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17
117화
ep37. 남부 접경지대 (3)
리리와 도망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에는 탑 안으로 돌아갔다.
잡히는 과정이 좀 웃겼는데, 탑 꼭대기에서 주변을 감시하던 불타는 눈알이 탑을 떠나는 나를 악착같이 주시하더라.
그리고 방금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나크샤론이 나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그렇게 만만한 놈도 아니고, 그런 추격에 따라잡혔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잡힌 게 아니라 그냥 잡혀 줬다.
“거기 서!”
“제발! 제발 졸업하게 해 줘!”
“내가 잘해 줄게! 응? 설거지 당번은 평생 내가 할게!”
멈추지 않을 수가 없더라. 내심 내가 마음이 약한 편이라는 게 체감되었다.
“……동정심이 있다는 건 동의하는데, 마음이 약한 건 조금 다른 얘기야.”
물론 리리는 그 말에 동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내 성향에 대해서는 리리와 나의 입장이 차이 나는 경우가 잦단 말이지.
다른 사람이 보는 내 모습이랑 내가 생각하는 나랑은 좀 다른가?
뭐, 어쨌거나 내 옷자락을 잡는 그 외침을 듣고 매정하게 그냥 가 버리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리고, 사실…… 이 사람이 나한테 도움이 됐으면 됐지 딱히 방해가 될 것 같진 않았거든.
그래서 멈췄다. 리리도 내 의도를 이해하고 살금살금 이동하다가 일어나서 한숨을 푹 쉬었다.
“헉…… 허억…… 너무…… 힘들어…….”
한 10미터 뛰어 놓고 헉헉대는 텔라테리를 보니 절로 발걸음이 탑 쪽으로 돌아갔다.
* * *
그녀는 우리를 식사에 초대했다. 교수라는 사람은 지금 중요한 실험 중이라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곳은 텔라테리와 나, 그리고 리리와 성녀가 같은 자리에 있었다.
성녀는 입에 단검을 물고 있기에 음식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텔라테리는 그런 성녀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왜 단검을 물고 있냐고 물었지만, 나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우선 그 이유는 모르기도 하고, 저 단검이 뭔지 알게 된다면 같은 자리에 있다는 걸 썩 좋아하진 않을 거 같았으니까.
텔라테리는 저 단검이 악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사실 어떤 분야의 전 공자가 다른 분야에 문외한인 경우는 흔한 일이라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본질적으로 언데드의 후손이라길래 조금 경계했는데…… 굉장히 익숙한 형태의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소박하지만 한 끼 두둑히 먹을 수 있는 그런 음식들.
아니, 익숙한 정도가 아니라 지구의 가정식과 본질적으로 비슷한 수준이었다.
“인간의 요리 방식이네.”
리리는 뭔가 좀 아는 듯했다.
“그게 종족마다 차이가 있어?”
“조금씩. 종족 차이는 문화 차이보단 크니까. 엘프는 소금 대신에 숲에서 나오는 광석 가루를 쓴다든가, 뱀파이어는 불을 거의 안 쓴다든가.”
“나중에 문명화된 곳도 좀 들러 보고 그러면 좋겠네.”
리리가 의외라는 듯 날 바라봤지만, 나는 사람 사는 곳도 곧잘 여행하는 편이었다. 특히 이계라면 최소한 지구보단 더 재밌을 테니까.
그런 우리를 빤히 바라보던 텔라테리는 웃고 있었다. 보기에는 좀 섬뜩한 느낌이지만, 피곤에 찌든 얼굴 탓에 그렇게 보이는 거지 담겨 있는 감정이 나쁜 건 아니었다.
“헤, 그렇구나…… 우리 식습관은 인간이랑 비슷하구나? 몰랐어…… 하긴 그럴 만해. 우리는 그 근원이 인간이니까…….”
“그래요?”
“최초이자 최후의 네크로맨서인 엘드리치께서도 전승에 따르면 인간이셨어. 그분께서 되살린 두 명의 인간이 나크샤론의 선조야. 재밌지? 그러니까 우리 나크샤론과 너희 인간은 결국 같은 조상에서 분리된 인종이라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인간에 관심이 많아. 우리 조상의 모습을 가장 온전하게 품고 있는 종족이니.”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종족이 되어 있다니.
