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34
134화
ep41. 북서쪽, 먼 여행길 (3)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내달렸던 거대한 평야가 눈에 들어왔다. 크고 작은 동산과 언덕이 있는 곳.
만약에 말과 두 다리에만 의지했다면 몇 달이 걸려도 도착하지 못할 법한 거리를, 우리는 비프로스트를 통해서 한 번에 주파했다.
풍경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다가 차가운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리리를 바라봤는데, 그 붉은 눈에 꽤 풍부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리리답지 않게도 말이다.
그리고 난 저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오지를 돌아다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눈빛. 고향을 그리워하는 감정이었다.
물론 리리의 눈가를 스치고 지나간 감정은 아주 미세했다. 마치 일부러 억누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뱀파이어는 설산 지대의 종족이야.”
리리가 입을 열었다.
리리의 고향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내가 그걸 묻지 않았고 리리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리리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과거를 고향에 두고 왔다. 내 입장에서도 굳이 그걸 들춰낼 필요는 없었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히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리리는 고개를 돌려 북쪽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높았고, 덕분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산악 지대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부분부분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구름이 무언가를 가리는 모습은 굉장히 이질적이다. 보통 비행기를 탈 때나 경험할 수 있는 건데, 이곳은 그토록이나 높았다.
“저쪽에 내 고향이 있어.”
이쯤 되면 어쩌다 베이스캠프까지 흘러들어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얼마나 오래 여행을 했던 걸까? 웬만치 척박한 환경을 거뜬히 견딜 수 있는 이유가 뭔지 슬슬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번 가 보자.”
“……그래도 될까?”
“네 어머니도 그걸 원하셨잖아.”
리리는 언제나 목에 걸어 두는 황동 열쇠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마워면, 나 부탁 하나만.”
“……고맙다곤 안 했는데.”
리리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여전히 산을 밟고 서 있는 거대한 악마와 거인의 석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과장 좀 많이 보태면 저 머리하고 어깨는 하늘이라기보단 우주에 위치해 있다는 생각이 정도였다. 누가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모습.
“저게 뭐야? 저 정도 규모면 그다지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닐 거 같은데, 혹시 알아?”
“……최초의 전쟁. 나도 말로만 들었어. 노미나 산맥에 이런 지형이 있다는 걸.”
“무슨 지형인데?”
“황금의 시대보다도 훨씬 전, 원시 시대때 최초의 악마와 거인이 싸운 전쟁터이야. 이름이 없는 악마, 그리고 최초의 지배자가 벌인 전쟁이래.”
“용이 신의 첫 번째 자손이라며? 그런데 왜 거인이 최초의 지배자야? 거인이 용보다 센가?”
그래 보이진 않았는데.
키호테의 브레스를 다시 떠올려 봤다. 거인이 아무리 강해도 그 브레스보다 강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실제로 크라켄은 내가 직접 결판 냈는데, 키호테와 싸운다면 무슨 수를 써서도 이길 자신이 없었으니까.
“거인은 신의 자손이 아니야. 신의 자손이 태어나기 전엔 거인이 세상을 지배했대. 그래서 신의 자손들인 우리에게 적대적인 거고.”
“……공룡 포지션이구만.”
“공룡?”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까지 만난 모든 거인들이 디오네를 제외하고서는 호전적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런 배경이 있었구나? 아니 어쩌면 그냥 원래 호전적인 모습을 보고 이유를 끼워맞췄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신화란 게 원래 그런 거니까.
하지만 그래서 재밌는 법이지.
그 외에도 보고 생각이 많아지는 풍경이 많았다. 송곳처럼 솟아 올라 있는 봉우리, 그 봉우리에 골무를 씌운 것처럼 지어져 있는 거대한 사원.
게다가 우리 아래에 있는 계곡을 가르지르는 강, 그리고 그곳에 지어진 황금빛 댐.
정말로 멋진 풍경들이었지만, 그걸 보고 생각에 잠기기에는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우선 내려가자. 너무 춥다.”
“내 옷 줄까?”
“허세 부리지 마. 추위 타면서.”
“……허세 아니거든. 우리 종족은 추위는 타도 그것 때문에 몸에 문제가 생기진 않아.”
그제야 우리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기 저 멀리, 구름 아래에는 충분히 사람이 살 수 있을 것 같은, 안락해 보이는 풍경이 미세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문제를 깨달았는데.
“……당신, 방법은 생각해뒀어?”
