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22
122화
ep38. 엘드리치, 사자(死者)의 구원자 (4)
리리가 어렸을 때 배웠던 학문 중, 그 중요성이 강조된 것 중 하나는 ‘신화’였다.
인도자의 의무를 계승하는 신카 가문의 외동딸은 고대 왕좌와 관련되어 있는 시대의 이야기를 숙지해야만 했다.
리리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황금의 시대 전에는 용이 세상을 지배했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지.”
“그게 어떻게 가능했어요? 용의 숫자는 부흥기 때조차 천을 넘지 않았다고, 전승에 적혀 있었잖아요.”
“전승이 거짓말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고, 리리는 조금 위축되었다. 리리의 어머니, 도이나 신카는 작은 농담 하나에도 위축되는 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전승을 믿지 않으면 그 어떤 신화도 의미가 없어지지. 좋은 질문이구나. 많은 학자들은 용이 세상을 완벽하게 지배하지 못했다고 추측한단다.”
리리는 어머니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우리 딸의 생각대로, 적은 숫자로 세상을 지배하기에는 힘이 부족했을 테니, 황금의 시대가 열린 뒤 왕이 용을 억제할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어. 왕의 군대가 용을 압도했다는 말이지. 즉, 용은 불멸자지만 절대자는 아니었던 것이란다.”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현실적인 관점이었고, 전혀 신화적이지 않은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전설은 들춰 보면 그 빛이 바래는 법. 리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악마를 영멸하는 백색의 열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생각했다.
어머니가 틀렸어요.
용은 충분히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들이에요.
용은 단 한 번도, 신화의 영역에서 끌어내려진 적이 없었어요.
“으윽……!”
순식간에 밀려난 대기가 원래 자리로 세차게 돌아오며 폭풍이 일어났다.
드래곤 브레스는 한층 더 강하게 이 땅을 짓눌렀다. 최초에 떨어진 빛의 기둥은 그저 전조뿐이었다.
리리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가롯의 거체를 올려다보았다.
어떤 비명도, 몸부림도 없었다. 불멸자 태생의 악마는 이 업화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걸까?
아니었다.
용의 숨결이 그 모든 행위를 허락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가롯의 움직임은 짓눌렸으며, 내뱉는 비명은 불태워졌다.
절대자의 불꽃은 고대로부터 비롯된 악마를 기꺼이 징벌했다. 그저 친우가 그것을 원했으니까.
갑작스럽게 쇄도한 불꽃의 기둥은 그 등장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졌다. 인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용이 세상을 바꾸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늘을 뒤덮고 있었던 먹구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푸른 하늘은 잠시 찢겨 우주를 드러냈다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뒤늦게 폭우가 내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서 내리는 빗줄기에는 재가 섞여 있었다.
무지개가 떠올랐다. 두 명의 태양신은 제 자손이 만들어 낸 지상의 풍경을 주시했다. 찬란한 햇살이 이 땅을 가득 채웠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일 처음 입을 연 건 텔라테리였다.
저 멀리 처음 보는 절벽이 있었다. 남부 접경지대라 불리는 이 죽음의, 땅이 통째로 내려앉아 생긴 계단 현상이었다.
“지반이…… 통째로 내려앉았어.”
이 땅에 가해진 힘이 얼마나 강력하고 또 얼마나 압도적인지 노골적으로 보여 준 풍경이었다. 이 정도 힘이 바로 눈앞에서 강림했는데, 나는 왜 살아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될 정도였다.
성녀는 고개를 들었다. 강렬한 빛에 순간 멀었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왔다. 가롯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고, 악마가 서 있던 곳은 녹아내려 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바위들이 붉게 물들어 광채를 발하고 있었는데, 그 모양은 하나의 룬을 그리고 있었다.
강선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영감님 다음에 만나면 말조심해야겠네.”
성녀는 그런 강선후를 빤히 바라보았다.
가롯이 사라졌다.
예언에 따르면, 자신과 함께 죽기로 되어 있었던 악마가 사라졌다. 성녀는 고개를 내렸다. 땅을 짚고 있었던 손바닥은 화상을 입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쓰라림이 느껴졌다. 껍질이 벗겨지고, 진물이 배어 나왔다.
