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16
116화
ep37. 남부 접경지대 (2)
리리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 시점에서 리리도 깨달은 모양이다. 저게 좀비 소리가 아니라 학업에 고통 받은 가련한 이들의 신음 소리라는 걸 말이다.
우리는 저들에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위치까지 후퇴한 뒤에 입을 열었다.
“리리.”
“응.”
“저 사람들이 그…… 마탑의 마법사야?”
예전에 들은 적 있었다. 룬 언어라는 게 고대의 비밀이긴 하지만, 딱히 나만의 전유물인 건 아니었다. 당장 리리도 쓸 줄 알고, 성녀도 첫 만남 때 룬으로 만든 조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 쟈니라는 검은 로브의 마법사도 처음 듣는 룬 언어를 사용했었지.
그러니까, 이계에도 룬을 사용하고 연구하는 마법사는 있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을 보니 마법사라는 존재에 대한 내 고정관념이 완전히 부서질 거 같았다.
리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뜸 들였다.
“……글쎄.”
“대답이 좀 애매한데?”
“나는 영지를 벗어나 본 적이 없어. 직접 본 마법사는 날 가르쳐 준 교사뿐이었고…… 나머지는 다 들은 이야기들 뿐이니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마탑의 마법사들은 최소한 교육생 신분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마탑에서 나가는 법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건 언제나 예외가 있기 마련이기에 확신할 수는 없다는 게 리리의 의견이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쟈니의 말에 따르면 생명과 죽음을 연구하는 마법사들은 좀 특별한 면이 있다고 했지.
뭔가 좀 불쌍한데.
우리는 다시 숨을 죽이고 아까 그 방문 건너편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그어어 하고 울던 세 명의 사람들은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보아하니 측면으로 뚫린 문으로 간 모양인데.
그들이 램프도 들고 나가 버려 저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아주 작게 뚫린 창으로 들어오는 창백한 빛만 허공에 흐르는 먼지를 조금 비출 뿐이었다.
“리리. 안에 누가 남았나 확인해 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리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동공이 붉은빛을 발했다.
리리는 영혼의 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사람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누군가 숨어 있는지 탐색하는 식으로 응용할 수도 있었다.
리리는 벽에 딱 달라붙어 한쪽 눈만 내민 채 안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도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리리는 내 뒤를 따라오다가 속삭였다.
“그 보법은 어디서 배웠어?”
“보법? 무슨 보법?”
“기척을 없애는 보법. 나도 배우는 데 한참 걸렸는데.”
“내가 그런 걸 쓰나?”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걷고 있었더라. 그냥 살금살금 걷고 있었던 거였는데.
살금살금도 이계에서는 보법으로 치나.
리리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본인이 모른다니 할 말은 없네.”
나도 대수롭지 않게 넘긴 후, 의자 쪽으로 다가갔다.
아까 그 마법사들이 의자를 둘러싸고 말을 했었던 걸 떠올렸다. 이들의 교수 포지션인 사람은 아마 이 의자에 앉아 있었던 모양이지.
나는 의자 쪽으로 다가가며 룬어를 외었다.
“모스mohs.”
그리고 아무 반응도 없자 멈춰 섰다. 리리와 나는 동시에 그 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다.
“……?”
곧바로 다시 한번 외었다.
“모스mohs.”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가 컨디션이 안 좋나?
“틀렸나?”
“……아니, 당신은 정확했어.”
이제는 내 옆에서 룬 언어를 질리도록 들은 리리가 그렇게 판단했고, 나도 틀렸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이번에는 눈을 가리고 말했다.
“탐-탓사Tham-tatha.”
여전히 내 까만 시야 그대로였다. 이건 주변 생물의 감각을 빌려오는 룬이라, 이렇게 시야가 까맣게 유지될 리가 없는데.
이쯤 되니 확실해졌다.
룬이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눈은 아직 어둠에 적응하는 중이라 시야가 확실하지 않았다. 곁눈질로 봐야 사물의 실루엣이 간신히 보인다.
우리는 그 자리에 엉거주춤 멈출 수밖에 없었다. 조명을 만들 수 없었으니까.
물론 나는 이런 상황을 대비해 놨다. 룬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상황 자체는 고려하지 않았지만, 말을 할 수 없는 상황 정도는 얼마든지 생각해 뒀으니까.
나는 안주머니에서 검지만 한 손전등을 꺼냈다.
그리고 그걸 켜는 그 순간.
방구석에서 벽을 보고 서 있는 검은 물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흐흐흐…….”
사람 크기의 검은 비닐봉투 같은 그것에서 앙상한 손이 나왔다.
