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37
137화
ep42. 악마에게 죽어야만 하는 사람들 (2)
엘 로크라 벨라가 온 세상에 울린 그 날, 세계의 모든 존재는 각자의 감정을 눈에 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새 시대가 시작됨을 알리는 세계의 종.
황금 시대의 재림이 선언된다는 전설 속의 종소리가 울렸기에, 많은 사람은 거기에 환호했다.
하지만 카르칼 일족 중 전설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럴 수 없었다.
끝없는 어둠 저편의 매는 세계의 종소리를 듣고 날갯짓을 시작하며, 그 신성한 존재가 이 땅에 도착하는 날이 카르칼 일족 절멸의 날이었으니.
“끝없는 어둠 저편의 매께서 땅에 도달하려 할 때, 땅에서는 악마가 일어나 하늘을 봉쇄한다.”
카르칼 일족은 그 악마를 제재하여 신의 강림을 실현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는 카르칼이라는 이름에 얹힌 숙명이었다. 아홉 신 모두에게 외면받은 종족인 인간으로 태어나, 하나의 신이라도 우리를 다시 봐 주길 원했기에.
하지만 신성에 대적할 정도로 강대한 존재들인 악마를, 필멸자 중에서도 타고난 게 없는 인간이 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이는 그저 카르칼의 참사를 의미할 뿐이었다.
셀 수도 없는 오랜 시간이 지나 최초의 카르칼이 품었던 강한 의지는 사라졌으나, 유명무실한 명분만은 오래 남아 습관이 되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전쟁에 참여했던 젊은이들이 그랬듯, 이제는 사지로 뛰어들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오랜 전통이었고 해야 했기에 했다.
하나의 천 년기가 끝날 때마다 카르칼 일족을 덮치는 비극의 굴레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말리나 카르칼은 저수지 근처 고원에서 고개를 든 검회색의 허수아비를 보고는 사색이 되어 신전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뭐야…… 대체 뭐야 저게?”
그녀 역시 일족의 숙명에 대해서 배웠지만, 이제까지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건 그저 전설이었고, 언제 찾아올지, 찾아오기나 하는 미래인지 체감도 되지 않았기에 그랬다.
그런 무심함 때문에 결국 찾아온 공포의 실체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넝마를 두른 허수아비가 안개 속에 있었다. 저 존재가 안개를 부르고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까마귀가 허수아비 근처를 날아다녔으며, 시체 썩은 내가 청정한 고산의 공기를 더럽히기 시작했다.
허수아비의 몸집은 산봉우리보다 높아 보였다. 계곡을 흐르는 빠른 바람이 넝마 깃을 흉흉하게 흔들었다. 말리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아버지와 함께 마을까지 멈추지 않고 달렸다.
저게 우리 일족이 상대해야 한다는 악마인가?
저런 악마를 상대로 우리가 어떻게 이겨?
저 악마를 상대로 창검이나 내밀면서 뛰어든다고?
이건 그냥 집단 자살이나 마찬가지잖아!
말리나는 신전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매 기사단의 단원들이 있었다. 드넓은 신전 내부를 가득 채운 그들의 표정에서 더 이상 평소와 같은 무심함과 지루함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전쟁터에 나가 반드시 죽어야 하는 병사들의 표정이었다.
한쪽에서는 기사단의 시종들이 말린 약초를 준비하고 있었다. 의식을 희미하게 만드는 약초였는데, 제사 때마다 주술사들이 쓰는 그것이었다.
저게 지금 왜 필요한 걸까? 왜 저토록이나 많이 필요한 걸까? 누구에게 쓰려고 하는 거야? 말리나의 마음을 갉아 대는 불안감은 벌레처럼 증식하고 있었다.
“비제이! 비제이!”
자신과 함께 자라왔던 친구, 나이가 찬 뒤 기사단에 들어가게 된 친구를 찾아갔다. 한쪽에서 단원들과 모여 있었던 비제이는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말리나, 빨리 안쪽으로 들어가.”
말리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비제이를 올려다보았다.
“진짜, 진짜 악마가 일어났어. 그건 전설 아니었어? 아니, 최소한 우리 세대 때는 아무 일 없는 거 아니었어?”
비제이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지를 표현하고 싶었으나, 눈동자 뒤편에서 자라나는 비대한 공포를 숨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말리나는 지금 비제이가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느꼈다. 대체 자신이 뭐랑 싸우려고 하는지 알기나 하는 건가?
“그 악마, 보긴 한 거야?”
“아직. 나는 계속 여기에 있었어. 곧 전투 전 의식을 치르기로 했으니까.”
