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20
120화
ep38. 엘드리치, 사자(死者)의 구원자 (2)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성 밖으로 나갔다. 이 성 안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걸까?
체감상 오래 지났다고 느끼지 못했다. 아다마와 하바와 짧은 대화를 나눴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사이에 풍경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윽.”
격한 바람을 타고 날아온 재에 리리가 미간을 찡그렸다. 내 튼튼한 가죽 재킷 자락마저 흔들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불그스름한 빛을 희미하게 뿜는 먹구름만 잔뜩 끼어 있는 하늘이었는데, 지금은 그 모습이 사뭇 달랐다.
뒤늦게 고개를 든 리리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리리는 공포심을 숨기기 위해 입술을 꾹 다무는 버릇이 있었고, 지금이 그랬다.
“……소용돌이.”
두꺼운 구름 사이에서는 붉고 푸른 번개가 간헐적으로 번쩍였다. 그리고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나는 저 소용돌이를 본 적이 있을까?
모르겠다. 이계에서 보는 많은 것들이 늘 그렇듯이 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명계의 소용돌이. 이 공간이 명계와 하나가 되어 가고 있다는 뜻이에요.”
뒤에서 하바가 말했다.
소용돌이는 이 접경지대를 전부 덮어 버릴 만큼 거대했고, 또 당장이라도 빨아들일 것처럼 땅과 가까워져 있었다.
그 정중앙은 검은 산봉우리 바로 위에 있었다.
검은 폭풍에 둘러싸여 전혀 보이지 않는 그 산봉우리.
그곳에서 본드래곤의 머리로 추측되는 게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 울음소리가 바람에 희석되어 내 귓가를 강렬하게 때렸다.
“하바라고 했죠?”
“네. 아버지.”
아버지란 호칭이 정말이지 안 익숙하지만, 지금은 우선 넘기기로 했다.
“저 악마 이름이 가롯이라고요?”
“우리는 그렇게 부르지만 진명은 누구도 몰라요. 저 악마가 불멸자였던 시절을 아는 이는 풍화의 시대를 견디지 못했을 테니까요.”
“저 악마가 봉인에서 풀리면 세상이 죽음으로 뒤덮인다고 했잖아요?”
“맞아요. 죽을 수 없는 존재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으니, 그는 현세에 강림한 죽음의 상징이 되었어요.”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알아요?”
“누군가는 제 아버지를 따라갔다고 하고, 누군가는 단순히 호기심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정확한 건 아무도 모르지만…… 전승에서 가롯에게 따라붙는 칭호는 언제나 하나였습니다.”
“배신자.”
아다마의 목소리였다.
“이 고성은 배신자를 억제하기 위하여 지어졌습니다. 그렇기에, 가롯이 배신자라 불린다는 사실만큼은 지금까지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아다마의 굵은 목소리에는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저는 저 거대 공룡 화석이 그렇게나 위험한 놈인 줄 모르고 있었어요. 저놈을 아는 사람들이 정작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확실히 그랬다. 저게 어떤 힘을 품고 있든, 저걸 아는 사람들도 별로 대단치 않게 생각했다. 내가 남쪽으로 간다는 걸 알고 있을 게 분명한 OWIC마저도 딱히 나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텔라테리도 그랬다. 저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애초에 이 지역에서 마음 편히 연구나 하고 있을 리 없잖아?
의문이 가득했다. 재앙이 현실 앞으로 다가오고 나서야 전부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 순간, 다시 가롯의 울음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아니, 저걸 보고 위험하다는 생각을 그 누구도 하지 않았다고?
왜 다들 아무런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거야?
내 생각을 읽었는지 하바가 입을 열었다.
“예언이 있었습니다.”
“예언이요?”
하비의 말에 리리가 답했다.
“가롯이 깨어나는 그 순간, 현시대의 예언자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그를 저지할 것이다라는 예언이었어요.”
“그러니까, 예언에 따르면 가롯은 아무것도 못 하고 죽는다?”
“그렇지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가짐이었네요.”
“진정한 예언자의 입에서 나온 예언은 반드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예언에 따라 누군가 제 목숨 바쳐서 문제를 해결해 주니, 그냥 가만히 있는다…….”
1년 전에 OWIC에서 가롯에게 포격을 가했었다.
그런데, 끝을 보지 않고 그 뒤에 바로 후퇴했었지. 그 영상을 본 당시에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가롯이 그렇게 무서웠나?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OWIC은 그냥 실험을 했을 뿐이었다. 어차피 뭔 짓을 하든 가롯이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 예언되어 있었으니까.
