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36
136화
ep42. 악마에게 죽어야만 하는 사람들 (1)
강선후가 문을 부식시키는 행위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에게 시간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고, 조급함 없이 조금씩 떨어져 가는 금속 가루에만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멀찍이 떨어져 강선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 치고 덩치가 꽤 큰 이들은 저마다 팔짱을 끼든가, 서로 입을 모아 이야기를 나누며 강선후의 행동을 숨죽여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강선후가 무언가 도구를 들고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갈수록 지켜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했다.
“……지금 맨손이야?”
주변에는 온갖 공구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고대 전성기의 기술로 만들어진 이 금속 문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강선후는 맨손으로 금속을 녹이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저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묘기였다.
끝내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이곳으로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리리는 연고도 없는 곳에서 수많은 인간에게 둘러싸인 이 상황이 조금 무서웠다.
딸깍—!
강선후의 손이 두꺼운 문 안쪽까지 파고들었을 때, 자물쇠의 잠금장치가 파괴되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캉- 캉- 캉- 캉- 캉-
문의 아래에서 맨 위까지 연쇄적으로 무언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강선후는 서둘러서 손을 빼고는 뒷걸음질 쳤다.
까아아앙—!
연쇄적인 기계음은 문 꼭대기에서 날카롭고 긴 여운을 남겼다. 모두가 침묵을 유지하고 문을 바라보는 그때.
구그그그그—
“오오오오—!”
문의 아래쪽에서 모래가 긁히는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한 거야?”
리리가 물었다. 고작 저 정도 부식시켰다고 이 문 전체가 통째로 움직이다니.
“계속 보니까 알겠더라고. 난 기계랑 익숙하진 않은데…… 고대 유적 잠금장치는 다 거기서 거기야.”
그러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근데 여긴 이상해. 사실 이제까지 고대 유적은 고작 금속 부식시키는 능력으로 돌파할 수가 없었잖아?”
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뭐랄까, 일부러 허술하게 만든 거 같아.”
“애초에 누군가의 진입을 막으려는 문이 아니었단 말이야?”
강선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멍하니 문을 바라보던 작업반장은 정신을 차리고 근처 사람에게 지시를 내렸다.
“……기사단장님한테 전달해요. 황금문이 열렸다고.”
“네.”
말리나는 그런 강선후를 바라보면서 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누구예요?”
“네?”
말리나는 그제야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이게 아니지. 나는 선후가 인간인 줄 알았어요. 어…… 인간 아니었어요?”
“맞는데?”
말리나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닌데, 이런 능력이 있는 종족이 있단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아!”
말리나는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마법인가? 혹시 마법사?”
“녀석아, 인간이 어떻게 마법을 쓰냐!”
뒤에 서 있던 찬트라가 딸을 타박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이미 강선후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신령의 전승이 자꾸 눈앞에서 아른거렸기 때문이었다.
“저, 귀인. 제 딸 녀석의 무례를 용서…….”
“괜찮아요. 나 이거 안쪽에 들어가 봐도 되겠죠?”
강선후는 쓰잘데기 없는 대화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말을 끊고 주변을 슬쩍 돌아보았다. 문이 열렸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람들이 다시 자신에게 이목을 끌기 전에 도망치듯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쪽은 댐의 두깨만 한 크기의 복도처럼 되어 있었는데, 끝에 뭐가 있는지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리리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드문드문 이곳의 인간들이 그녀 자신에게 보내는 날카로운 시선은 일부러 외면했다.
강선후는 리리 자신과 영혼을 연결했다. 강선후는 그렇게 얻은 뱀파이어의 영혼을 이용해서 기생체의 피를 섭취했고, 금속을 부식시키는 능력을 얻었다.
인간족이 뱀파이어족과 영혼을 연결한 적이 역사 속에서 과연 있었을까?
없었을 거라 확신할 순 없으나, 리리는 없다고 단정지었다.
이 세상에서 인간과 뱀파이어는 원수 관계였으니 그랬다. 인간은 역사 속에서 뱀파이어에게 커다란 원한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리리 역시 인간을 피했다. 강선후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지배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바로 결단을 내리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여기에 있었다.