사실 몰래 떠나려는 마음을 접은 건 단순히 동정심 탓은 아니었다. 황금 지침은 분명 남쪽 어딘가에 있는 곳을 가리키고 있었고, 이 나크샤론 여성은 분명 도움이 되는 걸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제일 먼저 가장 필요한 질문을 던졌다.
“놀랄지는 모르지만, 저는 인간인데 룬을 좀 쓸 줄 알거든요?”
텔라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여전히 다크서클이 드리운 침침한 얼굴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지만.
“그렇겠지. 고서의 내용을 아무렇지 않게 읽었으니까…… 어디서 이런 천재 신입생이 떨어졌을까……? 엘드리치께서 내 오랜 학업을 끝내라고 점지해 준 게 아닐까?”
“모스mohs.”
손을 허공에 내밀고 외쳐 보았다. 분명 정확하게 말한 룬인데도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놀라워…… 완벽한 발음이야. 인간의 혀와 성대로 저게 가능하다니.”
“그래 봤자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소용없잖아요? 갑자기 여기 오고 나서 이렇게 돼 버렸거든요?”
“이곳은 탈레talle의 룬을 제외한 다른 룬을 쓸 수 없어.”
“혹시 이유 아세요?”
텔라테리의 표정을 보니 다행히 그 원인을 알고 있는 듯했다.
“이곳에 주신의 영광이 없기 때문이야.”
“주신의 영광이 없다고요?”
“이제 슬슬 해가 지니까, 보여 줄게.”
텔라테리는 흐느적거리면서 일어나 테라스로 우리를 데려갔다.
지평선 저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하늘에 깔려 있는 먹구름의 특이한 점을 알 수 있었는데,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먹구름과는 달리 반투명했다. 그러니까, 그 건너편에 떠 있는 달이나 별이 희미할 뿐 여전하게 보인다는 뜻이었다.
“봐.”
텔라테리가 위를 가리켰다. 우리 셋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언제나처럼 고정된 곳에서 지상을 비추는 작은 달, 운데라가 떠 있었다.
“어?”
우리는 동시에 의문을 내뱉었다.
구름 뒤에 가려져 있었지만 운데라의 상태가 어떤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운데라가 어느 때처럼 항상 그 자리에서, 같은 빛을 발하고 있는 건 여전했다.
그런데, 지지직거리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신호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TV의 화면과도 같았다. 좌우로 흔들리고 일그러지며 지상을 제대로 비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운데라께서 제대로 지상을 바라보지 못하셔.”
“이곳에서만요?”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희미하고 얇은 장벽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장벽이 이곳을 다른 곳과 구분시키고, 저런 이상 현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건가.
“이유는요?”
“잘 모르지만, 검은 폭풍 안에 있는 악마의 탓이 아닐까…….”
운데라는 명계와 현세가 뒤섞이지 않도록 지킨다고 했지?
그 명계란 게 내가 사계(死界)라고 부르던 곳을 의미하는 거 같은데.
그러니까 이곳이 죽음의 지대가 된 이유는, 운데라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주신의 영향력이 온전하지 않으니 룬 역시 작동하지 않는 거야. 그러니까, 룬 언어는 어떻게든 신과 관련이 있는 언어야. 이유는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그건 확실해.”
“탈레도 룬 아니예요? 왜 탈레는 쓸 수 있는 건데요?”
“탈레는 대지신의 힘을 빌리는 언어거든. 대지신은 스스로 투신하여 죽은 신이고,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기도 해. 엘드리치께서 발명했다는 룬인데, 놀랍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텔라테리의 얼굴빛은 역설적으로 밝았다.
“결국 지식과 신앙은 서로 뗄 수 없는 셈이야. 마법 연구계와 종교계는 끊임없이 싸우지만, 나는 그게 싫어. 우리는 궁극적으로 같은 목적을 향해 공부하는 사람들이니까. 이게 바로 그 증거잖아?”
“……들어가서 다음 계획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텔라테리가 날 바라보는 눈빛에 기쁨과 흥분이 가득 찼다.
“같이 연구할 마음이 들었어?”