“난 봤어.”
말리나는 비제이의 눈빛이 다시 한번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야. 우리한테 그 악마를 이기라고 하는 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말리나. 안쪽으로 들어가. 대피소 문 열렸어.”
“단장님한테 말해 봐. 왜 우리가 싸워야 해? 저 악마가 세상을 부수는 것도 아니라며! 그냥 잠깐 도망쳐 있으면 되잖아! 그깟, 그깟 신의 강림이 뭐라고 우리가……!”
그때 매 기사단의 상급 기사, 상기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리나와 비제이 모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악마를 죽일 방법을 찾아보겠다니, 당신 제정신이오?”
말리나는 저 말을 누구에게 하고 있는지 바로 눈치챘다.
바로 오늘 부동의 노인 꼭대기에서 내려온 그 외부인이었다.
“그쪽이 카르칼 일족이라도 되오? 주제넘은 짓 하지…….”
“됐다.”
가만히 듣고 있었던 기사단장, 파샹이 말했다.
“외부인이 관여해선 안 된다는 교리는 없었다. 우리는 이자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권리가 없어.”
“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외부인이 괜히 목숨만 버리는 짓입니다.”
“이자가 황금 댐의 문을 열었다지?”
상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도움을 받은 셈이니, 이자의 선택 한 번은 존중할 수 있지 않겠느냐?”
상기나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외부인과 그 동료 뱀파이어는 단장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신전의 중앙을 가로질러 정문까지 향했다. 말리나는 그런 외부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외부인은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처럼 생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황금빛 광채가 시선을 끌었다. 귀족 출신인가? 최소한 뱀파이어는 그렇게 보였는데, 저 인간은 그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발을 멈추고 잠시 말리나를 바라보았다.
“……산맥 건너편에 대해서 궁금해했지?”
말리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 끝나고 천천히 알려 줄게. 재밌는 이야기일 거야.”
외부인은 그런 말을 남기고 문밖으로 나갔다. 성역에서 벗어나 악마의 영역에 발을 들임을 의미하는데도 발걸음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익숙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회중시계 뒤편에서 보석을 하나 빼고, 손에 쥐었다.
“렐릭시나!”
어딘가에서 푸르게 불타는 갈기의 흑마가 달려와 그의 앞에서 몸을 낮췄으며, 보석을 쥔 손에서 섬광이 발하더니 남색의 수정구가 달린 지팡이가 발현했다.
“리리, 이번에는 여기에 있어. 금방 다녀올 테니까.”
외부인은 그렇게 말했고, 뱀파이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뱀파이어의 동공이 희미한 적색으로 발광했으며,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 * *
리리는 허수아비를 향해 달려가는 강선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겠으나, 이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강선후는 이번 일이 정말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강선후가 떠나기 전, 리리는 그를 잠시 붙잡고 물었다. 키호테의 진명을 사용하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냐고. 이때까지만 해도 리리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위대한 용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두 눈으로 목격하고 피부로 느꼈으니까.
하지만 강선후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키호테는 동족을 위해서 온 힘을 다하고 있어. 영감님을 방해해서는 안 되겠지?”
“…….”
“내 숙명이 중요하다면 그만큼 남의 숙명을 존중해야지. 이기적으로 달성한 목표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하지만, 군주님의 힘이 없이 어떻게 저 악마를…….”
“리리.”
리리는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낮은 목소리에 살짝 긴장했으나, 정작 그는 웃고 있었다.
“너는 내가 왕좌로 향하길 바라는 거지?”
“……응.”
강요할 생각은 없었지만, 부디 이 남자가 왕좌에 대한 욕심을 가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거기까지 가는 길에 골칫거리는 앞으로도 많을 거야. 그런데, 이럴 때마다 언제까지 영감님 이름만 부를 수는 없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악마는 현실이었다. 단순히 아집을 부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방법은 찾으면 나와. 죽으라는 법은 없거든.”
“…….”
‘굳이 죽을 생각을 할 필요는 없잖아.’
리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애초에 강선후는 이 싸움에 뛰어들 필요 자체가 없었다. 이 일은 카르칼 일족의 일일 뿐, 강선후는 그저 방문객일 뿐이기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음 황금의 유물을 매가 가지고 있었다.
이제까지 황금의 유물을 기념품 취급했던 강선후는, 지금 그것을 위해 기꺼이 위험에 뛰어들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뭐 때문에?
