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21
121화
ep38. 엘드리치, 사자(死者)의 구원자 (3)
성녀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바로 이틀 전에도 들었던 그 목소리.
재와 모래로 이루어진 폭풍 속이지만, 그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성녀의 입에서 떨어지던 단검을 강하게 부여잡고 있었다.
“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수년 동안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탓일까? 아니면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인물의 등장 탓일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코끝을 날카롭게 찌르는 재의 냄새가 정처 없이 흔들리던 그녀의 의식을 부여잡았다.
성녀는 남자가 잡고 있는 단검을 바라보았다.
콜브’랑데쥬, 죽은 신의 단말마에서 태어난 악마.
홀로 죽음을 각오했기에 최후에 입을 뗄 수 있었던 것인데, 그래서 이 인간이 여기에 있으면 안 될 터인데.
“……안 돼.”
혼란스러웠다. 떨리는 목소리에는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안 된다고. 당신이 여기 있으면 안…….”
그 순간, 깨달았다.
인간의 손에 잡혀 있는 콜브’랑데쥬는 여전히 힘을 개방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 안에는 더 이상 힘이 담겨 있지 않았다.
강선후는 손에 잡힌 검을 눈앞으로 가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위로 몇 번 던져 보기까지 했다.
콜브’랑데쥬는 정화되어 있었다.
그 입에서 떨어지기 전부터 그 악마는 본래의 악함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저 깨닫지 못했을 뿐.
별을 품은 성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무덤 속 사자(死者)나 다름이 없군.’
악마를 정화하지 못해서 이런 말을 들으며 살아왔던 그녀였다.
성녀의 지위를 가지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런 그녀는 어느새 신의 죽음에서 태어난 악마를 정화했다.
그 곁에서 하얀 망토로 입과 코를 가리고 있던 리리가 인간에게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
“뭘?”
“콜브’랑데쥬가 이미 정화되어 있었다는 걸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강선후는 단검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예리한 양날을 가진 그것은 불어닥치는 폭풍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으며, 재로 뒤덮여 한층 더 탁한 빛깔을 뿜어내고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났다. 그게 악마 탓인지, 죽음의 기운을 품은 폭풍 탓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알고 있었던 건 아니야.”
“그럼.”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리리는 그런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그녀 생각에, 이 인간은 의외로 사람을 잘 믿는 편은 아니었다. 믿고 말고를 떠나서 누군가가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법이 잘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때론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런 근거 없이 타인을 믿었다.
“이 정도 각오가 있다면 해낼 수 있어.”
라는 이유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였으나, 리리는 이 인간의 신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인간이 믿었으면, 실제로 그리되었으니까.
“믿음과 노력이 배신당하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으니까.”
인간은 그렇게 말하며 단검을 강하게 땅으로 집어 던졌다.
캉—!
깊숙이 박힌 단검의 날에는 어느새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성녀는 그것을 읽을 수 없었다.
그건 그저, 룬이라는 호칭으로 설명이 되는 문자가 아니었다.
* * *
“허억…… 허억…….”
텔라테리는 무릎에 손을 얹고 세찬 숨을 내뱉었다. 산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폭풍은 더욱 거세졌고, 대기에 가득한 재들은 숨 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가혹하게 몰아닥쳤다.
레베카는 수통을 꺼내 그녀의 입을 적셔 주었다. 원래부터 파랬던 그 입술이 잔뜩 갈라져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괜히, 괜히 따라왔나…… 나 때문에, 허억…… 나 때문에 늦어지는 거 같아요…….”
“잘하고 계십니다. 저 위까지만 버티시면 됩니다.”
텔라테리는 그 온화함에 죄책감과 놀라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뱀파이어라는 종족이 원래 이랬는가? 그들은 온화한 편이었으나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사교에 거리낌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영역에 타인이 침범하는 걸 극도로 꺼려 했다.
지금 텔라테리는 레베카에게 짐이나 다름이 없었는데도, 레베카는 텔라테리를 독려하며 끝까지 발을 맞춰 걷는 인내를 보여 주고 있었다.
“많이 힘드십니까? 숨을 천천히 쉬세요.”
“괜찮, 하아, 괞찮은 거 같아요.”