“무슨 방법?”
“여기서 어떻게 내려가?”
리리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도 이해가 갔다. 눈에 뒤덮인 비탈길은 저 아래로 가파르게 뻗어 있었다.
정상적으로 내려가면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리리는 고산에 익숙하고 추위에 강하기 때문에 수월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내려가더라도 체력 소모가 어마어마하겠지.
…… 좋은 탐험 강의 시간이라고 여겼다.
“리리.”
“렐릭시나 등 위에 올라타봐.”
“……지금?”
“어.”
리리는 조금 수상하게 보다가도, 내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파악되지 않은 오지에서, 목적지에 도달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식량? 물?”
“그것도 그런데, 경로 설정이야.”
무작정 나아가다가는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빠질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다. 부족한 관찰력과 섣부른 결단은 오히려 무수히 있었을 기회를 전부 시궁창에 버리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음……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래서 목적지를 정확히 설정하고, 지금 내가 있는 위치에서 목적지 사이에 뭐가 있는지, 또 어떤 위험요소가 있는지 알 수 있을 만큼은 최대한 알아야 해. 여기에서 이제 안목하고 경험치가 갈리는 거야.”
“……그래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저 아래에 황금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댐이 있었다. 댐은 그 자체로 다리의 역할을 하고, 무엇보다 문명의 흔적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도달할 첫 번째 목적지로 적합하겠지?”
“……그래서?”
“그래서라니?”
“……그게 지금 밧줄로 말에 내 몸을 묶는 이유야?”
“섭섭하게 말하네? 안전줄이야. 너 다치지 말라고 이러는 거라고.”
리리를 묶은 매듭을 확실하게 확인한 뒤, 나도 렐릭시나의 등에 올라탔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거 하나, 동행하는 동료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최대한 응용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렐릭시나가 천공섬에서 키호테와 레이스를 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렐릭시나의 움직임은 내 예상 범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천공섬에서 뛰어내려 산 비탈길을 미끄러지듯 내려가며 충격을 흡수하는 움직임.
“렐릭시나는 그냥 말이 아니야.”
“대체 이제부터 뭘 하려는…….”
“렐릭시나.”
“크릉.”
“가자!”
“크아아악!”
렐릭시나가 포효를 하며, 땅을 박차고 비탈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리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안장의 손잡이를 꽉 붙잡은 채 몸을 앞으로 기댔다.
* * *
최초의 전쟁터.
거인과 악마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 지대에 붙은 이름이었다. 퍽 무서운 명칭이었으나, 그와는 별개로 이곳는 꽤 평화로운 곳이었다.
댐 위에는 노년의 남성과, 그 딸로 보이는 여성이 걷고 있었다.
“이 댐은 이렇게 매번 점검해야 해요? 하는 것도 없는데 너무 지루해…….”
“이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라 철없는 녀석아.”
“아아! 꿀밤 그만! 내가 이 나이에 머리 쥐어박혀야 해?”
“쥐어박힐 말을 하지 말아야지 요놈아!”
여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짜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씨잉…….”
“위험한 일은 아니지 않느냐? 매 기사단장님의 명령이다. 불평하지 말어.”
“알겠어요. 알겠어.”
툴툴대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오히려 앞서 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앞에는 댐을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하는 거대한 산봉우리가 있었다.
여성은 그걸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산 너머에는 따뜻하고 건조한 곳이 있다고 했잖아요. 아버지.”
“그렇지.”
“가봤어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산은 못 넘어. 저 건너로 가려면 서쪽을 경유해서 가야 하니까.”
“그럼, 저 산 꼭대기를 밟아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그렇지. 용이나 매가 아니고서는 저 산 꼭대기에 갈 수 없겠지. 저 산은 이제까지 한 번도 변화를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부동의 노인’이겠냐.”
“……지루한 산이네.”
그 순간이었다.
드드드드—
갑자기 진동이 시작됐다. 땅이 흔들렸다.
인간 여성은 아버지를 부를 새도 없이 난간을 붙잡고 몸을 지탱했다. 노인은 물이 가득 차올라 있는 저수지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전혀 좋지 않았다.
드드드드——
“댐에 잠들어 있는 뱀이…….”
“네?”
젊은 여성은 사색이 되어 되물었다.
“그 뱀은 아직 깨어날 시기가 아니잖아요?”
이 댐의 저수지 바닥에 잠들어 있는 거대한 뱀.
