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35
135화
ep41. 북서쪽, 먼 여행길 (4)
뱀이 죽은 걸 확인하고 나서야 긴장을 풀었다. 안 그래도 한창 내려가는데 갑자기 저수지가 파도치는 걸 보고 조금은 당황했었지.
고개를 돌려 슬쩍 바라보니 리리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따가 잔소리 좀 듣겠구만.
말도 안 하고 이런 짓을 벌였으니 화가 날 법도 하지만, 괜히 일을 벌이기도 전에 말 해 버리면 오히려 안 먹어도 될 겁을 잔뜩 먹었겠지. 괜한 공포를 먼저 느끼고 위축되어 주저하느니 먼저 질러버리는 게 낫다. 그게 내 지론이었다.
“……내가 놀라는 걸 보고 싶었던 게 아니고?”
“그 생각이 없었다고는 말 못 하지?”
내 옷깃을 쥐고 있는 리리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슬슬 리리도 눈치가 빨라지는 게, 이제는 놀려먹으려면 꽤 머리를 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주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뒤에는 산에서 쏟아져 내려온 막대한 양의 눈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심지어 우리 몸을 반쯤 덮고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우리가 저 안에 그냥 파묻혀 버릴 뻔했다.
리리도 눈이 잔뜩 묻어 하얀 솜털이 난 것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렐릭시나의 검은 털에도 물방울이 맺혀 있었는데, 그 뜨거운 체온에 증발하여 아지랑이처럼 김을 뿜고 있었다.
“푸르릉—.”
투레질하는 렐릭시나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재밌었지?”
“크릉—!”
“재밌기는! 당신 진짜 재밌자고 매번 목숨 걸고 도박할 거야? 어?”
뒤에 타고 있는 리리가 손바닥으로 등을 때렸다. 가죽 재킷은 두꺼우니 아프지도 않았다.
애초에 내 신경은 온통 거대한 회색 뱀에 쏠려 있었다.
쓸려온 막대한 양에 머리를 파묻고 축 늘어져 있는 뱀은 드러난 몸통의 두께만 봐도 보통이 아니라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못 해도 몸길이만 수십 미터는 될 거 같은데, 몸통 대부분이 저수지 아래에 있었다.
“음…… 리리.”
“왜 불러.”
“나 사고 쳤나?”
“새삼스럽게? 이제 좀 반성할 생각이 든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이 뱀이 혹시 막 이 지역의 신수 취급받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내가 이계를 잘 아는 건 아니다. 하지만 거대한 생물과 공존하는 문화권이라면 이런 생물을 신성시하는 토속신앙 같은 게 있을 가능성은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마침 눈앞에 있는 두 명의 사람의 혼란스러운 표정에서 일말의 안도감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뭘 잘못한 건 아니겠지.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신령…….”
뭐?
노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약간 트라우마가 올라오려고 하다가 말했다.
“부동의 노인 꼭대기에서 때가 되면 내려온다는…….”
리리가 귓가에 넌지시 속삭였다.
“이번에는 신령이야?”
뒤를 슬쩍 돌아보니 드디어 리리도 이 상황에 일말의 재미를 느낀 모양인지, 그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건 나 아니야.”
“확신할 수 있어?”
뒤를 돌아보았다. 지나가는 구름이 걸칠 정도로 높은 산봉우리가 보였다. 우리는 방금까지 저기에 있었다.
“아마 여기 사람들은 저 산봉우리에 오르지 못했을 거고, 그럼 저 산봉우리를 신성시하는 문화가 생겼을 거야. 신령에 대한 전승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생겼겠지.”
“흐음.”
“딱 봐도 각이 나오잖아?”
“그렇게 딱 보면 보여?”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손이 닿지 않는 것에 상상력을 투영하고 공상 속 존재를 대입하기 마련이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느낀 건데, 문화란 건 어느 정도 거기서 거기인 면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저 산에서 내려왔으니 날 보고 신령 어쩌구 하는 거겠지.”
엉거주춤 서 있는 저 사람들이 겁에 질린 것 같아서 내가 먼저 다가가기로 했다.
“이 근처 마을 사람이세요?”
노인은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서 렐릭시나의 등에서 내렸다.
“나 이제 풀어 줘.”
리리의 몸을 단단히 묶고 있는 안전줄도 풀고 렐릭시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겉보기에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무섭게 생긴 터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본의 아니게 위협하는 꼴이 되기 쉬웠다.
노인이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빛을 보아하니 그 신령 어쩌구에 심취한 것 같은데, 골치 아프네.
노인의 뒤에서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좀 어려 보이는 여성이 보다 못해 나섰다. 나이가 어린 사람은 노인보다는 비교적 미신에서 자유로운 사고를 할 줄 알기 마련이다.
“저, 그쪽은 사람 맞죠?”