“업히세요.”
레베카는 텔라테리에게 등을 내주었다. 텔라테리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저는 훈련받은 몸이라 한 명 정도는…….”
“그게, 그게 아니에요…… 제 힘으로, 제 힘으로 올라갈게요.”
텔라테리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폭풍 속에서도 희미하게 정상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절대로 방해는 안 될 거예요. 제가, 직접 올라가고 싶어요.”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상에 펼쳐져 있을 작은 고원에서 움직이는 존재의 거체를 여기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안 남았잖아요!”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텔라테리의 손을 잡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고원으로 향했다. 고원이 가까워지며 경사는 완만해졌고, 텔라테리는 그제야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의문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상해요. 이곳은 악마에게 오염된 마수들로 가득한 곳일 텐데.”
“마수, 말입니까?”
“네. 마수란 악마에게 끌리는 생물을 총칭하는 단어고, 그들은 악마를 보호하기 위해 몰리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이 산도 제대로 연구하지 못했던 거고…… 우리 올라오면서 악마를 마주한 적이 있긴 해요?”
레베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레베카는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원래 있어야 할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건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텔라테리와 레베카는 보았다.
짙은 폭풍 건너편 능선 쪽에서, 온몸에 광채를 두르고 있는 한 여성의 형상을.
그녀는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고, 한쪽 손에는 검을 들고 있었다. 짙은 재 폭풍 속에서 실루엣만 간신히 보일 정도였으나,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가려지지 않았다.
레베카는 저게 뭔지 모르고 있었지만, 텔라테리는 푸른 안광을 뿜는 눈을 그곳에 고정하며, 마른 입술을 벌렸다.
“……저건.”
“저게, 뭡니까? 마수입니까?”
“……성좌의 화신.”
그 순간, 레베카는 깨달았다. 이곳으로 별들이 낙하했었다는 사실을.
성좌의 발밑에는 찢겨진 야수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쪽 무릎을 꿇은 성좌의 손길이 닿자마자, 그 사체는 불에 타듯 한순간에 사라졌다.
성좌는 슬쩍 고개를 돌려 레베카와 텔라테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폭풍 저편으로 사라졌다.
모든 상황은 찰나의 순간에 일어났다.
레베카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이건 대체…… 뭡니까?”
“성좌가, 이 사건에 관여하고 있어요.”
“성좌가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신학에 문외한인 레베카조차 이게 말도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성좌는 원칙적으로, 정말 특별한 조건이 충족된 게 아닌 이상 현세에 직접적인 관여를 해서는 안 되었다. 주신이 그걸 허용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기껏 해 봐야 가호나 계시를 내리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신의 자손과 접촉할 뿐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존재가 정말로 성좌의 화신이라면, 지금 이건 규율을 깬 어떤 성좌가 현세에 직접 관여했다는 것이지 않은가?
텔라테리도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하나의 질문을 더 던졌다.
“……만약 개입했다고 하더라도. 왜 굳이 마수들만 처리한 거지?”
성좌의 힘이라면, 이 위에 있는 악마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어쩌면 그 힘만으로도 악마를 영멸시키는 것조차 가능했을 텐데.
어째서 성좌는 기껏 개입해 놓고 마수만을 죽이고 다니는가.
이건 그저 길이나 터 주는 정도 아닌가?
“……길을 터 줘?”
텔라테리의 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성좌는 길을 터 준 것일 뿐이에요.”
“길 말입니까?”
“성좌는 성녀에게, 그리고 엘드리치께…… 길을 터 줬어. 그들이 악마의 앞에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도록.”
“대체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악마를 막을 영광을 그들의 몫으로 두고 싶었던 거예요. 성좌는 항상 신화를 갈망하는 이들이니까.”
텔라테리가 바라보는 산의 정상은 더욱 선명해져 있었다.
풍화만이 가득한 이 시대, 죽음만이 가득한 이 산에서, 한 줄기의 황금의 영광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환각을 보았다.
“성좌는 저 위에 올라간 분들이 신화를 재림시킬 수 있다는 데에 베팅했어요. 주신의 규율을 어기면서까지 그쪽을 믿었던 거야.”