그리고 그 손은 벽으로 향했다. 자세히 보니 그곳은 수많은 책이 꽂힌 책장이었다.
“으흐흐흐…….”
우리는 얼어붙어서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우선 1차적으로 내가 아무런 적의를 느끼지 못했기에, 당장 대처를 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간단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리리.”
“응.”
적의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리리는 어느새 허리춤에 달린 나이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영혼의 상을 보지 못했다고 했잖아?”
“당신도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했어? 평소였으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게 아니었다.
분명 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신경 쓰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굉장히 미천한 기척이기 때문이었다. 비유하자면 수명이 다 되어 죽어 가는 토끼와 비슷한 수준이랄까.
그 이야기를 들은 리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겠어. 영혼의 상이 없는 게 아니라, 희미해. 죽기 직전의 사람처럼.”
리리와 나는 보고 느끼는 게 다르다.
그런데, 왠지 결론은 비슷했다. 죽기 직전이라는 감상이 말이야.
우리는 어느새 긴장까지 풀려서 우두커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은 벽에 있는 책을 손으로 훑으며 소름 끼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실…… 나는 이번 게 반려될 줄 알았어. 멍청한 약점이 있었지. 그럴 줄 알고 하나 더 준비했지…… 키킥. 이건 분명 학위감이야…….”
끊임없이 중얼거리던 그는 책 한 권을 뽑아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제야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엄청 곱슬곱슬한 장발을 한 여성이었는데, 볼이 들어가 있고 다크서클은 거의 광대를 넘으려고 하고 있었다.
또한 작은 눈동자인데, 특이하게 푸른 안광을 뿜고 있었다. 최소한 나는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종족이었다.
“이번에 온 신입생이니? 오십 년 전이 생각나네. 나 바쁘니까 잠깐 옆으로 비켜 줄래?”
검은 로브가 펄럭이나 먼지가 푹 일어났다가 소복하게 내려앉았다.
뽑아 든 책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책상 위에 펼쳐 놓는 게, 너무 안쓰러웠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라이터를 꺼내서 횃불에 불을 붙였다. 그제야 이곳에 조금 사람 사는 것 같은 조명이 펼쳐졌다.
“어둠이 익숙하지 않니? 혹시 쟈니처럼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그제야 고개를 들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희미하고 푸른 안광을 발하는 그 두 눈이 내 얼굴을 보고 흔들렸다.
“……인간?”
툭-
그녀가 손에 힘을 풀자, 빳빳하게 펼쳐져 있었던 책이 두둑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시 덮였다.
* * *
그제야 제대로 된 설명을 들었다.
이들의 종족명은 나크샤론. 고대에 죽음을 이해한 최초이자 마지막 네크로맨서, 엘드리치의 은총을 받아 되살아난 이들의 후손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본질적으론 언데드란 말이네요?”
“어, 그게 맞긴 해. 그런데 알아 두렴. 우리는 언데드라고 불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우리의 시조는 언데드였을지 몰라도, 우리는 엄연히 핏줄을 이어받아 태어난 후손들이야.”
“최초에 태어난 언데드의 핏줄이 이어져 하나의 종족이 된다니…….”
리리도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사실이었다.
“인간…… 인간이 여기에 온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그러더니 다시금 이상한 소리를 시작했다.
“인간 신입생이라…… 신선해. 흐흐흐…… 비로소 인간도 생사의 신비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건가? 하긴 당연하지. 엘드리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분이라고 하셨으니까…….”
“저기, 뭔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요. 저 신입생이 아니거든요?”
중얼거리던 나크샤론 여성은 내 말에 잠시 멍 때리더니,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농담도 참. 인간은 농담을 정말 좋아하는 종족이라지. 그래. 너는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겠구나…… 인간은 신의 후손 중에서 가장 죽음에 가까운 존재기도 하고…… 나는 인간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않으니까. 좋은 탐구 소재가 될 거야. 잠깐, 이번 연구에 도움이 될지도…….”
뭔가 정신 상태가 퍽 좋아 보이진 않았다.
“……아니라니까?”
“이 탑은 엘드리치의 상징을 몸에 지니지 않으면 애초에 보이지도 않을 텐데, 자꾸 거짓말할래? 인간의 특징…… 농담을 위해서는 들킬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인간다워…….”
어이가 없어서 나는 그녀가 하는 걸 그냥 지켜만 보았다.
리리가 나를 바라보고 살짝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드러난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재밌을 거 같았다. 내가 신입생인 줄 멋대로 착각하는 대학원생?
못 참거든.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텔라테리라고 소개했다. 특이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되물어 볼 새도 없이 아까 전 덮인 낡은 책을 다시 펼쳤다.