입은 자유로웠으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재 섞인 비가 몸을 흠뻑 적셨다. 달라붙은 수도복은 무거웠고, 젖은 옷은 미지근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이 모든 감각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명했다.
예언이 틀렸다.
아니, 이 인간이 예언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인간은 뱀파이어의 상태를 확인하고, 뒤를 돌아 성녀를 바라보았다.
“증명했네요.”
“…….”
“신의 장기말이 아니었어요. 그렇죠?”
눈물이 흘렀지만, 잿물에 섞여 드러나지 않았다.
“성녀님.”
레베카가 다가왔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런 언질 없이 홀로 떠나신 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는데요.”
성녀는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예언 때문에 부모를 잃은 그녀. 죄책감 탓에 책임지고 거뒀지만, 그렇다고 죄책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미안해. 레베카. 미안해.”
성녀는 차마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진실을 안 수호기사가 배신감을 느끼고 자신을 떠날까 두려웠다.
레베카는 그런 성녀의 손을 잡았다.
“괜찮습니다.”
성녀는 레베카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붉은 눈동자는 성녀의 내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죄책감을 거두세요. 저는 당신을 떠나지 않습니다.”
“…….”
“말을 할 수 없는 당신을 섬긴 게 몇 년째인지 아십니까?”
레베카는 웃고 있었다. 그 표정에는 평안함과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뜻이에요.”
성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푹 숙였다. 표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강선후는 그런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가롯이 머물고 있었던 자리 정중앙으로 다가갔다.
작은 수정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반투명한 검은색의 수정.
디오네가 건네준 거인의 심장과 비슷한 성질을 띠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집어 들자 작은 고동이 느껴졌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묵직한 무게에 조금 놀랐다.
그곳에는 한눈에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구조의 룬이 그려져 있었다.
“뭐라고 적혀 있어?”
“……탈레talle.”
다른 어미 없이, 탈레 하나만 적혀 있었다.
리리는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탈레는 당신이 만든 언어라고 하지 않았어?”
“만든 게 아니라 발견한 언어일 수도 있지.”
리리의 눈이 커졌다.
“……당신이 이 악마를 만난 적이 있다는 뜻은 아니지?”
강선후는 대답하지 않고 한동안 수정을 내려다보다가, 호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은 뒤 제자리로 돌아갔다.
텔라테리는 그런 강선후를 바라보다가, 넙죽 절을 했다.
텔라테리는 이 모든 상황의 진상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이렇게 보였다. 한 인간이 룬의 경지를 초월한 언어를 내뱉었고, 이해할 수조차 없는 압도적인 힘이 순식간에 악마를 영멸했다.
텔라테리는 나크샤론 중에서도 엘드리치의 전승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던 학자였다. 그 전설에 로망을 품으면서도, 눈이 멀어 신앙처럼 여겨선 안 된다는 다짐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다짐은 지금 이 순간,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엘드리치의 거대한 힘을 엿봤으니까.
“에, 엘드리치님…….”
“일어나세요. 나 그런 거 좋아하지도 않고, 뭣보다 예법 같은 거 아는 게 없거든. 사람들이 그럴 때마다 골치 엄청 아프거든요?”
“아…….”
텔라테리는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강선후는 그런 그녀를 지나치며 말했다.
“이제 어쩔 거야?”
“우선 마탑으로 돌아가야지.”
“어쩌려고?”
강선후는 모두를 한 번 바라보다가 말했다.
“밥 먹자. 배고파.”
“……나도 그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성녀도, 그런 성녀의 손을 잡고 있던 레베카도, 그리고 종족의 창조자를 만난 영광에 정신을 못 차리던 텔라테리도 산을 내려가기 시작한 인간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성녀님.”
“…….”
“내려가시죠.”
성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님은 내려갈 힘이 남아 있으십니까?”
“……노력해 볼게요.”
이들은 저 인간이 어떻게 이토록이나 태평한지 알 수 없었다. 역사에 영원히 남을 만한 대 사건의 주역이 되었음에도, 인간은 지금 그저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엄청 멋있었지?”
“……무서웠어.”
이런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그저 순수한 기쁨과 흥분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 * *
“……키호테께서 뭐라고 하셨어?”
“내가 키호테랑 이야기를 나눈 걸 어떻게 알았어?”
