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10
110화
ep35. 남쪽으로 향하는 이유 (3)
이계에는 비가 잘 내리지 않았다. OWIC의 기후 보고서에 따르면 딱히 이계라서 그런 게 아니라, 차원문이 열린 이곳이 선선하고 건조한 기단의 영향을 받는 탓이었다.
쏴아아아—
차원문을 넘어가자마자 빗줄기는 야속하게 쏟아졌다. 진서연은 메스꺼운 속을 애써 진정시키며 여관으로 향했다.
“삼만오천 원이요.”
윤민지가 내민 우산을 바라보며 진서연은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삼만오천…… 예전에는 만오천 원이었던 것 같은데요.”
“최근에 위험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서요. 위험 수당이라고 해야 하나.”
편의점에서 사천 원만 주면 살 수 있을 투명 일회용 우산이었다. 진서연은 고개를 들어 윤민지를 바라보았다. 윤민지는 그 표정이 어떻든 아무런 신경 안 쓴다는 듯, 눈을 감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머그컵의 온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 뒤 한쪽 눈만 슬쩍 뜨며 말했다.
“커피나 한잔할래요? 이건 만이천 원.”
“됐어요. 젖은 채로 가서 아련한 분위기로 점수나 따지 뭐.”
“농담이에요. 가져가요.”
미소 하나 띄우지 않고 농담이라는 말을 저렇게 뻔뻔하게 할 수 있다니.
호로록.
윤민지는 커피 한 모금을 머금은 뒤에야 슬쩍 미소를 지었다. 데스크를 밝히는 촛불이 여관이 아니라 점성술사의 집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카페테리아 운영이 끝난 새벽의 이계는 적막했다. 현대와는 달리 밤길이 안전하지 않은 탓에 지구의 낮에 넘어온 사람들도 이계가 밤이라면 움직이기를 꺼려 했다.
질척거리는 거리를 우산 하나 들고 걸었다. 비 때문에 횃불은 없었고, 외부인이 방문한 상황이라 전기등은 꺼져 있었다.
진서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계의 하늘은 구름이 끼더라도 희미한 보라색 빛을 발했다. 운데라의 달빛에조차 미치지 못했으나, 울퉁불퉁한 거리를 걷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마을의 경계를 넘어가는 입구에서 보초병들과 마주치고 끄덕 인사했다. 진서연을 알아보는 그들은 기초적인 보안 절차도 무시한 채, 그저 그 인사에 화답할 뿐이었다.
“내가 퇴사해서 OWIC 소속이 아니면 어쩌려고 그래요?”
“연구원님이 그 회사를 나갈 리가요.”
진서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저 말에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런가?
진서연은 확신할 수 없었다. 길지 않은 시간 내에 강선후가 그녀를 이렇게 바꿔 놓았다. 열정은 남아 있었지만, 회사에 대한 애정은 사라져 갔다.
그들을 지나쳐 마을 울타리 바깥을 걸었다. 저 멀리 강선후의 2층짜리 탐험가 길드 사무소가 보였다.
처음 봤을 때는 그 뻔뻔한 이름에 웃음을 참지 못했지만, 이제는 정말로 번듯한 길드의 모습 같았다. 크진 않지만, 그 내실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부럽지 않을 그런 길드.
진서연은 그 생각에 저도 모르게 대리만족을 많이 느꼈다.
대학생 때도 즐겼던 적이 없었던 그런 여유로운 술자리를 회사원이 되어 이계에서 가질 줄이야.
강선후는 진서연에게 그런 의미가 되었다. 실적과 승진만 좇고 살았던 그녀에게 진짜 원했던 게 뭔지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예상컨대, 이 변화는 앞으로의 인생에도 큰 부분을 차지할 터였다.
어느새 탐험가 길드 사무소가 눈앞에 있었다. 이계의 먹구름이 뿜어내는 희미한 빛만으로는 눈앞에 있는 글씨를 읽기 힘들 지경이었다.
<CLOSE>
딱 봐도 차소희가 고른 것 같은 아기자기한 푯말에 진서연은 미소 지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끼익—
경첩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고, 안쪽에서 조금 더운 바람이 흘러나왔다.
“……?”
아무런 불빛도 찾을 수 없었다.
‘어디 갔나?’
창문을 통해 봤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불빛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다.
진서연은 출입구 바로 옆에 있는 스위치를 올렸다.