“너 운 좋은 줄 알아. 흐흐, 이건 내가 지난번 조사 때 지하 유적에서 찾아낸 거거든. 근데 이거 서두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알아?”
“글쎄요.”
“죽음을 상징하는 황금의 유물이 바로 이곳에 있다. 그것을 자극하지 말고, 영원히 그곳에서 살도록 두어라.”
이 순간 내 눈이 번쩍 뜨였다. 황금의 유물?
리리와 나는 한 번 시선을 교환한 뒤, 침을 꿀꺽 삼키고는 되물었다.
“그, 안에는 뭐라고 적혀 있던가요?”
“두 가지 문제가 있어.”
“문제요?”
“하나는 중요한 페이지가 여러 조각으로 찢어져 있다는 거고, 하나는…… 찢어진 조각을 찾아봤자 읽을 수 없다는 거거든.”
“룬 언어로 적혀 있던가요?”
내 질문을 듣고 텔라테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룬 언어로 적혀 있는 건 맞아. 그런데, 룬 언어에도 두 가지가 있거든.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문법, 그리고 무언가를 기록해 놓기 위한 문법. 아마 고대인들도 헷갈렸나 봐. 역사책을 펼쳤는데 마법이 사용되면 곤란했을 수도 있고.”
다 아는 사실이다.
“이건 기록용 문법으로 적혀 있어. 그런데…… 우리는 아직 기록용 문법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는 상황이거든.”
텔라테리가 펼친 부분은 룬 문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보통 룬 문자는 원형의 구조를 가진다. 그러니까, 언뜻 보면 만화 속의 마법진과 비슷한 형태가 연상된다.
그런데 간혹 이렇게 일자로 늘어진 형태의 룬 문자를 찾아볼 수 있었다. 나도 모험 중에 여러 번 만났었지.
이걸 현 세대의 마법사들은 ‘기록용 룬 문자’라고 추측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좀 해석 해 봤는데…… 아마 이 죽음의 협곡 근처 어딘가에 있는 버려진 고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견습치고는 문자 해석에 능한 편이지만…… 그래도 그 이상은 무리라.”
“이 문자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해요?”
“대마탑의 주인께서는 가능하다고 하더군.”
그런가.
나는 잠시 침묵하고 책에 집중했다. 글자는 작았고, 중간중간 지워진 부분도 있어서 읽기 어려웠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텔라테리의 다크서클 가득한 눈가에 웃음기가 서렸다.
“학구열이 뛰어난 후배네. 인간이긴 하지만 마음에 들어. 나중에 천천히 같이 연구…….”
“혹시, 그 죽음의 협곡이라는 데가 환각 증상 없이는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에요?”
“……?”
텔라테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빠졌다. 최소한 나는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내 시선은 책에만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맞아. 그걸 어떻게 알았어? 혹시 교수님한테 들은 게 있니?”
“보니까 공명초 뿌리가 필요할 텐데, 그거 여기에서 나긴 해요?”
“……아니. 밖에서 구해 오지.”
나는 안주머니에서 몇 번 접어 둔 쪽지를 꺼냈다.
한동안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쪽지였다. 이건 예전에 리빙 메탈을 얻은 지하 유적의 제단 위에 얹어져 있었던 조각이었으니까.
찢어진 부분에 딱 맞았다.
물론 이거 외에도 몇 장 더 필요한 모양인데, 이것만으로도 읽을 수 있는 문장이 많았다.
“공명초의 연기를 들이마시고 죽음의 협곡 가장 안 쪽으로 향하라. 네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따라라. 그럼 유물이 잠들어 있는 고성에 닿을 수 있으니. 하나, 나는 그걸 원하지 않는다. 유물은 언제나처럼 그곳에 잠들어 있는 게 시대를 위해 옳은 일…….”
아쉽지만, 이 뒤로는 찢어져 있었다.
“여기까지네요.”
한동안 텔라테리는 아무 말도 없었다. 리리는 텔라테리를 힐끗힐끗 보며 웃고 있었다.
우당탕—!
텔라테리가 어딘가로 달려가려다가 의자 다리에 걸려 볼품없이 넘어졌다.
아프지도 않은지, 다시 벌떡 일어나며 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교수님! 교수님!”
“어, 저, 잠깐…….”
“신입생이 미친놈이에요! 천재예요! 나 잘하면 올해 졸업할지도! 교수니이임!”
뭔가, 장난 좀 치고 가려고 했는데…….
“리리.”
“응.”
“튈까?”
일이 귀찮아질 것 같아서 도망칠 생각부터 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