“당신이 생각에 잠겨 있었으니까. 왠지 그렇게 느꼈어. 좀 말도 안 되는 이유인가?”
“제법인데.”
아무래도 티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 키호테의 영혼과 교감했다. 그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떤 고행을 견디고 있는지 피부로 느꼈다.
“……영감님은 좀 무리했어.”
“불멸자인데 무리라는 단어가 의미가 있을까?”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에게 ‘무리했다.’라는 표현이 어울리기나 한가?
하지만, 세상에는 역시 절대란 없는 법이었다.
키호테가 견디고 있는 고행은 불멸자마저 시험에 들게 할 정도로 가혹했으니까.
산을 내려가는 동안 계속 생각에 잠겼다. 내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왠지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나를 배려해 주는 것 같은 모습이라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용의 귀환이라는 거, 나는 그걸 보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그토록 힘든 일일 거라는 생각은 못 했네.”
조금은 철없이 졸랐던 건가? 그런 생각이 들다가 사라졌다. 용의 귀환은 내가 아니라 오히려 키호테가 더욱 원했던 것이었다.
왕이 그에게 부탁했고, 키호테는 왕과 한 약속을 이루고 싶어 했으니까.
“용은 이제 곧 귀환할 거고, 그때까지는 키호테가 사명에 집중할 수 있게 배려해야겠지.”
아마도, 더 이상 키호테의 진명을 사용할 일은 없을 것이라 다짐했다. 황금알을 위해서 거위의 배를 가르고 싶지는 않으니까.
솔직히 이제는 필요 없을 것 같기도 하고.
황금 지침에서 남색 보석을 빼서 손에 쥐어 보였다. 곧이어, 그것은 1미터가 조금 넘는 길이의 지팡이가 되었다.
나무뿌리를 연상시키는 막대 부분과, 그 끝에 달려 있는 남색의 동그란 수정구.
“오오…… 그게 바로, 엘드리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고 한 그 마도의 보물!”
전통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법 지팡이었다. 아무래도 무슨 효과가 있는지는 시험해 봐야겠지.
안주머니에는 여전히 사진에 갇혀 있는 존슨이 있었다.
악마의 수정에 적혀 있는 룬과 마법 지팡이.
이거라면, 어쩌면, 다시 존슨을 만날 수 있을지도.
아니, 확실히 만날 수 있었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서 생각하건대, 이런 느낌이 드는 경우에는 웬만하면 맞더라.
다시 소지품을 넣은 뒤 산 아래로 몇 시간 동안 이동했다. 꽤 높았지만, 비탈길이 완만하고 지형이 단순해서 내려가는 데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산책로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주변이 새까만 평야와 바위뿐이니 의외로 구경하는 맛이 났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두 명의 사람이 저 밑에서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아는 얼굴이었다. 언데드 특유의 푸른 피부지만, 손상된 곳 없이 깨끗한 신체는 저들이 보통 언데드가 아니라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이렇게 화창한 풍경에서 보니 선남선녀인 게, 꽤 어울리는 짝이라고 느껴졌다.
“아버지.”
“하바. 그리고 그, 옆에는…….”
“아다마입니다.”
“…제가 이름을 잘 기억 못 해서.”
“아다마…… 하바?”
뒤에서 텔라테리가 그 이름을 듣고, 기억을 되새기다가 입을 벌렸다.
“나크샤론의 선조…….”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구태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부끄러워할지도 모르니까.
“아버지의 힘을 엿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운명을 극복…….”
저런 사실은 나한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제, 자유로워지셨어요?”
“……우리들 말입니까?”
“그거 말고 뭐가 중요해.”
하바와 아다마는 조금 뜸을 들인 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
헉헉대며 뒤따르던 텔라테리는 힘든 것도 잊은 듯, 앞으로 달려나가 그들과 마주했다.
“우리의…… 선조…….”
조금 기다려 줘야 하나? 부모와 자식의 재회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도무지 기다려 주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히 좀 피곤하거든.
이럴 때는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아다마, 하바. 같이 갈래요?”
“어디 말씀이신가요?”
“밥 먹으러.”
“…….”
리리는 표정 관리를 하면서도 옆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다마와 하바는 서로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했다. 저런 거 하지 말라니까.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