물론 영혼 연결이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소중한 기회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걸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강선후는 뱀파이어와의 영혼 연결에 대해서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로얄 블러드라는 사실까지 알았음에도 그랬다.
로얄 블러드는 대상의 피를 먹음으로써 그 영혼이 가지고 있는 힘을 일부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물론 리리의 아버지, 안드레이 신카는 십 년이 넘도록 늑대의 피만 먹고 나서야 그 후각과 용맹함을 가질 수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강선후는 아니었다. 아무리 기생체가 강대한 영혼을 가진 존재라곤 하더라도, 강선후는 단 한 번의 섭취로 기생체가 가진 능력을 발현하는 데에 성공했다. 리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 사실에 굉장히 놀랐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별로 하고 싶지가 않네.’
강선후는 그 뒤로 흡혈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없애 버렸다. 몇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도 마치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입 밖으로 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용을 만났을 때, 그리고 그 용이 부탁 하나를 들어 준다고 맹세했을 때, 리리는 그 피를 조금 달라고 부탁하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강선후는 그러지 않았다.
언젠가 그 이유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마 술김이었던 것 같았다.
‘왜 그러냐고?’
강선후은 그 질문을 듣고 아무런 고민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인간으로 남고 싶거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순혈주의적 사고방식을 강선후 역시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다른 인간들과는 사뭇 달랐다.
‘탐험은 내 힘으로 직접 이룰 때 의미가 남더라고.’
‘나는 단순히 관광하려고 돌아다니는 게 아니야.’
강선후는 거기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이런 가치관을 듣고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째서 더 편한 길을 제 손으로 포기하냐고 따질 수가 없었다.
강선후는 그런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흡수한 기생체의 힘을 이용해 문을 녹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알다시피, 이미 얻은 도구를 외면하지는 않았다. 원칙을 따지고는 했으나, 원칙에 매몰되어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일정한 기준도 없이 완전 제멋대로였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매번 하나부터 열까지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무거웠던 숙명은 희미해지고, 가벼운 마음이 주는 자유로움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숙명을 가벼이 여기는 건 두려웠으나 동시에 즐거웠다. 모순적이었지만 그랬다.
“안 와?”
“아, 갈게.”
리리는 정신을 차리고, 강선후를 따라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벽돌과 그곳에 그려져 있는 수많은 문양들.
“…….”
벽돌의 이음새 부분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와 따로 조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강선후는 그것들의 형태를 면밀히 관찰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거, 어디에서 많이 본 패턴들인데.”
“고대 유물은 대체로 다 이런 식 아니야?”
리리 역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강선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지금까지 유적들을 돌아다녀 보니까 이제 슬슬 알겠는데, 고대 유적은 용도에 따라서 조금씩 그 컨셉이 다르던데.”
“그럼, 여기 컨셉이 뭔지 알 거 같아?”
강선후는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구체적으로 뭘 거 같냐고 물어보려는 그때, 강선후의 대답 대신 눈앞에 익숙한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복도 끝에 있는 건, 하나의 작은 방이었다.
이들에게 너무 익숙한 방.
“이거, 무덤 도시로 향하는…….”
“승강기.”
방 가운데에 압력판이 있어 누르면 아래로 이동하는 일종의 승강기.
베이스캠프에서 봤던 바로 그 구조였다.
리리는 강선후가 당장 승강기를 타고 아래로 향할 줄 알았다. 그래서 리리가 먼저 발걸음을 옮길 정도였다.
하지만 강선후는 승강기를 빤히 바라보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돌아가자.”
“안 내려가?”
“밖에서 사람들이 그랬잖아. 여기는 매 기사단이 신의 강림에 필요한 것을 찾는 곳이라고.”
“그랬지.”
강선후는 뒤를 돌며 말했다.
“그럼 내가 괜히 먼저 들어갔다가 훼방 놓는 꼴이 될 수 있으니까. 이야기부터 해 보자고.”
리리는 그런 강선후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선후가 이미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음에도.
