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38
138화
ep42. 악마에게 죽어야만 하는 사람들 (3)
“댐에 갔다 오거라.”
기사단장 파샹은 발이 빠른 견습 기사 비제이에게 정찰 임무를 내렸다. 그토록이나 간절히 원했던 고대 댐의 문이 비로소 열렸지만, 하필 그때 약속이라도 한 듯 악마가 저수지 너머 고원에서 고개를 드는 바람에 미처 확인할 수 없었다.
악마가 현신한 지금은 단체로 움직였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목적이 명확해지기 전까지는 이 신전에서 벗어나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렇기에 파샹은 비제이 한 명만 정찰 목적으로 보냈다.
비제이는 자신도 따라가겠다는 둥 막무가내인 말리나를 진정시킨 뒤, 바로 댐으로 출발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황동문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갈기가 불타는 흑마가 있었다. 비제이가 이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 그는 처음에 이곳에 등장한 마수라고 생각하며 검을 뽑아 들기까지 했다. 흑마는 비제이의 그런 모습을 보고 물어뜯을 듯 이를 드러내며, 말이 낸다고 상상하기 힘든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때 마침 댐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비제이는 순간 공포까지 느꼈으나, 익숙한 얼굴임을 알고 나서는 안도했다.
외부인은 생각에 잠긴 듯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뒤늦게 비제이를 발견하고는 빤히 바라보더니, 흑마에게 다가가 갈기를 조금 쓰다듬었다. 그 몇 번의 손짓에 흥분을 가라앉히는 흑마의 모습을, 비제이는 잠시 바라보았다.
“기사단 분이신가?”
“아, 네. 매 기사단 견습 기사, 비제이 카르칼입니다.”
“위험하게 왜 여기까지 왔어요? 게다가 혼자서…… 내가 여기로 올 줄은 어떻게 알고?”
“저는 따로 정찰 임무 때문에 왔을 뿐이라, 귀인이 여기 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댐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오신 겁니까?”
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바라보는 비제이의 표정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건 기대감이었다. 조금은 집착적이라고도 느껴지는 기대감.
저 안에 악마를 처단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기를 바라는 기대감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외부인의 표정에서 조금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다. 저 안에 있는 게 뭔지 알아낸 걸까? 그러고 보니 빈손으로 나오는 거 같은데, 외부인은 대체 뭘 보고 나온 걸까?
외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비제이를 똑바로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
“안쪽에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세요. 이해 안 되는 일이라는 건 이해하지만, 그래야 합니다.”
“네? 저 안에는 기사단에게 꼭 필요한 무언가가…….”
“이 문, 누가 열었는지에 대해 들었어요?”
“……귀인께서 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이 부분에 대해선 날 믿어 주세요.”
단호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비제이 입장에서도 앞뒤 설명 없이 믿어 달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따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비제이 앞에서 외부인이 말을 이었다.
“악마를 극복하고 싶은 거죠?”
“……그렇습니다.”
“그럼 이 댐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악마를 바라보세요.”
비제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드높은 댐에 가려져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 악마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것만으로 순간적으로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외부인은 그런 비제이의 감정 변화를 모두 꿰뚫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말에 올라탔다.
“악마는 고개를 들고 나서도 한동안은 활동을 하지 않아요. 저 녀석들은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거든.”
“……네?”
“그리고, 혹시 당신네들 마수랑은 싸워 본 적 있어요?”
“잠시만, 마수 말입니까?”
“네. 시간 낭비하면 안 되니까 빨리.”
비제이는 조금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통 대부분 기생체였습니다만.”
“그럼 충분하겠네. 보통 마수라고 불리는 것들은 악마가 발현하면 악마를 지키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움직여요.”
“잠깐, 악마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다 아십니까?”
“만난 적이 있으니까. 두 번 정도.”
“……네?”
“아무튼, 이 부분들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강선후는 말머리를 돌리며, 그리고 떠나가며 말했다.
“뭘 위해서 죽는지도 모르면서 죽으려고 하지 마세요.”