찰칵.
“……?”
전등이 켜지지 않았다. 진서연은 의아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호기심이 더 컸다.
또각.
마루바닥을 밟는 신발 소리가 내부에 울려 퍼졌다. 접객실을 넘어 휴게실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희미한 보랏빛이 창문을 넘어 어둠이 깔린 바닥에 카펫처럼 드리웠다.
그리고,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고 나서야 뒤늦게 발견했다.
거실 가운데에 서 있는 어떤 여성을.
우르릉—!
하필 그때 번개가 치는 이유가 뭐였을까? 간혹 세상은 야속한 법이었다.
그 여성의 입에 물려 있는 흉흉한 칼이 보였다.
그 눈이 창백한 푸른빛으로 빛나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서연은 숨을 들이켰다. 손이 떨렸다. 뒷걸음을 쳤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발바닥은 들러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저벅.
가죽 부츠가 마룻바닥을 밟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서연의 것이 아니었다.
우르릉—
그것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으아, 으아아!”
딸깍—
그 순간, 불이 켜졌다.
진서연은 어느새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고, 계단에서 내려온 누군가가 눈을 꿈뻑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소희였다.
“뭐 해요?”
“괴, 괴한…….”
진서연은 손가락으로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그것을 바라보았다.
“……?”
어느새 그것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진서연이 뻗은 손가락을 가볍게 쥐고 있었다.
그 손아귀 안에서 옅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비바치시모가 손을 떼자, 넘어지면서 생긴 상처가 사라지고 핏자국만 남았다.
“뭔데 소란스러워? 차소희 또 계단에서 굴렀냐?”
“아직 술 안 마셨거든.”
윗층에서 공구 상자를 들고 내려오는 강선후와 눈이 마주쳤다.
* * *
“아하하! 커신! 커신이야!”
“…….”
전기 작업을 하느라 잠시 차단기를 내려 놨다는 강선후의 설명을 듣고 해탈함을 느꼈다.
진서연은 젖은 옷을 차소희가 준 츄리닝으로 갈아입고, 핫초코를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얼씨구, 운동부가 따로 없네. 왜 여기만 들어오면 다 츄리닝 꼴이야?”
강선후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츄리닝 3인조를 바라보았다. 둘은 인간이었고, 하나는 뱀파이어였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정복을 입고 있는 건 성녀가 유일했다.
강선후는 진서연에게 자초지종을 대충 설명했다. 진서연은 의외로 성녀의 방문을 아예 모르고 있었다.
“보통 이계인 방문에 대응하는 건 전략기획본부 담당이니까요. 저는 사람 자체에는 크게 관심 없다 보니 모르고 있었네요. 성녀인 걸 알았다면 조금 더 빨리 관심을 보였을 텐데.”
그렇게 말하며 성녀를 바라보는 시선에 흥미를 숨기지 못했다.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은데. 저러니 대화를 할 수가 없네.”
“우선, 서연 씨가 여기 온 이유가 더 중요하거든요?”
강선후의 말에 진서연은 품속에서 외장 드라이브를 꺼냈다. 차소희는 그걸 받아서 능숙하게 빔 프로젝터를 켰고, 하얗게 페인트를 칠한 한쪽 벽에 영상이 재생되었다.
모두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다섯 명의 인간 모두가 각자의 감정을 가지고 영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차소희였다.
“……저거 지구 쪽 군인 아니야?”
“OWIC의 군인이겠지.”
서지아가 말했고, 차소희는 다시 영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액션캠으로 촬영된 영상이었다. 누군가의 가슴 위치에 매달린 것 같은 카메라는 격한 상황을 비교적 정확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촬영자는 각종 현대 병기가 모여 있는 곳을 지나,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를 비췄다.
그곳은 모든 게 검었다. 산도, 안개도, 드문드문 자라난 풀마저 죽음의 기운에 침식된 듯한 모습이었다. 보기만 해도 기침이 나올 것 같이 메마른 대지 같으면서도, 동시에 음흉한 습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지평선은 보이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모래 폭풍이 지평선을 가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 멈춰 선 듯한 모습이었다. 대지를 휩쓸던 폭풍이 어느 순간 정지된 시간 속에 갇힌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 부자연스러운 모습에서 큰 이질감이 느껴졌다.
촬영자는 군인으로 보였는데, 급하게 길을 걷는 그가 도착한 곳은.
“……저거, 포야?”