정상을 향하는 텔라테리의 걸음에서 다시 힘이 느껴졌다.
“서둘러야 해요…… 우리가, 우리가 그 자리에 있으려면…….”
레베카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리에 힘을 주고 잿더미 산의 정상을 향했다.
* * *
로얄 블러드와 버림받은 종족, 그리고 별의 자손은 죽음의 폭풍이 몰아치는 고원에 있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그 각오를 담아 입을 벌린 성녀는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꼈다.
콜브’랑데쥬는 정화되어 있었다. 그 안에 악마의 영혼이 여전히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건 더 이상 악마가 아니었다.
“당신이 해낸 일이에요. 성녀님.”
인간의 말에 눈물이 흘렀다. 한순간 환희가 마음속을 채우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 가롯이 다시 한번 울부짖었다. 용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거칠고 새된, 정제되지 않은 비명. 한때 불멸자였으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악마에게 어울리는 역겨운 소음이었다.
그 소리와 함께 성녀는 현실로 돌아왔다.
성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눈물과 재로 범벅된 얼굴에는 난처함과 두려움이 가득 칠해져 있었다.
콜브’랑데쥬를 정화해 버린 건 좋았으나, 가롯을 제압할 유일한 방법이 사라진 셈이었다.
환희는 금방 사라졌고, 절망이 공허한 마음을 다시 채웠다. 이 고원에 가득한 재에서 풍기는 매캐한 냄새가 더 강하게 코를 찔렀다.
“왜, 왜 지금에서야…….”
성녀는 그렇게 말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렇게 간절했던 때는 할 수 없었는데, 왜 하필 그 힘이 필요할 때 정화된 것인가.
신에게 반역한 대가는 이토록이나 잔혹한 것인가?
“……도망쳐.”
성녀는 폐를 짜내어 말했다. 이 인간이 어째서 이곳에 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죽는 사람은 예언에서 예견된 자신만으로 족했다. 더 이상 누군가 죽는 건 원치 않았다.
“당장, 도망쳐. 아직 가롯이 온전하게 깨어나지 않은 지금이라면 늦지 않아. 당신의 황금을 위해 목숨을 보전해.”
“……어쩌려고요. 콜브 뭐시기도 정화되어 버렸는데.”
“예언대로라면, 어쨌든 이곳에서 나와 악마가 같이 죽으니까.”
“……죽음을 각오했었죠?”
인간은 여전히 두 발로 선 채,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악마의 거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무나 거대하여 지척에 있다는 착각마저 드는 그 악마는 보기만 해도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성녀는 다시 눈을 돌렸다.
인간은 말을 이었다.
“죽음을 각오했고, 이곳으로 올라와서 각오한 행동을 해냈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성녀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인간의 뒷모습에 가로막혀 악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 결과까지 직접 누려야지.”
“……정신 차려! 제발!”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죽는 건 그녀 혼자뿐이어야만 했다.
“한 번 세상에 내뱉어진 예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나! 네가 아무리 강인하다고 해도 눈앞에 있는 건 악마야!”
다시 한번 눈물이 흘렀다.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외침을 멈출 순 없었다.
“악마와 내가 죽는 건 정해져 있는 미래라고! 네가, 네가 휘말릴 필요는 없잖아! 당장 여기에서 떠나!”
“생각보단 센 성격이시네. 역시 사람은 입을 열어 봐야 안다니까.”
“내 말을 듣고 있는 거야……?”
“그럼 내가 물어볼게.”
인간은 여전히 악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악마의 입에 머금어져 있었던 죽음의 기운은 비로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뿜어져 하늘을 뒤덮기 시작한, 타락한 용의 숨결.
순간적으로 멀어져 가는 의식을 부여잡기 위해, 성녀는 눈을 부릅떴다.
“악마와 성녀가 함께 멸하는 예언 속에 내가 있었어요?”
“…….”
없었다.
그 예언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성녀는 최소한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은 가롯을 향해 미약한 손을 내밀었다.
그저 평범한 인간의 손, 가롯이 조금만 움직여도 산산이 부서져 버릴 필멸자의 육체.
그런 미약한 그릇에 영혼을 담은 그저 필멸자이면서, 불멸의 악마 앞에 서 있는 인간의 태도에는 자신감과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으윽!”