강선후는 그 뒤로 별말이 없었지만, 리리는 그 영혼에서 느꼈다. 강선후가 카르칼 일족의 자포자기한 모습에 조금은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더 나아가, 인도자의 상을 지닌 그녀 자신의 숙명을 존중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리리는 기꺼이 강선후를 보내 줬다. 그는 곧장 댐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렐릭시나의 속도라면 문제가 생기 전에 도착하겠지. 저기가 아무리 악마의 기운이 감돌더라도 말이다.
리리는 뒤를 돌았다. 신전을 가득 채운 인간들이 눈에 들어왔다.
뱀파이어의 귀족을 힐끗 바라보는 그 시선이 절대로 곱진 않았다. 강선후에게는 계속 숨겼던 사실이지만, 인간과 뱀파이어는 앙숙 관계에 가까웠다. 상황이 이러니 그녀에게 해코지하진 않겠지만, 경멸 정도는 견뎌야 하리라. 리리는 그렇게 다짐했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신전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조금씩 자신에게 몰리는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리리는 매 기사단장, 파샹의 앞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큰 덩치였지만 기세에서 밀리지 않으려 눈가에 힘을 주었다.
“……흡혈귀가 인간에게 볼일이 있나?”
“당신들은 인간입니다. 룬을 하지는 못하겠지요.”
파샹은 그저 리리를 내려다보았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기사단원 중 호기가 센 일부는 리리를 바라보는 눈빛을 대놓고 찡그리기까지 했다.
“나는 로얄 블러드입니다.”
“그래서? 달의 선택을 받은 종족이라고 자랑이라도 할 셈…….”
기사단장을 앞으로 나서는 단원 하나를 손으로 막았다. 리리는 그 행동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신에 관련된 문헌 중, 룬으로 적힌 것들이 있을 겁니다.”
“…….”
“내가 그걸 조금은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신화에 대한 지식도 가지고 있으니, 제가 아는 것은 그대들의 도움이 됩니다.”
기사단장 파샹은 리리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수염에 파묻혀 있는 입술이 끝내 움직였다.
“상기나.”
“예, 단장님.”
“문헌실을 개방해.”
상기나는 고개를 숙인 후, 빠르게 안쪽 계단으로 달려나갔다. 파샹은 그 뒤로도 잠시 리리를 바라보았다.
“따라오시오.”
* * *
강선후는 댐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산과 계곡, 그리고 능선을 따라 펼쳐져 있는 초원. 드문드문 보이는 숲지기의 집과 농사꾼의 쉼터.
네 개의 봉우리의 꼭대기를 깎아 만들어진 거대한 사원들과 황금의 댐, 그리고 거인과 악마의 석상.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강선후는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다는 데에 감사했다. 심지어 댐 저편으로 보이는 거대하고 흉흉한 허수아비마저 그의 눈에는 나름의 멋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기운은 진실한 악이었다. 댐에서 마을로 출발했을 때와 지금은 완전히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바람에 실려 있는 희미하지만 고약한 냄새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강선후는 렐릭시나에게 자신이 견딜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리라고 명령했다. 범의 영혼을 가진 명계의 사냥마는 불이 붙을 듯한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달리고, 또 달렸다.
댐에 도착했다. 위아래로 긴 황동색 철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강선후는 렐릭시나의 등에서 내린 뒤, 쓰다듬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푸릉—.”
“금방 올게.”
그 뒤, 바로 고개를 돌려 안쪽으로 향했다. 중간쯤 도착했을 때 잠시 몸을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저 거대한 황동 문은 밖에서 볼 때와 안에서 볼 때의 구조가 달랐다. 고대의 기술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었으나, 지금 안쪽에서 보이는 문의 구조가 뭘 뜻하는지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강선후는 고개를 돌려 다시 안쪽으로 걸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기억해 내려 애썼다.
아주 오래전, 자신을 거둬줬던 연금술사가 해 줬던 이야기를.
「거인들은—.」
연금술사는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그게 황금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지식이었던 걸까?
아니, 연금술사가 황금 시대의 사람이 맞긴 한가? 강선후는 확신할 수 없었다. 조난 생활을 하던 시절이 그때일 거라는 확신을 가지기에는 아직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으니까.
강선후는 승강기에 들어가 압력판을 발끝으로 지그시 눌렀다. 승강기는 익숙한 소리를 내며, 그리고 먼지를 토해 내며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내려갔다.
그곳에 있던 건.
“무덤 도시…….”
이전에도 봤던 무덤 도시의 풍경 그대로였다. 베이스캠프에 있던 것과 완전히 같은 풍경.
무덤 도시는 이 세계 여기저기에 퍼져 있는 걸까?
아니었다.