* * *
댐 바깥으로 나가는 길은 들어오는 길보다 길게 느껴졌다. 이유야 간단했는데, 저 밖으로 나갔을 때 사람들이 호들갑 떠는 게 벌써 눈에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리리는 그런 내 속마음을 눈치채고 웃음기 있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귀인처럼 말하는 화법, 지금이라도 교육해 줄까?”
“그런 교육도 받아?”
“귀족은 글공부랑 그걸 같이 시작해.”
“……난 그렇게 못 살아.”
그리고 우리 예상대로, 밖에 나가자 이전의 무질서함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모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사이에 이곳에 없던 사람의 얼굴마저 보였다.
키가 거의 2m는 되어 보이는, 인간족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그 남자는 두꺼운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대표로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그쪽이 이 문을 연 외부인이오?”
“네. 멋대로 문을 연 건 사과드릴게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오히려 감사를 표하겠소. 외부인이지만,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 어떻게, 안쪽에서 뭘 발견하진 않았소? 그건 솔직하게 듣고 싶소만.”
“아무것도 없었어요.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 말고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시오. 당신이 가 줬으면 싶은 곳이 있으니.”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는 왠지 내 뒤에서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을 참지는 못했는지 내게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내 표정이 어떤데?”
“뭔가, 조금 놀랄 거 같아.”
내가 맨 처음 놀란 건 그 덩치와 가죽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느껴지는 견고함, 이제 막 전쟁터라도 나갈 것 같은 중무장 때문이 아니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의 눈에서 보이는 특유의 공포, 그리고 그 공포를 이기기 위해 억지로 마음속에 붙잡아 놓은 다짐이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 * *
그는 자신이 매 기사단 소속 상급기사, 상기나 카르칼이라 소개했다. 이곳에서 카르칼이라는 명칭은 성이 아니라 일족을 상징한다지.
상기나는 산 능선 옆에 펼쳐져 있는 평야로 나를 안내했다. 그곳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내부로 진입하고 나서 이곳이 그냥 마을이 아니라, 거대한 신전에 딸린 부속 거주구역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은 몇 층이나 되는 거대한 석조 건물로 우리를 안내했다. 다른 건축물들은 전부 나무였는데, 이 건물만 전혀 다른 건축 기술이 접목되어 있었다는 걸 쉽게 깨달았다.
안쪽에는 기둥이 많았고, 창문은 없었다. 기둥마다 붙은 횃불은 창백한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횃불이 보라색이야.:
“……달바라기 꽃가루를 쓰면 이렇게 돼.”
리리와 내가 짧게 대화를 나누자, 속삭이는 수준이었는데도 내부에 온통 울려 퍼졌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듣고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곳의 끄트머리에는 계단 형태의 제단이 있었는데, 그 꼭대기에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모두 상기나와 마찬가지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르칼 일족은 주신교에 소속된 한 분파요. 우리는 아홉 주신 중 하나, 끝없는 어둠 저편의 매를 섬기지.”
“매 기사단이 하는 일은요?”
“매가 이 땅에 착지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악마는 매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고, 예언에 적혀 있소. 우리는 그 악마를 저지하고 매의 착지를 실현시키는 역할을 하는 일족이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표정을 읽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게 지금만큼 체감된 적이 없었는데, 여기 있는 모두의 얼굴이 굉장히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전투가 시작될 때, 악마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성역이오. 외부인은 앞으로 일주일간 이곳에서 있어 주셔야 하오.”
“……다들 뭐 하고 있어요?”
“며칠 뒤 일어날 전투를 준비하고 있소.”
“……아닌 거 같은데?”
나는 고개를 들어 상기나를 바라보았다.
“왜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어요? 당신들 죽으러 가는 거예요?”
내 시선에는 보였다.
이들이 쓰고 있는 건 유서였다.
“……기록된 역사 속에서, 우리 일족은 단 한 번도 신의 착지를 성공시킨 적이 없었소. 역사 속의 모든 수치는 우리의 치욕으로 남았지. 이번에야말로 성공시켜야 하오.”
“……아닌 거 같은데.”
