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30
130화
ep40. 무덤도시 (2)
어느새 주변을 감싸고 있었던 유령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곳에는 강선후 일행과 하나의 거인만이 남아 있었다.
거인은 머리를 감싸고 벌벌 떨었다. 구멍이 잔뜩 뚫린 넝마를 뒤집어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둘러싼 앙상한 팔다리만이 저것이 얼마나 풍화된 존재인지 드러내고 있었다.
차소희는 어느새 자신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대하고 찬란한 환영은 찰나의 순간뿐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환각을 봤을 뿐일지도 몰랐다.
강선후는 뛰어난 인간이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강선후는 정말 나와 같은 인간이 맞나?
어느 순간부터 까마득히 높은 위치로 올라가게 된 건 아닌가?
고대의 묘지를 지키던 거인을 무릎 꿇린 인간을 좀 특이한 친구일 뿐이라고 평소처럼 넘어갈 수 있는 건가?
그렇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지냈던 친구가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갑자기 공포가 솟아올라 가슴을 가득 채웠다. 전속력으로 달렸다가 막 멈춘 것처럼 호흡이 깊어졌다.
흉측한 모습의 거인 탓이 아니었다. 오랜 친구를 이전과 같이 대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돌아오는 강선후를 볼 때마다 아무 생각 없이 반가워하기만 했었다.
그런 날 밤마다 여지없이 진행했던 술자리에서 경험담을 듣고는 했지만, 그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감각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강선후가 이뤄 낸 경지와 업적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된 순간, 이제까지 들었던 그 모든 이야기가 기억 속에서 다시 떠올라 형태를 가졌다.
그건 그냥 이야기들이 아니었다. 강선후가 경험한 생생한 이계의 사건이었고, 하나하나가 역사를 만들어 낸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 강선후는 인간의 몸으로 고대의 묘지기를 굴복시킴으로써 그 사실을 증명했다.
“……선후야?”
강선후는 한동안 묘지기를 올려다보았다. 묘지기는 들고 있던 삽을 놓쳤다. 건물이 무너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먼지가 솟아올랐다.
입을 연 건 거인 쪽이었다.
「어, 어떻게, 외톨이 종족이 서약의 증거를, 거인왕의 서약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강선후는 고개를 내려 심장을 바라보았다.
“이 심장이 그 서약의 근거인가?”
“그게 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받은 거야.”
“……디오네가 그냥 한 말은 아니었구나.”
“그걸 믿고서 가만히 있던 게 아니었어?”
강선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었지만, 근거는 없었지.”
아무런 근거는 없었지만, 강선후는 디오네와 대화를 나누며 그 긍지를 느꼈고, 그건 디오네를 믿은 이유가 되었다. 리리도 이제는 그의 행동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다.
— 내 심장을 소유한 검은 머리의 인간을 마주한다면, 그를 위해 길을 낼지어다.
— 나, 그를 위해 기꺼이 거인왕의 창을 다시 들리라 맹세했으니.
디오네는 하늘을 빌려 온 세상의 거인에게 외쳤었다. 하늘과 연이 없는 무덤에서 평생을 살아오던 거인이라 할지라도, 이 목소리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강선후는 문뜩 이 부분이 궁금해졌다.
“……이름이 뭐지?”
「묘, 묘지기. 이름 없는 묘지기.」
거인은 고분고분하게 강선후의 말에 대답하고 있었다. 숨소리가 절반 이상 섞인 그 목소리는, 그가 얼마나 뒤틀렸는지를 알려 주는 듯했다.
“이름이 없다고?”
「왕에게…… 이름을 가질 자격을 박탈.」
강선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묘지기라 부를게. 디오네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렸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알고 이렇게 멈춘 거야?”
「그것이 왕의, 왕의 의지니까.」
묘지기가 하는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왕의 의지가 뭐 어쩐단 말인가?