“연구는 아니지만…… 제 목적을 달성하다 보면 그쪽한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텔라테리가 하는 말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의욕도 없이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지금 그 창백한 안색 뒤에 숨어 있는 열정을 보았으니까.
우리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문뜩 이상함을 느껴 테라스로 다시 고개를 돌리니, 성녀는 그 자리에 계속 서서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주신을 섬기는 교회 사람이니 주신의 변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뒷모습이 보이는 분위기가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그게 정확히 뭘 뜻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어서 우선 내버려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텔라테리는 자기 정수리까지 오는 책 더미를 한 아름 들고 비틀거리면서 책상에 다가왔다.
텅—!
“자, 해 볼까!”
이제까지 중 가장 활기찬 목소리였다. 리리는 완전히 질린 표정으로 먼지를 뿜어내는 책더미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도 조금 난처했지만 일부러 표정을 숨기고 기나긴 내용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 * *
테라텔리는 갈등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녀의 종족인 나크샤론이 박해받던 종족이라는 데에서 비롯된 성격이기도 했다.
그 이유 탓에 50년 동안 학업에 매진했다. 이곳에서는 풍화된 정세와 각종 갈등, 그리고 신분 상승 따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아직도 학위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은 답답했으나, 그건 그저 작은 목표를 위한 동기부여와 다름이 없었다.
텔라테리는 지금 찾아온 인간에 대해서 깊은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접경지대의 연구소에 십 년 만에 찾아온 방문자인 데다가, 처음 보는 인간 종족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뱀파이어, 별의 자손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타 종족을 심하게 경계하는 게 인간의 성격이라고 들었다. 아홉 신에게 버림받은 이유도 그 탓이라고 추측했다.
특히, 뱀파이어 역시 친구를 잘 사귀지 않는 종족이었다.
그런 뱀파이어가 인간과 친근하게 지내다니.
텔라테리는 그 점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이 인간의 눈빛에서 순수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인간이 마음을 열었을 때, 텔라테리는 기뻤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를 동안, 텔라테리는 자신이 연구한 것들을 인간에게 소개했다. 인간은 그 모든 걸 경청했다. 그래서 기뻤다. 주변에는 어느새 텔라테리의 후배들이 모여들어 경청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탈레talle로 시작하는 룬들은 전부 죽음과 관련된 거죠?”
“응, 엘드리치께서 만들어 낸 룬 체계야. 영혼과 죽음에 관련된 모든 비밀이 담겨 있는 단 하나의 단어. 멋지지 않니?”
인간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모든 탈레 체계가 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고요?”
“잘 봐.”
텔라테리는 자신이 연구한 모든 탈레talle 룬을 그려 나갔다. 그중 대부분은 발동시킬 수 없을 정도로 조잡했지만, 원본의 형태를 흉내 내기에는 충분했다.
“원래는 나 혼자 단독으로 연구하고 있었던 거지만…… 천재 신입생이 왔는데도 꽁꽁 싸맬 수는 없지…….”
항상 느릿느릿하던 텔라테리의 손놀림은 어느 때보다 빠르고 정확했다. 항상 미세하게 떨리던 그 손은 어느새 선명하고 정확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
그렇게 수십 개의 룬이 한 자리에 모였다. 텔라테리는 어떤 법칙을 따라 그 룬 문자를 배치했다.
그러자.
“……오.”
“알아보겠어?”
설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인간이 먼저 감탄사를 뱉었다.
“좌표네요.”
지도라기보단 이정표에 가까웠다. 룬의 기하학적 도형들이 한데 모이자, 그건 어떤 위치를 가리키는 하나의 좌표가 되었다.
“물론 이건 작동할 수 없는 룬이야. 카츠kaahz도 룬 언어니 이곳에서는 사용할 수 없거든. 하지만, 이런저런 연구를 통해서 이게 죽음의 협곡 안쪽을 가리킨다는 걸 알게 되었어.”
“그 안에 어떤 고성이 하나 있다는 거죠?”
텔라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좌표를 가만히 주시했다.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후배들은 자신들이 읽을 수 없는 룬을 신입생이 신중하게 주시하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끝내, 인간이 입을 열었다.
“고성은 고대부터 그곳에 있었네요. 확실히 이상한 게, 그 성이 존재해 온 시간과 이곳에 산다는 악마가 존재해 온 시간이 일치한다는데요?”
