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40
140화
ep42. 악마에게 죽어야만 하는 사람들 (5)
물은 생명을 상징한다. 영혼을 가진 모든 이들은 물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또, 세계에 가득 찬 정기는 물이 많은 곳에 고이며, 또 강의 흐름에 따라 흐르는 성질이 있었다. 그래서 생명은 항상 물에서 빗어지는 법이었다.
신의 자손들은 고대에서부터 경험적으로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생명을 섬기는 이들은 물을 신성시하고 때로는 숭배했다. 특히 산간 지방에서 사는 엘프들이 그랬다.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시절, 신의 자손들은 물의 정령과 생명의 정령을 구분해서 생각했다. 정령에 대한 이해가 가장 높은 엘프들이 그러했으니, 다른 종족들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연구가 지속되며 사람들은 알았다.
물의 정령이란 그저 생명의 정령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물에 묶어 뒀을 뿐이라는 걸.
그래서 여전히 고귀한 생명을 품고 있는 존재라는 걸.
댐 위로 솟아오른 투명한 거체는 온전하게 물로 이루어진 용오름의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저수지에 살았던 거대한 뱀처럼 꿈틀거리며 허수아비에게 쇄도했다.
악마란 죽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존재였기에 생명을 가득 머금은 물은 그 자체로 치명적인 맹독이었다. 소용돌이친 물은 그대로 저수지부터 시작되어 산 뒤쪽에 반쯤 가려져 있는 고원으로 사라졌다.
매 기사단장 파샹을 비롯한 카르칼 일족은 그 모든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맨 처음 입을 연 건 기사단장 파샹이었다.
“상기나.”
“네, 단장님.”
“최초의 전쟁터에 사는 모든 카르칼 일족에게 성전의 시작을 알려라.”
상기나는 파샹의 눈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그 표정. 눈동자 뒤에는 수많은 회의와 고뇌가 엿보였다. 그리고 지금, 파샹은 그 고뇌의 결론에 도달했다.
상기나는 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도열해 있었던 매 기사단,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든 카르칼 일족은 하늘로 팔을 뻗었다.
말리나와 비제이도 서로를 바라보더니, 동시에 하늘로 천천히 팔을 뻗었다.
그리고.
삐이이익—
카르칼 일족들과 영혼이 이어져 있는 존재들이 하나둘, 종국에는 빼곡히 그 팔에 앉았다.
일족과 영혼으로 이어져 있는 친구, 검은날개매들이었다.
사람들은 일족들에게 전달할 말을 매에게 속삭였다.
우리가 움직일 때가 왔다고. 두려워하지 말고 일어나 숙명이 주는 명예를 음미하라고.
매들은 일시에 날아올라 하늘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전령이 되어 영원한 전쟁터 각지에서 공포에 떨고 있을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 * *
왼쪽 손등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눈을 돌려 직시하지 않아도 보일 정도로, 송곳니 문신은 밝은 주홍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는 지금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그만큼 강대한 존재이며,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즉각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더라고. 강이랑 연결되지도 않은 댐에 이렇게 많은 물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애초에, 이곳은 악마를 상대하기 위한 거대한 요새이자 준비되어 있는 전쟁터였다. 저수지는 그저 거대한 정령의 침실일 뿐이었다.
고대의 누군가 역시 카르칼 일족처럼 신의 강림을 염원하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리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공기 중에 흩뿌려진 미세한 물방울들이 피부와 옷을 적셨다. 작디작은 그 방울 하나하나마저 정기를 담고 있었다. 시체 썩는 듯한 냄새는 어느새 사라지고, 물안개에서는 달콤한 정기의 향기가 풍겨졌다.
허수아비가 뿜던 검은 연기는 화산 분출물이 연상될 정도로 무겁고 찐득했다. 하지만, 물보라는 아무런 저항감 없이 그것을 밀어붙여, 허수아비 바로 앞까지 닿았다.
악마는 처음으로 고개를 살짝 들었다.
넝마로 된 그 피부에 뚫려 있는 두 개의 눈구멍. 그리고 여기저기가 끊긴 실로 엮여 있는 입 구멍.
그 틈새 사이로 보이는 건 검은색뿐. 나도, 리리도 알았다. 그 구멍 너머는 명계를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그 광경에서 느껴지는 공포는 생리적이었다. 이제는 꽤 초연해진 나도 입술을 꾹 다물어야 했으며, 리리가 헛바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앙—!