“…….”
비제이는 그게 무슨 뜻인지에 대해 묻고 싶었다. 따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금 비제이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는 허전함의 답이 되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강선후는 이미 떠나간 상황이었다. 그는 댐 위로 올라가는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비제이가 정신을 차렸을 땐, 그건 이미 위를 향하는 중이었다.
“아, 그리고…… 리리한테 전해 줄래요?”
비제이는 마지막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좋은 걸 구경할 테니까, 늦지 말고 오라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 * *
상기나 카르칼은 기사단장 파샹과 리리를 신전 내 문헌실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리리는 룬 혹은 고대 문자로 적혀 있는 것들을 골라 넘겨 읽기 시작했다.
파샹은 그 모습을 조금 뒤에서 팔짱 끼고 바라보았다. 저 냉정한 사람은 그저 이 뱀파이어가 귀중한 기사단 내 문헌을 훔치지 않을까 지켜볼 심산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상기나는 뱀파이어의 모습을 보면서 내심 놀랐다.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보통 사람이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과하게 빨랐기 때문이었다.
저건 그림책이 아니었다. 심지어, 보통 사람이라면 이해하기도 해석하기도 힘든 룬 언어로 이루어진 책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파샹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다 이해하고 넘기는 것이오?”
의외로, 뱀파이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룬을 다 아는 건 아닙니다. 온전히 해석하려면 시간이 걸려요. 하지만 지금은 우리에게 여유가 없고, 필요한 부분을 빠르게 찾아내야 할 뿐입니다.”
상기나는 알고 있었다. 뱀파이어가 겸손과는 거리가 먼 종족이라는 사실을.
자기를 과시하길 좋아하진 않았으나, 그들의 자부심은 간혹 인간이 보기에는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라는 것도.
그렇기에 저 말이 거짓일 리 없었다. 뱀파이어가, 심지어 그 종족의 귀족이 스스로를 낮추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 말과는 다르게 리리가 책을 읽는 속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빨라지기만 했다.
“이건, 기사단의 역사.”
“지금은 필요 없는 책이겠군.”
“아니오. 그대들의 역사 속에 답이 있을 수도 있으니.”
리리의 손이 빨라진 이유는 룬을 읽어 내는 능력이 좋은 탓이 아니었다. 강선후를 따라다니면서 룬 해석력이 증가한 건 사실이었으나, 그저 어린아이의 옹알이 수준이었다. 리리는 고대 언어와 룬 언어가 뒤섞여 있는 책을 해석하려 애쓰며, 필요한 내용을 찾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던 순간, 리리의 손이 멈췄다.
리리는 룬이 아닌 언어로 적혀 있는 책에서 익숙한 한 구절을 보았다.
“……알겠어.”
“뭘 알겠다는 말이오?”
“이 악마의 특성이요. 이 악마는 공포를 다룹니다. 미지의 공포. 안개 속에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실루엣을 발견했을 때의 공포.”
“공포를 이용해서 공격한다는 말이오?”
“맞아요.”
“……그걸 우리가 이길 수 있소?”
리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저 악마가 활동을 시작하면, 그 기운에 노출된 순간 미쳐 버릴 겁니다. 악마가 뿜어내는 공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가니까요.”
“…….”
두 명의 기사는 말을 잃었다. 자신들이 상대해야 하는 실체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으니까. 만약에 이 흡혈귀의 말이 맞다면, 저 악마에게 돌격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정말로 자살 행위였다.
“……방법은?”
상기나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리리 역시 대답할 수 없었다.
몰라서가 아니었다. 악마가 공포를 이용한다는 걸 아는 순간, 하나의 방법이 떠올랐으니까.
그 방법을, 이 인간들이 받아들일까?
그 순간.
쿠우웅—
밖에서 거대한 진동음이 들렸다. 리리는 이 소리가 뭘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전에 가롯을 상대했을 때, 가롯이 검은 연기를 하늘로 뿜기 바로 전 이런 소리가 났었다.