강선후는 깨달았다. 이곳 역시 이전에 본 무덤 도시와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무덤 도시는 지하 세계에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감이 오지 않을 정도로.
왜 이런 곳을 만든 걸까? 대체 어떻게 만든 걸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여유는 잠시 접어 두었다. 지금은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았으니까.
저 멀리에서 강선후를 인지한 묘지기가 다가왔다.
묘지기는 강선후를 내려다보았다. 강선후도 묘지기를 올려다보았다.
묘지기는 강선후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영혼들을 괴롭히며 횡포를 부리고 있었음에도, 강선후 앞에서는 그 호전성을 잃었다.
강선후는 넝마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묘지기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야?”
묘지기는 말했다.
「나는, 죄인. 거인왕의 눈으로 보더라도, 황금의 눈으로 보더라도…….」
무엇이 이 묘지기를 미치게 만든 걸까?
강선후는 연금술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거인들은 제 아비를 사랑했다네.
—그렇기에 아비를 잃은 거인들은 영원한 슬픔에 빠진 거야. 아마,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걸 떨치지 못하겠지.
“……아틀라스.”
거인은 강선후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고 흠칫 놀랐다.
모든 거인의 왕. 모든 거인의 양아버지, 아틀라스.
자신의 핏줄이 아니어도, 모든 거인을 자식으로 인정해 준 거인들의 아버지.
—유일하게 사랑하는 이를 잃고서 거인은 무언가를 사랑하는 법을 잊었어. 그들이 만물을 증오하는 이유라네.
거인들은 여전히 아버지를 사랑했다. 아버지의 핏줄이 내린 명령만으로 이 인간을 건들지 못할 정도로.
강선후는 묘지기에게 말했다.
“저 위에 사람들한테 좀 문제가 생겼어. 불멸자 하나가 손을 빌려주면 큰 도움이 될 거야.”
「내, 내 일이 아닌 것.」
“저 위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황금의 시대가 못 올 수도 있을걸?”
「우리는, 우리는 황금의 일원이 될 수 없어. 왕은 거인을 인정하지 않았고, 나는 그저 그들의 노예로서 영원히 고통받을 운명…….」
“황금왕이 널 죽이고자 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왜 굳이 이 묘를 지키라고 했을까? 너한테 뭘 알려 주고 싶어 했을까??”
황금의 왕이 거인에게 맡긴 건 창검이 아니라 삽이었다.
부수고, 죽이기 위한 물건이 아니라 관리하고 보살피기 위한 물건이었다.
묘지기가 소리를 꽥 질렀다.
「알지만, 우리는 안 돼! 안 된다고! 우리가 무언가를 지킨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것! 나 역시 인내하지 못하고 묘지를 엉망으로 망치고 왕을 배신!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 건 운명이나…….」
“아니야.”
분명, 연금술사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강선후는 저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 유일하게 사랑하는 이를 잃고 난 뒤, 거인은 그 무엇도 사랑하지 못하는 운명에 갇혔다네. 그들이 만물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이지.
강선후는 생각했다.
증오할 수밖에 없는 이유 같은 게 어디 있어?
그는 품속에서 붉게 빛나는 거인의 심장 조각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묘지기에게 내밀었다.
심장 조각은 희미한 빛을 발하며 박동하고 있었다. 묘지기는 이게 뭔지 잘 알고 있었다.
이 인간을 해하지 못하는 이유.
거인왕의 딸, 디오네의 심장.
묘지기는 강선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
「…….」
디오네는 자신의 심장을 지닌 인간을 건드리지 말라 명했다.
이 조각이 묘지기의 손에 들어오는 순간, 묘지기는 그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더 이 인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빨리 가져가서 손에 쥐어. 시간 없으니까.”
「대체 무슨 의도…….」
강선후는 운명 따위를 믿지 않았다.
지금도 당장, 그걸 깨부순 이의 심장이 내 손 위에서 세차게 뛰고 있잖아.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거인의 심장이야.”
묘지기는 몸을 낮추고, 거인의 심장을 손가락으로 조심히 받아 들었다.
강선후는 그런 묘지기를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 승강기 쪽으로 향했다. 묘지기는 강선후에게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들지 못했다.
“하나 더 해 줄 말이 있는데.”
묘지기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거인왕의 심장을 내려다보았다. 인간의 손에 쥐어질 정도로 작았지만, 그 따뜻한 고동만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인간은 오르기 시작한 승강기 안에서 말을 맺었다.
“여기에서 밖으로 연결된 문은 손잡이가 안에 달려 있었어. 밖에서 들어오는 문이 아니라, 안에서 나가는 문이었던 거야.”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