악마는 단순히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악마 지천까지 다가간 정령은 폭발하듯 흩어졌다.
후드드득—
소나기가 폭포처럼 쏟아졌지만, 무지개는 뜨지 않았다. 태양이 떠 있어야 마땅한 시간이었지만 까만 하늘에 있는 건 두 개의 달과 별뿐이었다. 그마저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전등처럼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물론 정령은 이 정도 충격으로 죽거나 하지 않았다.
지금 쏟아지고 있는 빗방울 하나하나는 여전히 정령의 일부였다. 그것들은 이 고원에 쏟아져 내리며 땅을 정화했고, 그것만으로 내가 악마에게 접근할 수 있는 앞길이 뚫렸다.
키이이익—!
악마의 강림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그 주변으로 몰려드는 습성이 있는 마수들은 정령의 기운에 몸서리치며 땅을 기거나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쳤다.
그 순간이었다.
“삐이이이익——.”
길고 청량한 새의 울음소리.
“삐이익—.”
“삐이이익—.”
용맹함이 느껴지는 그 맹조의 소리가 연달아서 이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그곳을 가득 채우는 한 무리의 매들.
매들은 고원을 가로지르며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리리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검은날개매.”
“아는 새야?”
“산악 지역에 간혹 보이는 맹조야.”
“원래 저렇게 무리 지어 움직여?”
내 질문에 리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매는 외로운 맹수야. 한자리에 모이는 법이 없어.”
“……매 기사단이 뭔가를 한 모양이네.”
구체적인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었다. 지금 중요한 사실은 이거 하나뿐이었으니까.
“매 기사단이 움직이기로 결정했어.”
그렇게 말하며 렐릭시나의 고삐를 꽉 부여잡았다. 내 의도를 깨달은 리리가 내 허리를 꽉 부여잡는 게 느껴졌다.
“무서우면 어디 안전한 데에 먼저 내려줄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계획이나 말해 봐.”
리리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악기가 마음에 들었다.
“지난번에 가롯이 남기고 간 심장 기억하지?”
“성녀님한테 준 그거 말하는 거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허수아비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며 말을 이었다.
“악마도 다른 불멸자들하고 비슷한 약점을 가지고 있어.”
“심장 말하는 거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목표, 심장을 찾는다.”
“다음은 찾고 나서 생각한다. 맞지?”
“훌륭해.”
스릉—
리리가 헌팅 나이프를 뽑았다. 뒤를 돌아보자, 그 날을 손등에 대고 있었다.
“해 보자고. 당신을 믿을 테니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차를 가했고, 렐릭시나는 코에서 푸른 불꽃까지 뿜어내며 폭발하듯 나아갔다.
악마는 더 이상 우리를 미물 취급하지 않았다. 불멸자와 비슷한 위상을 가진 저 기분 나쁜 존재는 이제 나를 명확히 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죽음을 선택한 용, 가롯이 그랬던 것처럼.
“렐릭시나. 빙 돌아서 저 허수아비 뒤쪽으로 가는 거야.”
“크릉—!”
렐릭시나는 바람과 같은 속도로 이 평야의 가장자리, 산의 비탈길이 시작되는 곳을 따라 내달렸다. 악마의 어깨에 앉아 있었던 무수히 많은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 몸집이 수리가 연상될 정도로 컸다.
그것들은 투창처럼 내게 쇄도했다. 안장 옆에 달려 있는 가방에 손을 집어넣어 기생체 가죽으로 된 망토를 꺼내 리리를 감싸려고 했다.
그 순간.
촤아아악—!
리리는 헌팅 나이프로 손등을 긁었다. 얕은 상처에서 배어 나온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피가 쏟아지더니, 일시에 증발하며 붉은 증기가 되어서 우리를 감싸 안았다.
“까아악—!”
까마귀들은 고통스러워하며 뒤로 빠졌다.
나는 놀라움을 기꺼이 드러내며 리리를 바라보았다. 그 날카로운 눈매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붉은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앞을 봐. 목표만 생각해.”
리리는 여전히 까마귀와 악마를 주시하고 있었고, 그 손등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바닥에 닿기 전에 속속히 증발하며 끊임없이 붉은 안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날 믿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리리를 믿지 않을 리가. 나는 주변에 대한 신경을 완전히 꺼버린 채, 좁아지는 시야로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악마의 측면까지 이동했다. 내가 악마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왠지 약점이 있다면 뒤편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렐릭시나. 이대로 저 뒤까지 가는 거야. 허수아비 놈 등짝 좀 보자고.”