고민할 시간도,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리리는 허리춤에서 헌팅 나이프를 뽑았다. 최대한 이들을 위협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움직였으나, 상기나는 종족의 숙적이나 다름없는 뱀파이어의 움직임보다 더 빨리 검을 뽑았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흡혈귀.”
“……당신들이 우리 종족을 싫어한다는 걸 잘 알아요. 그리고, 그 적대감이 합당하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
“나는 뱀파이어입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달, 운데라의 가호를 받은 종족. 그리고 운데라는 필멸자를 지키는 신입니다.”
촤아악—
상기나는 자신의 검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흡혈귀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리리의 손목에서 피가 세차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는 그 새하얀 얼굴에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나, 그녀가 극심한 통증을 인내하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뱀파이어의 피는 운데라께서 내려 주신 보호의 가호를 품고 있습니다.”
“…….”
“…….”
상기나도, 파샹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이들은 뱀파이어를 혐오했기에, 그만큼 뱀파이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행동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알고 있었다.
끝내 입을 연 건 파샹이었다. 그 변화 없는 수염투성이의 얼굴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쪽은 로얄 블러드라고 했지. 맞나.”
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흡혈귀의 귀족들은 자해하는 걸 목숨을 잃는 것보다 수치스러운 행동이라 생각한다고 알고 있는데.”
“수치 이상의 규율입니다. 절대로…… 어기면 안 되는.”
“……그런데, 왜.”
리리는 강선후가 떠나기 전에 해 줬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내 숙명이 중요하다면 그만큼 남의 숙명을 존중해야지. 이기적으로 달성한 목표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리리는 눈을 감고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의 숙명을 존중하기 위해서.”
그러고는 피가 뿜어져 나오는 손을 들어 올렸다.
“부디, 내 피를 받아들여 주세요.”
상기나는 파샹을 바라보았다. 리리를 바라보던 무미건조하던 파샹의 눈빛에는 어떠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건, 명예로운 자에 대한 인정이었다.
파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땅에 고여 있는, 혹은 아직 떨어지는 중인 피들이 일시에 증발하여 핏빛의 증기가 되어 리리의 주변을 감싸 돌기 시작했다.
* * *
“후우…… 냄새 진짜 고약하네.”
나는 댐 위에 올라가서 사전 준비를 끝내 뒀다. 악마가 게으름을 부리는 성격이라는 게 참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고개를 들어 악마 쪽을 바라보았다.
이 거대한 저수지의 건너편, 저 악마는 고원으로 보이는 곳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능선 때문에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 저쪽에는 작지 않은 평탄한 지대가 있을 게 분명했다.
“……이길 수 있으려나?”
조금 생각을 정리하자, 부정적인 가능성이 마음속을 비집고 파고들었다. 그래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생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좋은 것만 생각하자.
이제 남은 건 돌아가서 리리와 합류하는 일이었다. 그 뒤로 뭘 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되리라 믿었다.
그렇게 댐 외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을 채우는 까마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가 많아졌다. 저거 다 마수들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
불안한 냄새가 풍겨 왔다. 아니, 여기는 애초에 악마때문에 고약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사이에 스며들어 오는 이 냄새는 내 신경을 곤두서게 하기에 충분했다.
비릿하면서 달콤한 피 냄새.
나는 그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렐릭시나도 이 냄새를 느꼈는지 이를 드러냈다.
그 방향에서 내가 볼 수 있었던 건, 내가 출발했던 거대한 석조 사원이었는데.
그 사원은 붉은 안개 같은 기운으로 감싸져 있었다.
“…….”
이상한 현상이었으나, 왠지 마음이 불안하지 않았다.
리리가 무언가를 했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끔은 이런 직감이 맞을 때가 있는 법이다.
“……렐릭시나. 가자.”
“크릉—!”
렐릭시나는 산 능선을 타고 댐 아래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고, 그 순간.
쿠우우웅…….
뒤에서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천둥과도 같은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푹 숙이고 있는 허수아비의 얼굴 부분에서 검은 연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봤었던 칠흑같이 검은 연기였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