「왕의 의지란 그런 것…… 왕이 된 자의 전언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흔드는 거대한 외침. 우리는 그것에 복종.」
강선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잠시 모습을 드러냈었던 유령들을 떠올린 뒤 디오네의 심장 조각을 든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안내해.”
「…….」
“왕이 너한테 묘지기의 의무를 부여했다면 네 의무를 다해. 네가 황금 시대의 일원이었다면.”
「…….」
잔뜩 움츠러든 묘지기를 올려다보는 강선후의 눈빛에는 의외로 약간의 노기가 서려 있었다.
“부끄러운 줄 알아.”
거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삽을 들어 지팡이처럼 몸을 지탱했다.
보통 사람일 뿐인 차소희와 진서연도, 강선후의 말을 따르는 거인의 뒷모습에서 침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강선후는 저 거대한 존재를 타박하고 있었다.
묘지기는 이 도시의 중앙으로 안내했다. 그곳까지의 거리는 꽤 멀어서,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걷기만 해야 했다. 여기저기 쓰러진 묘비와 파헤쳐진 흔적이 엿보였다.
“저, 화났어요?”
조금 여유가 생긴 진서연이 그 뒤를 따라가다가 물었다.
“……글쎄요. 아니라고 말하긴 뭐 하네.”
“왜요? 아니, 다른 이유는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요.”
강선후는 거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거인은 묘지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그런데, 정작 지금 묘지를 파헤치고 이곳에 있는 영혼을 포식하고 있었다고 하잖아요.”
“그 유령들이 그렇게 말했지.”
서지아가 대신 유령들이 한 말을 진서연에게 알려 줬다.
강선후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이제까지 여행하면서 황금 시대 출신을 몇 명 만났어요. 그들 중 대부분은 희망을 잃은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끝까지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게 잘못이라는 생각은 안 해요. 능력이 안 닿으면 못할 수도 있지.”
묘지기는 단순히 의무를 저버린 걸 떠나, 왕이 없는 틈을 타 무덤을 유린하고 있었다.
“근데 이건 잘못된 거잖아.”
리리는 그 모습을 보며 내심 기뻤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이 인간이 조금씩 숙명에 대해 이해하고 존중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동안, 묘지기는 도시의 중간으로 이들을 안내했다.
그곳에는 아주 거대한 비석이 있었다. 멀리서 봤던 빌딩 같은 높이의 비석이었다.
그 비석이 지키는 무덤은 파헤쳐졌는지 그 아래쪽 공간이 훤히 드러나 있었는데.
“……병마용.”
진서연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어떤 황제의 지하 군대를 떠올렸다.
지금 눈앞에 있는 모습과 걸맞은 비유였다.
거대한 공간은, 이곳에서 최소 20m 아래쪽에 형성되어 있었다. 그곳은 정사각형의 거대한 방이었는데, 그곳을 빼곡히 채우는 건 흙으로 빚은 것 같은 인간의 형상이었다.
강선후는 묘비에 적힌 글귀를 읽어 나갔다.
“기나긴 풍화의 시대가 끝나고 황금이 재건될 그때를 위해 우리는 이곳에 잠든다.”
바람에 실린 영광이 사그라드는 비극을 잊지 않은 채, 우리는 죽음을 거부한다.
왕의 부탁을 따라, 우리는 이곳에서 잠든다.
왕이 사라지고 나서도 우리는 왕에게 충성을 바친다.
「……지난 왕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있을 왕을 위해.」
어느새, 병사의 토용(土俑) 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것에서 푸른 유령이 나와, 강선후에게 절했다.
「우리의 무덤을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들은 왕의 군대인가요?”
유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앞으로 왕이 될 자의 명을 따르는 군대입니다. 왕의 군대라는 명예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
유령의 목소리는 메아리치고 있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서지아가 입을 열었다.
“이 남자가 당신들을 구원했어. 맞지?”