“컹—!”
렐릭시나는 바람마저 추월하는 속도로 달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 끊임없이 달려드는 까마귀는 리리가 운데라의 가호로 막아주고 있었고, 뒤편으로 갈수록 거칠어지는 지면도 렐릭시나의 달음박질을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땅에서 무언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나아가는 정면 땅에서 벼가 자라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허수아비를 중심으로 풍요로운 작물이 자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잿빛 볏짚으로 이루어진 병사였다.
팔이 네 개가 달린 인형들이 일어나 달려들었다. 황금 지침에서 푸른색의 보석을 꺼내 손에 쥐었다.
<기록관의 반지>
손을 앞으로 뻗었다. 문자 형태의 룬은 응용하기에 따라 입으로 내뱉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반지에서부터 발사되어 땅에 새겨지는 세 개의 룬 문자.
모스mohs.
그건 땅을 불사르는 커다란 불꽃이 되었다. 그렇게 강한 화력은 아니지만, 맹수를 놀라게 하거나, 볏짚 따위를 불사르는 데에는 충분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불꽃을 옮겨 주는 인형들. 그 불의 벽 속으로 우리는 과감하게 달렸다.
나는 그와 동시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하늘에서 새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건, 달의 옆에서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 * *
“저건, 대체…….”
고원에 도착한 기사단들이 목격한 광경은 비현실적이었다. 기사단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 까닭은 단순히 거대하고 흉흉한 허수아비 악마 때문이 아니었다.
그 악마를 가운데 두고 긴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붉은 혜성.
피안개의 꼬리를 길게 늘어트리고 바람의 속도로 달리고 있는 흑마.
인간이 뱀파이어와 힘을 합쳐 악마를 상대하고 있었다. 절대로 마음을 함께할 수 없는 두 종족이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움직이는 것도 모자라, 필멸자의 몸으로 주저 없이 악마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모두가 그 장면을 보고 신화를 떠올렸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는 장면은 기록되어 마땅한 신화적 사건이었다.
기사단은 검과 창을 부여잡았다. 강선후가 보여 준 모습은 이들의 마음에 고양감을 싹틔웠다. 공포는 투쟁심에 짓눌려 점차 희미해졌다.
기사단장이 검을 치켜들기도 전에 단원들은 이미 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 뛰쳐나갈 준비를 끝마쳤다.
기사단장의 신호는 그저 효시일 뿐이었고, 그걸로 충분했다.
“신이 다시 인간을 바라볼 때를 위하여.”
그 한마디를 끝으로, 기사단은 악마의 고원으로 달려들었다.
* * *
묘지기는 지상에서 울리는 희미한 진동을 느꼈다. 싸움이 시작된 터였다. 그곳에서는 신의 강림을 위해 인간들이 악마와 싸우고 있었다.
묘지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묘지 도시는 언뜻 보기에는 과거의 영광을 품고 있는 듯했으나, 군데군데 자신이 파헤치고 부순 흔적이 엿보였다.
묘지기는 생각했다. 과거 황금왕이 자신에게 내린 명령을. 묘지기는 그를 거역할 수 없었다. 그가 품고 있는 영광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공포는 욕망을 억누르기에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래서 최소한 황금의 시대 때는 묘지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화가 끝나고 풍화의 시대가 왔을 때, 시간이 지나며 묘지기를 억누르던 공포심은 희석되었다.
파괴와 증오의 욕구는 그렇게 다시 올라왔다. 처음에 묘지기는 억누르고자 했다. 어쩌면, 자신도 황금의 일원처럼 영광과 명예를 아는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묘지기는 결국 이성을 잃었다. 거인을 지배하는 증오의 운명을 그는 벗어날 수 없었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히 잠든 영혼을 학대하고 묘지를 부수는 동안 쾌락에 빠졌지만, 한편으로는 끝 모를 깊이의 자괴감의 늪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에 시달려야만 했다.
묘지기는 디오네의 심장을 내려다보았다. 미약한 인간이 건네준 그것은 여전히 박동하고 있었다.
디오네는 묘지기에게 아무런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그 심장 박동으로 여전히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 줄 뿐.