내가 보기엔 아니었다. 나는 저런 눈을 하고 있는 사람을 정말로 많이 봤었다.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고 하는 거잖아요.”
“…….”
한동안 상기나는 말이 없었다. 나도 그가 생각을 정리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매가 등장하고, 악마가 매를 쫓아내는 건 이전까지 있었던 일이오. 그리고 우리가 신을 돕기 위해 악마에게 달려드는 건 숙명이지. 왜 하필 내 시대 때 이런 일이 일어났냐고 탓할 수는 없는 것 아니오? 이건 우리 일족의 숙명…….”
숙명, 숙명…….
이계 사람들은 이 단어를 참 좋아한단 말이지.
“숙명이요. 저도 꽤 멋있다고 생각해요. 이 세상 사람들이 그 단어에 목숨을 걸고 인생을 바치는 건 꽤 낭만적으로 보이고, 가끔 지켜보는 나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으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그런데, 뭘 위해서 죽는지도 모르면서 죽음을 강요하는 건 무책임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그 순간, 바깥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하늘 전체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 엎드려 있던 모든 사람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귀를 막았다. 이 건물 내부의 특이한 구조 때문에 그 소리는 공기를 찢어 버릴 듯 휘저었다.
리리와 나, 그리고 상기나는 당장 문으로 달려나갔다.
* * *
“……분명 아깐 낮이었는데.”
리리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 하늘은 낮과 밤의 풍경이 동시에 있었다. 투명 종이에 낮의 풍경과 밤의 풍경을 그리고, 그걸 겹쳐 놓으면 바로 저런 모습일까?
태양의 광채에 가려져 있었던 달이 희미하게 하늘 한 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별들이 간헐적으로 깜빡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졌다.
펄럭—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아주 거대한, 단 한 번의 날갯짓 소리가.
끝없는 어둠 저편에서 날아오는 매는 아직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멀리에서 날아오는 걸까?
그리고, 아직도 그렇게 멀리 있는데 왜 소리가 벌써 여기까지 닿는 걸까?
모두가 그런 의문을 품기도 전에, 카르칼 일족이 알고, 또 두려워하고 있었던 전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수지 속에서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검은색과 회색, 그리고 빛바랜 갈색으로 이루어진 그것은 무덤에서 일어나는 시체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저수지라는 거대한 무덤에서, 카르칼 일족이 두려워하는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허수아비였다.
넝마를 뒤집어쓰고 팔을 양쪽으로 펼치고 있는 허수아비가 저수지의 한편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새어 나오려다가 손바닥에 틀어막히는 소리가 들렸다.
상기나는 고개를 돌렸다. 공포가 다짐을 이겨 버린 탓이었다. 이들에게 평화는 길었고, 죽음에 대한 각오는 거기에 묻혀 버린 듯했다.
“고개 돌리지 마세요.”
리리는 그제야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강선후는 공포가 현신한 듯한 악마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두렵지 않은 걸까? 아니, 아니었다. 리리의 눈에는 강선후도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보였다.
“자신이 뭘 위해서 죽는지도 모른 채, 죽음을 각오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니까.”
상기나는 그 말에 자극받았는지, 억지로 고개를 치켜들며 외쳤다.
“들어가시오! 지금부터, 오늘부터 시작…….”
“아뇨.”
강선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리는 순간 그에게 미쳤냐고 욕설을 퍼붓고 싶은 욕구가 올라왔다.
그만큼, 저 악마가 주는 본질적인 두려움이 심했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깨달았다. 강선후의 얼굴에 미소가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나도 그 날아오고 있다는 양반한테 볼일이 있거든.”
“……뭐라고?”
“저 허수아비가 신을 막는 놈이라면, 나도 유감이 있어서.”
“……당신 미쳤소?”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상기나는 외부인의 예측하지 못한 행동에 당황하고 있었다.
“믿는 구석이라도 있소? 당신도 우리랑 같은 인간이잖아! 성좌도, 불멸자도, 도와주는 신도 없잖소!”
“그럼 왜 매를 도우려고 하는 거예요?”
“신이 다시 우리를 봐주길 원하니까!”
강선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은 듣기 좋았어요.”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