“예언자가 자기 목숨을 바쳐 막아 줄 테니, 그냥 그 사람이 희생하면 그만이니까 아무런 위기감도 느끼지 않고, 어떤 방법도 찾아보지 않고 그냥 희생되기를 기다려?”
나는 검은 폭풍을 바라보며 어느새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존나 마음에 안 드는데.”
그 순간 깨달았다.
하바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아버지는 변하지 않으셨군요.”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다가 렐릭시나를 불러 그 등 뒤에 탔다.
“리리.”
“응.”
“가자.”
리리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 위에 올라탔다.
아다마와 하바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내가 이런 선택을 할 거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 * *
깨달음의 벽은 높았다. 하지만 한 번 넘어가면 한동안은 지식의 유희로 가득 찬 평야를 누비게 되는 법.
지금 텔라테리가 그랬다. 신입생이라고 생각한 인간, 그가 떠나기 전 남긴 공식 하나가 텔라테리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지식의 쾌락 속에서 한창 헤엄치던 그녀는 생각보다 금방 현실로 돌아왔다.
비로소 해석된 문헌에 적혀 있는 내용이 마냥 유쾌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예언이야.”
현시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예언이 남아 있었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현시대의 예언자가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 죽음의 화신을 막는다…….”
여기까지는 알던 대로였다. 텔라테리가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예언에 따르면 실질적인 위협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하나가 더 있었다.
그 내용은 이랬다.
「나크샤론의 창조자는 그 자리에서 함께 죽으리라.」
그 순간.
저 멀리서 말이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텔라테리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고, 멀지 않은 곳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말 위에 올라탄 자는 텔라테리를 본 듯 방향을 바꿔서 빠르게 이쪽으로 달려왔다.
검은 단발머리에 하얀 피부와 붉은 눈. 뱀파이어였다. 그녀는 서둘러 말에서 내리더니,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고는 말했다.
“주신교회의 수호기사단 소속, 레베카입니다.”
“아…….”
“저는 주신교의 성녀님을 찾으러 이곳에 왔습니다.”
“성녀요?”
“단검을 물고 있는 별의 자손인데, 혹시 본 적 없으십니까?”
그 순간 깨달았다.
엘드리치와 같이 온 별의 자손. 그녀가 입에 단검을 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성녀란 말인가?
죽음의 악마가 깨어난다는 예언이 실현되는 때가 지금인 건가?
“그럼, 엘드리치께서도 그 자리에서 함께 죽는다고……?”
“그분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 성녀가 지배자의 상이라면, 예언자라면…… 산으로 갔을 거예요. 악마가 있는 저 산…….”
텔라테리는 검은 폭풍 안에 있는 산을 가리켰다. 명계의 소용돌이가 그 위에서 세상을 잡아먹을 듯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레베카는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텔라테리는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잠시만요……! 지금 산으로 갈 생각이세요?”
“성녀님을 구해야 합니다.”
“예언이 무슨 의미인지 알잖아요…… 성녀의 죽음은 예언에 적혀 있었던 거예요. 반드시 실현되고, 누구도 막을 수 없어요……!”
“그럼, 성녀님과 함께 죽을 겁니다.”
“…….”
레베카는 텔라테리의 핼쑥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에 올라탔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니 조금은 더 입을 열고 싶었다.
살아 있는 누군가가 남아서 자신을 알아주길 바라는 건, 죽음을 앞둔 모든 이들의 본능이었으니.
“……어린 시절 살던 마을이 대화재에 휩싸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부모와 집을 잃었고, 그런 저를 거둬주신 게 성녀님입니다.
저는 그분 덕분에 살았으니, 끝까지 그분과 함께할 겁니다.”
“……이게 필요할 거예요.”
텔라테리는 호주머니에서 기름이 든 병을 들었다.
“저 검은 폭풍은 재로 이루어져 있어요…… 당신 같은 뱀파이어는 감각이 예민하니 견디기 힘들 거예요. 폭풍에 들어갈 때, 코 아래하고 눈가에 바르면 효과가 있을 텐데…….”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하고는 병을 받으려고 했다.
그 순간 텔라테리는 로브 안주머니에 다시 유리병을 넣었다.
그러고는 레베카를 빤히 바라보았다.
텔라테리는 이 순간 생각했다. 자신이 목숨조차 바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50년 동안 이 탑을 벗어나지 않았는가.
그건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 바로 답을 구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선조와 선조의 창시자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저도 태워 주세요.”
“…….”
“저도…… 알아야 하는 게 있어요.”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 사실을 알려 줄 테니, 목숨을 내놓아라.
