 빼돌릴 생각이었으니까.
“따라와요.”
요원은 강선후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랐다. OWIC이라는 회사를 등에 업은 요원들은 보통의 사람들을 상대로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휘릭—
누군가가 강선후의 행동에 휘파람을 불었다.
성녀와 요원은 강선후의 등 뒤를 따랐다. 강선후는 여관 뒤편에 있는 목장으로 이들을 인도했고, 요원은 쩔쩔매면서도 자신이 그래야만 했던 이유를 변명했다.
“이계인들에게는 원래 폭리를 취하는 게 원칙입니다.”
“왜요?”
“그들이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게 만들기 위한 여러 장치 중 하나입니다.”
강선후는 성녀의 목걸이와 낡은 책자를 손에 든 채,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들이 이곳에서 뭘 하든, 그게 내 앞마당에 침범하는 짓이 아니라면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그런 이유가 있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고요. 그런데, 정말 그 원칙 때문에 이 모든 걸 가져가려고 한 거예요? 정말로?”
강선후의 눈빛은 평온했다. 하지만 이 요원은 이미 교육을 받았었다. 강선후의 표정으로 그 상태를 판단하려 하지 말라고.
그래서, 요원은 빠르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실적을 내고 싶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솔직한 고백에 강선후는 별문제 삼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제가 가지고 갈게요. 어차피 이 별의 자손이 여관에서 묵는 것도 아닐 테니까.”
“저, 그러면…….”
“이 사람은 제 사무소에서 담당할게요. 회사에 보고할 게 있으면 그렇게 보고해요.”
요원은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끝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이번에 방문한 이계인을 이제부터 선후 님이 담당한다고 위에 보고하겠습니다.”
요원은 그 말을 남기고 담담히 자리를 떴다.
강선후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가요.”
성녀는 먼저 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이 따라오지 않더라도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한 자유로운 태도.
몇 달 전에 봤던 그 모습과 일치했다.
* * *
차소희는 부엌 구석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으나, 두 손을 모은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수도복 차림의 여성이 칼을 물고 있는 모습을 보고 겁에 질린 모양이었다.
강선후는 그런 차소희를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녹차 한 잔을 들고 성녀의 옆에 앉았다.
“왜 혼자 다녀요? 그사이에 무슨 일 있었나?”
성녀는 그저 손을 모은 채 앉은 자세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자신의 성물을 바라봤다.
리리는 오랜만에 만난 단검 형태의 악마 앞에서 다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
펜을 꺼내 슬쩍 내밀어 봤지만, 성녀는 그걸 그저 바라만 볼 뿐 응하지 않았다.
강선후는 녹차를 호로록 마시며 한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생각 정리는 언제나 그렇듯 빨랐다.
어차피 질문을 던져서 들을 수 있는 대답이 없으니 쉽고 빠르게 대화를 끝내기로 했다.
“남쪽으로 갈 생각이죠?”
성녀는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강선후를 바라보다가. 그렇게 한동안 그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요.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혼자 가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성녀는 이 대답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 느껴지는 기쁨을 부정할 수 없었으니 그랬다.
성녀는 잠시 강선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강선후도 미소를 지었다.
성녀는 강선후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남쪽으로 뚫린 창문이었다.
성녀, 비바치시모는 생각했다.
마지막 여행의 동행자가 이 남자라면, 자신의 최후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고.
* * *
무단 여행 끝에 돌아온 성녀. 그녀에게 내려질 징계가 정해지기 전날 밤.
주신교회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봉인서가 불타 사라졌다.
이는 남쪽에 봉인되어 있었던 악마, ‘아비를 따라가기 위해 자살한 용.’이 깨어나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그 날 밤, 성녀는 주신교회를 빠져나갔다.
그녀가 다시 사라졌다는 소식에 주신교회는 다시 한번 뒤집어졌다. 모든 건물과 지하실, 천공섬의 아래까지 모두 뒤졌지만, 성녀를 찾을 수는 없었다.
모두가, 성녀가 남쪽으로 떠났다는 걸 유추했다.
명맥만 남은 사제들은 그날 밤 모여서 말썽만 부리는 성녀를 탓했다.
“그 녀석이 대체 뭘 믿고 남쪽으로? 정말 신경 쓰일 일만 골라서 하는구나!”
한 사제는 이제 성녀를 존칭으로 부르지도 않고 있었다.
다른 사제도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말의 책임감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책임감?”
“성녀께서는 본인이 반쪽짜리라는 사실에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입에 물고 있는 악마 하나 정화하지 못했으니까요.”
성녀는 악마를 정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주신교의 보물. 하지만 현세대 성녀는 제대로 된 정화력조차 가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녀가 성녀 직위를 가질 수 있게 된 건 그저 예언자의 상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책임감을 버티지 못한 충동적인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이야기를 꺼낸 사제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남쪽의 악마는 불멸자의 영혼에서 태어났습니다. 불멸자의 힘이 있는 게 아니라면 정화는커녕 제압조차 할 수 없을 겁니다.”
“흐음…….”
“뭐, 콜브’랑데쥬를 몸에 지니고 그쪽으로 떠나는 건 어쩌면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일시적으로나마 거대한 위험이 사라지는 셈이니.”
“급한 불 끄는 게 뭐가 의미가 있습니까? 주신교회가 악마를 정화하지 못한다는 게 드러나면 입지가 작아질 뿐입니다.”
“급한 불을 꺼야 다음도 생각할 수 있는 거지요.”
문밖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는 인물 하나가 있었다.
성녀의 수호기사, 레베카.
레베카는 자신이 지켜 마땅한 자가 어디로 떠났는지 끝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말을 마구간에서 빼돌려 남쪽으로 내달렸다.
수호기사로서의 맹세를, 자신의 숙명을 지키기 위하여.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