“저, 잠시, 그걸 다 어떻게…….”
“잠시만.”
한 나크샤론이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텔라테리는 그 푸른 안광을 한층 더 빛내며 그의 말을 막았다. 인간은 말을 이었다.
“저기에 다 적혀 있어요. 룬 좌표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에 대한 설명도 들어가 있거든요.”
“……저걸 읽었다고? 그걸 어떻게 믿…….”
“그 협곡에 데스 나이트가 있다네요?”
텔라테리는 환희에 찬 표정으로, 그리고 나머지 나크샤론들은 당황해 마지 않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건 이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한 번도 설명하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이 인간이 룬 좌표를 해석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테라텔리 씨가 궁금한 건 거기에 뭐가 있냐는 거죠?”
“내 이름은 텔라테리야. 그건 그렇고, 그게 문제가 하나 있는데…….”
“제가 다녀올게요. 별로 안 머네.”
“……어?”
인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는 끝났으니, 서둘러 행동에 돌입하고 싶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저기.”
“나흘 정도 걸릴 거 같아요.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저기, 잠깐!”
텔라테리는 서둘러 인간을 막아섰다. 인간은 잠시 그녀에게 말할 시간을 주었다.
“헤헤, 미안. 열정적인 후배는 좋아하는데, 귀한 후배를 사지로 밀어 넣고 싶지는 않네…… 우리 신입생은 데스 나이트가 뭔지는 모르나 봐?”
끝까지 입을 열 기회가 없었던 한 나크샤론이 이때다 싶은지 설명을 시작했다.
“데스 나이트는 고대의 마법 가디언에 죽음의 기운이 모여 만들어진 것으로…….”
“아니에요. 데스 나이트는 언데드예요. 예전에 있었던 한 교회 기사단이 떼죽음을 당하고 만들어진 거거든요.”
“……뭐라고?”
나크샤론들은 다시 한번 당황했다. 텔라테리도 마찬가지였으나,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그, 뭐가 되었든 간에, 데스 나이트는 그 어떤 충격으로도 파괴할 수 없어. 화력을 쏟아부으면 잠시나마 제압할 순 있겠지만…… 그건 효율적이지 않겠지?”
텔라테리의 신호와 동시에 후배 중 하나가 상자 안에서 거대한 어깨 갑주를 들고 왔다.
“이건 데스 나이트의 갑주야. 그 어떤 칼이나 망치로도 절대 파괴되지 않거든? 이걸 제압하는 룬이 하나 있어. 우리 신입은 그거부터 배우고 가자. 그리고, 같이 가자.”
그리고, 텔라테리는 갑주에 손을 대고, 눈을 감고 한동안 정신을 집중하다가 읊었다.
“탈레나마스tallenamath.”
쩍—!
그와 동시에, 갑주에 아주 작은 실금이 갔다.
“헤…… 오랜만에 했는데, 망신 안 당해서 다행이네. 이게 지상에 묶인 영혼의 속박을 헐겁게 만드는 주문이야. 좀비나 데스 나이트 같은 존재들한테 잘 통하지.”
인간은 실금이 간 갑주를 주시하고 있었다.
“우리 신입은 천재니까 금방 배우겠지? 잘하면 두 달 안에 될지도, 우선 이것부터 배우고…….”
쩌어엉—!
텔라테리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순식간에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신비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강한 욕망 탓이었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 어떤 거대한 힘으로도 흠집조차 낼 수 없는 데스 나이트의 어깨 갑주.
고귀한 엘드리치께서 물려주신 탈레talle의 신비로만 영향을 줄 수 있는 죽음의 기사 신체 일부가, 단 한 순간에 두 동강이 났다.
그 조각들 가운데에는 방금까지 찬란한 빛을 내뿜던 은빛 검날이 있었다.
그 검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건 인간이었다.
모두가 보았다. 인간의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검의 형상이 되는 모습을.
그 검이 벨 수 없는 존재를 베어 낸 모습을.
“이 정도면 믿어 줄 수 있죠?”
인간은 그렇게 말하며 웃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뱀파이어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죽음의 존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베어 내는 검, 그걸 들고 있는 인간을 보며 텔라테리는 엘드리치의 전설을 다시 한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