“아닌 것처럼 보이나?”
“그건 아닌데요! 부동의 노인 꼭대기에서 불타는 말을 타고 눈사태랑 같이 내려오는 사람이 사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조금 합당한 거 같아서요!”
반박할 수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슬쩍 돌려 산을 바라보았다.
“그냥 저 산 넘어온 거예요. 눈사태는 내려오다가 우리도 만난 거고.”
“노미나 산맥 건너편 출신이신 거예요?”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여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뚜벅뚜벅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말리나 카르칼.”
“강선후예요.”
“간서누?”
“강선후.”
“이름이에요?”
“선후가 이름이에요. 강은 성.”
나는 이들을 처음 봤을 때부터 떠오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인간인가요?”
“인간이에요.”
쌍꺼풀이 진한 말리나의 눈은 크고 깊어서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한쪽 관자놀이에는 태극 문양을 반절 잘라놓은 것 같은 붉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갈색 빛이 도는 장발을 뒤로 묶은 모습은 지구에서도 자주 봤을 정도로 익숙했다.
이계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인간이었다.
* * *
노인은 뒤늦게 자신의 이름을 찬트라라고 소개했다. 찬트라 카르칼. 그는 말리나를 잠시 뒤로 불러내서 속삭였다.
“어쩌려는 거냐?”
“마을 구경시켜 주게요! 외부인이잖아요!”
“신령님이 우리를 시험하는 거면 어쩌려고?”
“아니, 아버지. 산을 넘어왔대잖아. 산에서 내려오면 다 신령이에요? 나도 그럼 오늘부터 신령 할래 그냥. 산 갔다 온다?”
“이놈의 자식이…… 어째 네 말이 맞다고 쳐도 외부인이지 않으냐. 게다가 흡혈귀랑 동행하기도 하고. 조심성이라곤 없느냐?”
“아, 몰라요. 외부인 씨! 이름이 선후라고 했죠?”
말리나는 저런 딱딱한 이야기는 지겹다는 듯, 앞서 가던 인간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산맥 너머에는 노미나의 봉우리 하나가 통째로 들어가고도 남을 평야가 있다고 들었어요. 진짜예요?”
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에 묻혀 있는 뱀을 올려다보았다. 뱀은 죽었는데도 아직 간헐적으로 꿈틀거렸다. 그 피부가 물결칠 때마다 찬트라는 움찔거렸다. 20년 전 대비하지 못했다가 이 뱀에게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던 기억이 멋대로 떠올랐다.
그 경험을 해 보지 못했던 자신의 어린 딸, 말리나는 태평했다. 저토록 이나 경계심이 없는 딸의 천성을 찬트라는 크게 걱정하고는 했다.
최소 백 년이 넘도록 이 뱀은 근방을 괴롭히던 괴물이자, 동시에 두려움과 숭배를 동시에 받는 신수 취급을 받고 있었다.
매번 산제물을 바쳐야만 했는데, 그 세대를 걸친 비극이 이렇게 한순간에 끝나버린다고?
오랫동안 변화가 없었던 삶에 들이닥친 갑작스러운 사건이었다.
외부인은 뱀의 죽음을 다시 확인한 뒤, 댐 바깥, 아래에 펼쳐져 있는 초원을 눈여겨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의외로 그 표정에 담긴 감정은 순수해 보였다. 뭔가, 즐거움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뭐가 저렇게 즐거운가?
찬트라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귀, 귀인께서는 어째서 이곳에 오시게 된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저요?”
외부인은 고개를 돌리다가 끝내 위로 번쩍 들었다. 악마와 거인의 석상이 까마득한 높이로 머리 위에 솟아 있었다. 대낮에는 그림자가 져서 기후에 영향을 줄 정도로 거대한 석상이었다.
“구경하러.”
“……예?”
“그러면서 겸사겸사 뭘 좀 찾으러 왔죠.”
“뭘 찾으려…….”
“이곳에 조만간 매가 도착한다는 거, 알고 계세요?”
외부인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왔다. 찬트라도, 말리나도 당황할 정도로.
찬트라는 순간 거부감을 들었다. 이 외부인은 신의 강림에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는 건가?
찬트라의 경계심을 읽었는지, 외부인의 뒤에 서 있었던 뱀파이어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찬트라가 딱히 이 외부인을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신령일지도 모르며, 무엇보다 마을의 재앙이었던 뱀을 처리해 준 자가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을 닿고 나니 찬트라의 태도에 다시 온건함이 묻어났다.
“네. 알고 있습니다. 천 년마다 오는 그 강림을 보조하는 건 우리 카르칼 일족의 숙명이니…….”
“오.”
찬트라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의사를 표하자, 강선후의 표정이 밝아졌다.
“조금 더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우선, 우리랑 같이 갈래요? 내가 알려 줄게!”