이런 요구를 들었을 때, 거절하지 않을 학자가 세상에 존재하는가?
텔라테리는 존재한다고 결론 내렸다.
그녀 자신이 그랬으니까.
* * *
성녀, 비바치시모는 검은 폭풍 속에서 악마를 올려다보았다.
용의 뼈로 이루어진 그 회색의 거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입에서 뿜어내는 검은 연기. 용의 숨결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원래 가지고 있어야 할 영광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금 악마는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찬 부정한 숨결을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떠올렸다.
자신의 삶 전반은 자격 미달투성이였다. 주신교에서 성녀의 역할은 악마 정화였으나, 그녀는 아주 작은 악마도 정화한 적이 없었다.
이는 주신교의 거대한 문제였다.
“앞으로 3년 안에 콜브’랑데쥬를 정화해야만 하는데…….”
“주인이 없는 콜브’랑데쥬는 반드시 폭주하고 말 것이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그 소유권을 강요하는 건 그것대로 문제가 되오. 그 거대한 힘을 대체 어떻게 통제하오?”
“성녀가 악마를 정화하지 못하다니…… 이건 고려한 적이 없는 상황이오.”
“무덤 속 사자(死者)나 다름없다는 속담이 딱 이거로군.”
걱정이 가득한 사제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살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성녀의 지위를 보존할 수 있는 이유는 예언자의 상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었다.
주신교에서 예언자의 상은 변하지 않는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예언이란 반드시 이루어지는 일이었으니까.
“라 시마가 운데라를 가리는 밤, 신카 소왕국이 거대한 습격으로 멸망합니다.”
그리고 그 해 신카는 멸망했다. 예언 덕분에 늦기 전에 사제들을 대피시킬 수 있었다.
“서부 대수림에서 대화재가 일어나, 그곳에서 살고 있었던 작은 뱀파이어 마을이 화마에 휩싸일 겁니다.”
이 역시 그대로 되었다.
예언이란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기에 피하는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 날 밤 계시가 다시 내려왔다.
그 계시를 인지한 성녀는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자신의 동생, 엘리 비바치시모가 죽는다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성녀님, 예언을 내리실 시간입니다.”
사제는 언제나처럼 그렇게 요구했고.
“이번에는 주신들께서 아무런 말씀도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비바치시모는 두려워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언이 빗나갔다.
시기가 지났는데도, 성녀의 동생, 엘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아침마다 그녀를 맞이했다.
비바치시모는 비로소 깨달았다.
예언은 미래를 먼저 보는 게 아니라,
미래를 정하는 행위였다는 사실을.
예언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면, 예언대로 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성녀는 떠올렸다. 자신의 예언으로 인해 멸망한 왕국을. 그곳에서 고통받던 난민을.
성녀는 떠올렸다. 자신의 예언으로 불탄 마을의 뱀파이어 일족들을.
성녀는 수년 동안 예언 속에서 고통받았을 사람들을 떠올리며 매일 밤 비명을 질렀다.
그 후 성녀는 불타 잿더미가 된 마을로 찾아가 유일하게 생존한 여자아이를 거뒀으며.
그날 밤 콜브’랑데쥬를 입에 물었다.
저주도, 희생도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로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스스로 물었다.
예언을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맹세를 위해서.
절대로 입을 열지 않으리라는 맹세를 위해서.
「크어어어—」
악마가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죽음을 담고 있는 소름 끼치는 비명이었다.
성녀는 눈물과 재가 뒤섞인, 별이 가득한 눈동자로 악마를 올려다보았다.
콜브’랑데쥬를 부여잡은 손은 떨리고 있었다.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성녀의 떨림은 일순간 멈췄다.
그녀는 손을 다시 내렸다. 단검을 문 얼굴을 치켜들어 악마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성녀는 생각했다.
저는 신을 섬깁니다. 어제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며, 최후에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 황금을 불러올 이들의 당당한 일원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품고 살며, 의지를 가지고 미래를 개척하는 이들입니다.
저는 자유가 뭔지 배웠습니다. 자유롭게 사는 한 인간이 어떤 황금을 추구하는지 엿보았습니다.
그래. 우리는, 우리 모두는.
“신의 장기말이 아니야.”
이게 내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뜨거운 빛.
나의 황금.
그녀가 최후에 내뱉고 싶었던 단 한 문장.
콜브’랑데쥬, 죽은 신의 단말마에서 태어난 단검은 그녀의 입술을 벗어나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턱.
한 남자가 그것을 잡으며 옆에 섰다. 그의 시선은 울부짖는 죽음의 악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맞아요. 우리는 신의 장기말이 아니야.”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