유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신들이 이 남자의 원군이 되어 주는 거야? 그게 이 세상의 법칙 아닌가?”
유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왕이 될 자의 명을 따른다.」
“왕이 아니라면 움직이지 않는다? 이 남자가 지배자인데도?”
「왕이라 인정한다면, 누구의 명이라도 따른다. 우리가 왕이라 인정한다면.」
표정이 없는 유령 특유의 얼굴에서 의지가 느껴졌다.
강선후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미소를 지었다.
“……재밌네요. 그리고 여기, 진짜 멋있는데.”
모두가 깨달았다. 사실 강선후는 아까 전부터 주변을 둘러보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는 것을.
강선후는 가만히 삽을 들고 서 있는 묘지기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이곳에서 숙명을 다해. 다음에 왔을 때, 이곳에 문제가 없기를 바랄게.”
「…….」
묘지기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거인왕의 서약을 받은 인간의 존재, 그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그 뒤, 진서연을 비롯한 모두가 기대했다. 강선후가 여기에서 뭘 할까?
하지만 강선후는 그저 묘지 도시를 구경하고, 유물로 보이는 물건 몇 개를 기념품으로 챙길 뿐이었다.
묘비의 재질에 대해 궁금했으며, 이곳의 천장을 받치는 종유석이 자연적으로 형성되었을지에 대해서 궁금해했다.
리리는 이 모습에 익숙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신선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새 모두가 강선후식 모험에 차츰 익숙해졌다. 거인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나니 이곳은 그저 환상적인 모험지였다.
우리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무덤 위로 올라갔다.
“마음 같아서는 며칠 있으면서 조사를 하고 싶은데. 베이스캠프 아래에 이런 게 있다니, 상상도 못 하지 않았어요?”
진서연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집 바로 앞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급할 건 없었다. 강선후의 그 여유에 이제 슬슬 모두가 익숙해지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사무소로 돌아가 짐을 정리하고 탐험의 내용을 복기했다.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남겨진 영혼들이라…….”
비유하자면, 병마용.
정말로 영혼이 깃들어 있는 병마용이었다.
강선후는 마당의 나무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가 황금 지침을 들여다보았다. 언제나처럼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지침.
다음 여행 목적은 이 지침이 가리키는 방향이었다.
“이제 어쩔 거야?”
리리가 넌지시 물었다.
“사실 모르겠네. 솔직히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데, 어떻게 해? 지훈 씨한테 헬기라도 빌려 달라고 부탁해야 하나?”
“헬…… 기?”
고개를 갸우뚱하는 리리.
헬기가 뭔지 어떻게 설명하지? 그러고 보니 헬기 가지고 닿을 만한 곳도 아니겠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지침의 끝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이거, 좀 많이 흔들리는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미세한 진동만 간신히 보였던 지침의 끝이, 명백히 더 큰 폭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변화를 느낀 그 순간, 하늘의 한 편에서 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리리와 강선후는 일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쪽…….”
서쪽 하늘에서 거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제 막 지기 시작한 첫 번째 태양보다도 순간 밝게 느껴지는 빛.
유성이 떨어진다는 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계의 유성이란 성좌와 관련이 있는 형상이었다.
“……성좌는 저런 식으로 낙하하지 않아.”
리리가 말을 끝낸 그 순간.
쿠우우웅—!
운석은 땅에 떨어졌다.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평선에 걸쳐 있던 태양 빛이 가려져 그림자가 드리웠다.
리리도, 강선후도 서쪽을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뒤늦게 폭풍이 몰려와 나무와 숲을 세차게 흔들었다. 구름이 더 빠르게 흘렀다.
“……깃털.”
먼 거리임에도 똑똑히 보였다 산 뒤쪽에 꽂힌 깃털 하나의 모습이.
가장 높은 산봉우리보다도 더 높게 솟아오른 깃털.
보랏빛 오로라가 은은하게 흐르는 남색. 이계의 밤과 같은 색깔이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