뒤에서 멀뚱히 듣고 있었던 말리나가 나섰다. 딱 봐도 처음 보는 외부인, 그것도 건장하고 젊은 남자의 출현에 잔뜩 신이 난 듯한 모습이었다. 철없는 녀석 같으니.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저 나이에 어울리는 행동이었으니, 찬트라는 그것을 밉게 볼 수가 없었다.
* * *
“그러니까, 신이 강림할 때, 악마가 고개를 든다?”
“응! 그 악마가 고개를 들어서 신을 쫓아낸대. 그걸 저지하고 신이 이 땅에 착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우리 일족의 숙명이라나?”
일족의 숙명이라는 퍽 무거운 주제인데도, 말리나의 말투는 가볍기 그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어느새 말을 놓았네?
뭔가 활기찬 그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나도 그다지 태클을 걸고 싶진 않았다.
위이이잉—
지금 내 관심은 온통 이 엘리베이터에 쏠려 있었다. 댐 아래로 이동하는 외부 엘리베이터는 약간의 금빛이 도는 밧줄 하나에 의지해서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구조였다.
“으으…….”
리리가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다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보기에도 퍽 위험해 보였는데, 움직이는 건 고급 아파트의 그것처럼 부드럽고 정교했다.
“이 댐은 고대 유적이야?”
“응. 이 지역에는 이런 게 엄청 많아. 신기하지? 이런 거 본 적 있어?”
내가 사는 빌라에도 있는데.
어쨌거나 이계 사람들에게는 마법과도 같은 일이었다. 실제로 이 움직임에 룬이 관여되어 있다는 걸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너네 일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신의 강림을 돕는데?”
내 질문에, 말리나는 조금 뚱한 표정을 지었다.
“……알아내야지.”
“알아내야 한다고?”
가만히 듣고 있었던 찬트라가 대신 말했다.
“우리 일족은 단 한 번도 신의 강림을 성공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매 천 년마다 실패했다는 건, 우리가 아직 그 방법을 모른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찬트라의 말투에는 아직 나에 대한 의심이 서려 있었다. 숨기려고는 하는 거 같은데, 나는 못 속이거든.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우리는 댐 아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곳의 풍경은 위에서 봤던 것, 그리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위에서는 댐이었는데, 아래에서 봤을 때는 차라리 성벽과 같았다.
그 성벽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성벽에 들러붙어서 일이 잘 안 풀린다는 듯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이들은 찬트라를 보자마자 바로 그에게 소리쳤다.
“찬트라! 산사태가 있었는데, 다치진 않았고?”
“네. 작업반장님.”
“그럼, 위에서 뭐라도 좀 찾아냈소?”
찬트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을 열 법한 장치는 없었습니다. 사실, 더 댐 위에 올라간 게 처음은 아니잖습니까? 옛날부터 그런 건 본 적이 없었으니…….”
작업반장이라는 사람은 한숨을 푹 쉬었다. 얼마나 골머리를 썩이면 내 존재를 신경조차 쓰지 않는 걸까?
나는 금속으로 된 문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각종 중장비를 훑어보았다. 중장비라고는 하지만, 그래 봤자 좀 커다란 망치나 훨씬 더 커다란 망치. 그리고 집처럼 커다란 망치가 달린 기계 같은 조잡한 것들이었다.
문을 열려고 하나 본데, 방법을 찾진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작업반장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저기.”
“……?”
작업반장은 나를 힐끗 바라보고 눈썹을 추켜올렸다.
“……어디 마을에서 파견된 사람이오?”
아무래도 내가 외부인이 아니라 작업 인원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은근슬쩍 대답을 피하며 물었다.
“이 문을 열려고 하는 건가요?”
“그래요. 설명 못 들었나? 매 기사분들이 일주일 내로 이 문을 열 방법을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왜요?”
“그야, 조만간 신의 강림에 필요한 것이 이 문 건너편에 있다는 예지 때문이지.”
나는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바로 앞에 서니 고개를 한껏 올려야 꼭대기가 보일 정도로 거대한 문.
문 전체가 알 수 없는 금속이 되어 있었다.
“……열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괜찮아요?”
“……?”
내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작업반장은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보니 키가 참 큰 양반이네.
나는 장갑을 벗고, 맨손을 드러낸 뒤 손목을 만지작거리면서 풀었다.
“……리리.”
“안 까먹었네? 나는 완전히 까먹었을 줄 알았지.”
뱀파이어랑 영혼을 연결했는데, 그걸 어떻게 까먹어.
손바닥을 금속 문에 가져다 대었다. 저마다 대화를 나누던 사람 중 몇이 이쪽을 바라보았고.
치이이이이익——!
하나둘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내가 흡수한 기생체의 피가 품은 능력. 어쩌면 내가 가진 유일한 초능력.
오랜만에 쓸 구석이 나왔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