자주포가 진을 치고 있는 전선이었다.
이 시점에서 알 수 있었다. 이 의문의 부대는 지구인과 이계의 군인이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지구 측 군대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이계의 마법사와 눈빛을 나누었다. 마법사들의 복장에서 제국의 상징물을 엿볼 수 있었다.
자주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카메라가 새차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빠르게 날아간 수십 개의 고폭탄은 저 멀리 검은 먼지 폭풍에 구멍을 숭숭 뚫으며 파고 들었다. 착탄 지점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주황색 불꽃이 희미하게 발하다가는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그어어어어—」
거대한 존재의 울부짖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 존재가, 폭풍 속에서 아주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아마 머리 부분인 것처럼 보였다. 카메라가 뒤늦게 확대되었지만, 그 순간 이미 폭풍 속으로 다시 모습을 감춘 뒤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모두가 그 안에 있는 거대한 존재를 인식했다.
순간 영화라고 느껴질 정도로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하지만 분명 실제로 촬영된 영상이었다.
진서연은 소파에 앉은 채 팔짱을 끼고 영상을 바라보고만 있었고, 차소희는 입술을 꾹 다물다가 한마디 간신히 내뱉었다.
“저게, 뭐야?”
“본드래곤.”
그 순간, 끼익 소리를 내며 휴게실의 문이 열렸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문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방 안을 잠시 가득 채웠다.
흠뻑 젖은 서지아가 들어오며 말하고 있었다. 엘프 특유의 초감각으로 이 안에서 나누던 대화를 전부 들은 모양이었다.
“본드래곤?”
“악마야. 황금의 시대 막바지에 모습을 드러낸 악마.”
서지아는 그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했다.
* * *
본드래곤은 전설이 이어져 내려온 후대에 지어진 별명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말 그대로 뼈만 남은 드래곤의 모습 그 자체였으니까.
산 꼭대기에서 봉우리를 안고 있는 그 존재는 과거엔 그저 화석 취급을 받았다. 산 위에서 바스라져 죽은 용의 흔적이라고 생각했고, 사람들은 한때 그저 산의 일부분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용의 흔적이 아니었다. 모두가 의문을 가졌어야만 했다. 용은 진정한 불멸자고, 불멸의 존재가 죽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거대한 공포였으니까.
용은 생명을 창조한 신의 첫 번째 자손이었다.
그 신은 모종의 이유로 투신하여 죽은 뒤, 이 대지가 되었다.
그들 중 자신의 아버지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의문을 가진 존재가 한 명도 없었을까?
이 악마의 탄생은 예견된 일일지도 몰랐다.
끝내, 한 불멸자가 아비를 따라 스스로를 죽였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전승에는 상상력이 덧씌워지기 마련이었으니, 누군가는 아비가 깨달은 진리를 엿보았기 때문이라 주장했고, 누군가는 필멸자의 지능으로는 알 수 없는 비극을 깨닫고 마음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 원인에 대한 갑을론박은 아직도 이어졌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원인에 있지 않았다.
죽지 않아야 할 불사자의 영혼은, 죽은 뒤에 죽음을 상징하는 악마가 되었다는 사실.
이게 가장 중요했다.
서지아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털어 놨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 산 이계의 종족은 이런 것들에 대해 들은 게 많았다.
“하운드 쪽에서 돌아다니던 이야기로 유추한 건데, 이미 연구원 선생님이 선수를 쳤네. 이 영상은 어디서 얻었어?”
“지훈이가 줬어요. 일 년 전에 촬영된 영상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은 어디서 얻었다는데?”
“……강선후가 남쪽으로 갈 생각이라는 걸 말하니까요. 본부장이 넘겨줬다고 하던데.”
이 정도나 되는 정보를 본부장이 선뜻 넘겨줬다는 사실은 조금 놀라웠지만, 지금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모두가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강선후는 황금 나침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지침이 정확히 남쪽을 가리킨다는 사실에, 서지아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 악마는 불멸자 정도의 힘이 있는 게 아니라면, 접근조차 할 수 없을 거야. 이제까지 만난 것들이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흠.”
서지아는 강선후의 여유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강아지 유령이 찍힌 사진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리리.”
“응.”
“출발 준비 하자. 모레 떠날 거야.”
“응.”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움직이는 그들을, 나머지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말 들었어? 그 악마는 진짜 보통이 아닐 거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