악마가 그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것만으로 이곳이 뒤흔들렸다.
악마의 입에서 검은 숨결이 흘러나와 하늘을 메우기 시작했다.
검은 기운은 기둥이 되어 찐득하게 하늘의 소용돌이에 닿았다. 구름이 오염되었으며, 온 세상에 죽음의 역병을 퍼트릴 준비를 끝낸 듯 세차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성녀님이 방금 말했잖아요. 우리는 신의 장기말이 아니라고.”
“……맞아.”
“그럼, 그 잘난 예언에 대항해 보자고요.”
인간은 눈을 감았다.
콜브’랑데쥬Colb’randeju에 그려져 있는 룬이 희미하게 점멸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를 룬이, 이곳을 가득 채워 희미하게 깜빡거렸다. 생명력을 가지나 싶다가도, 금방 꺼져 갔다.
“룬은, 안 돼요! 신입…… 아니, 그, 어쨌든 룬은 안 돼!”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텔라테리였다. 그 뒤를 따라 레베카가 올라왔다.
“이곳에서는 룬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해요! 당신을 의심하진 않지만, 룬 언어는 절대로…….”
“룬 언어가 아니야.”
리리가 말했다. 그녀는 이 뒤에 볼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악마를 주시하고 있었다.
“왕의 언어야.”
그 누구도 들을 자격이 없는 문장을, 인간은 외었다.
돈 베르니카 키호테
DON BERNIKA QUIJOTE
이 시대에 기억하는 이가 없는 불멸자의 이름을.
* * *
뱀파이어는 피로써, 신뢰하는 자와 평생 영혼을 연결한다.
용은 이름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기꺼이 순간이나마 빌려준다.
인간은 용의 이름을 외었다. 그 순간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용이 어디에 있고, 어떤 고행을 견디고 있으며, 어떤 의지를 여전히 품고 있는지. 그리고 이 순간, 자신을 위해 모든 행동을 멈추고 그저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간의 바람은 이랬다.
내가 당신을 부른 이유가 숙명을 위한 당신의 여정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용은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용은 인간을 가로막는 거대한 존재가 무엇인지 가늠했다.
용은 자신의 힘을 얼마나 빌려줘야 인간이 계속해서 나아갈지, 생각했다.
그리고, 용은 결정했다.
용은 우주를 가로질러, 인간을 가로막는 부정한 존재를 향해 숨결을 내뱉었다.
* * *
성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멈추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이곳에 불어닥치는 폭풍이 그 어떠한 징조도 없이 순식간에 멈췄다.
텔라테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하늘에 별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먹구름이 이렇게 가득한데, 그 너머에 있는 별이 어째서 보일 수 있을까?
레베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하나의 별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건 점점 밝아지더니, 달이 되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저것이 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피해.”
레베카는 예민한 감각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당장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이 건네준 하얀 망토를 몸에 두르고, 텔라테리를 껴안고 몸을 낮췄다.
갑작스레 떠오른 별은 달이 되었으며, 곧 태양이 되었다.
그리고, 구름을 꿰뚫는 빛의 기둥이 되었다.
하늘을 뒤덮고 있었던 소용돌이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순수한 파괴의 정수를 이기지 못한 먹구름은 사방으로 거칠게 밀려나 하늘을 드러냈으며, 곧이어 일시에 모두 증발했다.
다시 드러난 푸른 하늘이 뚫려 검은 우주가 원형으로 드러났다.
빛의 기둥은 광명의 속도로 검은 산의 고원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그 충격에 이 일대의 땅이 내려앉았다. 거대한 진동에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모래와 재가 불타 치솟았으며, 눈을 뜰 수조차 없는 백색의 업화가 가롯을 강타했다.
굉음은 순간일 뿐이었다. 견딜 수 없는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빛의 기둥은 소리조차 불태워 버렸다.
인간의 품속에서, 눈만 내밀고 있는 리리는 악마의 영혼마저 불태우는 업화의 기둥을 똑똑히 보았다.
드레곤 브레스.
붉은 분노의 군주가 친우를 돕기 위해 내뱉은 한 줄기 숨결이 이 지상에 떨어졌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