크게 자극하지 않는다면 정해진 시기에 깨어날 뿐인 그 괴물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물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투명한 그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실루엣이 잠시 보였다 사라졌다. 노인은 주름진 피부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딸의 말대로였다. 그 뱀이 활동하는 시기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고, 지금은 안전한 시기였다.
절대로, 절대로 뱀이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시기인데.
그런 노인의 생각이 무색하게 뱀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 머리만 해도 집채만한 뱀은 실제 뱀이 그러하듯, 절대로 동요하지 않고 머리를 들어 올렸다. 정수리부터 물이 쏟아지면서 천천히 드러내는 그 눈은 어딜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간헐적으로 내미는 혀만이, 저게 의식을 되찾았다는 걸 의미했다.
뱀이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듯 댐에 턱을 걸쳤다.
쿵——
진동이 발 끝을 타고 넘어왔다. 그와 동시에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던 노인도, 그 딸도 정신을 차렸다.
“아, 안 돼.”
“아버지. 아버지! 정신 차려요.”
여성은 공포에 질리는 얼굴을 하면서도 끝까지 이성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당장 마을에 알려야 해요. 기사단에도.”
“…….”
불가능해.
노인은 차마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뱀은 벌써 버리를 댐 바깥으로 내밀고 있었다. 완전히 저수지에서 벗어나 댐 밑으로 내려가 버린다면 미처 대피하지 못한 저 아래의 마을 사람들이 그 재앙을 몸으로 받게 된다.
“쉬이이익—.”
뱀은 혀를 날름거리며 댐 아래를 바라보았다. 저 아래에 있을 수많은 먹잇감들을 이미 감지하기라도 한 듯, 정확히 마을 방향을 주시했다. 피부를 뒤덮은 비늘이 물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묘한 흔들림이 공기를 타고 넘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바람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뒤늦게 고개를 든 이들의 눈에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풍경이 들어왔다.
“……?”
처음에는 산이 무너져 내린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곧, 저게 눈사태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산 꼭대기부터 시작한 눈의 파도가 자욱한 흰 연기를 뿜어내며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해를 보는 건 아니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아무런 감정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었다.
“……부동의 노인이…….”
“저게 무슨…….”
젊은 여성의 눈에는 그렇게 대단치 않은 장면이었으나 세상의 법칙이 머릿속에서 굳어 버린 노인의 눈에는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60년을 넘게 여기에서 살아온 노인의 삶 속에서, 저 산은 단 한 번도 움직인 적도 풍경을 바꾼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산에서 눈사태가 일어나다니?
절대로 작은 변화가 아니었다.
눈사태는 순식간에 지면과 가까워졌다. 그것이 몰고온 냉기가 이 댐 위까지 확 하고 휩쓸 정도였다.
그리고, 그 거대한 파도가 지척까지 다가오고 나서야 깨달았다.
눈사태는 생각보다 거대했다는 사실을.
쿠우우우우—
눈의 파도가 댐 위에서도 멈추지 않고, 그 표면을 따라 거칠게 흘렀다. 뒤따라온 추가적인 눈이 두께와 파괴력을 더했다.
“……?”
뱀은 뒤늦게 자신을 덮치는 위협을 감지했다. 이토록이나 둔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에서 뱀을 위협하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쿠우웅—!
거대한 맷돼지가 달려들듯, 눈사태는 뱀의 머리를 강타했다.
눈사태는 멈출 줄 모르고 뱀을 밀어붙였다. 댐 위에 걸쳐져 있었던 그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돌아갔고, 뱀은 충격에 쇼크를 받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젊은 여성과 노인은 그 모습을 보며 그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눈발이 피부를 가르듯 날카롭게 부딪혔다.
눈 폭풍 안에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렐릭시나! 더 달려! 따라잡히면 냉동육 된다!”
“크르릉—!”
하얗게 일어나는 거대한 연기.
그 눈사태 속에서 불타는 갈기를 타고, 한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이겼다!”
“당신, 나랑, 나랑…… 얘기 좀 해. 이번에는 진짜로. 할 말 많아.”
“뭐라고? 안들려!”
“우리 지금 달리고 있지도 않거든!”
“나 고막이 얼었나 봐—.”
“……아버지.”
노인은 그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그 자는 인간이었다.
자신과 같은 인간이었다.
부동의 노인 꼭대기에서 때가 되면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온다는 한 신령의 전설을 떠올렸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