인간은 말했다. 디오네는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거인이라고.
하지만 묘지기는 생각했다. 디오네가 운명을 극복한 건, 거인왕의 핏줄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묘비 여기저기에 우두커니 서 있는 영혼들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욕망을 이기지 못해 그들을 학대했던 기억의 파편들이 마음에 박혔다.
넝마로 뒤덮인 묘지기의 얼굴에서 무언가 흘렀다. 묘지기는 자신을 뒤덮은 죄책감을 이길 수 없어 괴성을 지르고 포효했다.
인간의 말대로, 자신도 황금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나는.
「그럴 자격이 없어어어어!」
묘지기의 포효가 퍼졌지만, 영혼들은 더 이상 귀를 막고 도망치지 않았다.
그저 묘지기를 올려다보았다.
「……황금의 일원이 되고 싶은가?」
유령 중 하나가 물었다.
묘지기는 그 말을 듣고 더욱 커다란 괴성을 질렀다. 주먹으로 내리쳐 묘비 하나를 부쉈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나는! 죄인! 언제나처럼 노예이며, 영원히 죄를 극복할 수 없는, 그런 종족을 타고난 운명!」
거인은 네 발로 엎드려 유령들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증오를 담은 퀭한 눈으로.
「왜 평소처럼 도망치지 않는 거야! 왜 나를 그딴 눈으로 올려다보는 거야! 도망치라고! 지금부터, 다시 언제나처럼 살아갈 거니까!」
유령의 대표는 묘지기에게 말했다.
「네가 황금의 일원이 되고 싶다면, 그리해라.」
「네놈이 뭔데, 네놈이 왕이야? 무슨 자격으로……!」
「너로 인해 고통받은 영혼의 자격으로.」
거인은 괴성을 멈췄다. 유령은 말을 이었다.
「너는 죄인이다. 우리는 너로 인해 셀 수 없는 시간을 고통 속에서 살았다. 너는 왕의 명령을 저버렸다.」
「그래서 나는 황금의 일원이 될 수 없…….」
「너는 죄인이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죄를 저지른 탓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너를 용서할 권한 역시 우리가 가지고 있다.」
거인은 고개를 들어 유령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우리가 용서한다면, 너는 명예로 죄를 정화할 자격이 생긴다. 죄를 정화하고 명예를 위해 산다면, 누구든 황금의 일원이다.」
유령들 모두가 거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더 이상 고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묘지기는 문뜩 생각했다.
이들을 학대했던 지난달 동안, 이 유령들이 자신을 증오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우리가 너를 용서한다.」
유령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들이 믿어 왔던 그 영광을 떠올리며.
「그것이 시대를 빛냈던 황금의 율법이니.」
거인은 유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묘비를 바라보았으며.
마지막으로는 자신이 갇혀 있었던 이곳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 *
최초의 전쟁터 각지에 퍼져 있었던 기사단은 고원에 집결했다.
이들은 마수들을 물리치며 허수아비에게 전진했다.
어떻게 해야 저 악마를 막고 신의 강림을 성사시킬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해야 하기에 했다. 그들은 선봉으로 허수아비에게 돌격한 인간과 뱀파이어를 믿었다.
그러나 허수아비는 악마였으며, 불멸자만이 이길 수 있는 거대한 존재였다.
허수아비는 처음으로 그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측면으로 꺾인 채 땅을 바라보던 허수아비가 비로소 고개를 치켜들더니, 꿰매져 있는 입을 한껏 벌렸다.
“아아아아아아—.”
고통에 몸부림치는 병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모든 기사들이 휘청거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우욱, 우웨엑!”
누군가 구역질을 했다. 겉과 속이 뒤집히는 울렁증과 고통.
허수아비의 입에서 명계의 기운이 흘러나와 사람들을 덮쳤다.
그 순간, 땅이 흔들렸다. 굉음과 함께 고원의 한편이 반구 형태로 솟아오르는가 싶더니.
콰아아아앙—!
흙먼지가 산의 높이만큼 솟아오르며 땅을 뒤흔들었다. 모두가 사색이 되어 넘어지지 않기 위해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넝마를 뒤집어쓰고 삽을 들고 있는 앙상한 거인이, 땅에서 솟아오르며 땅에 박혀 있던 허수아비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움직일 리 없었던 악마가 처음으로 강하게 휘청거렸다.
모두가 경악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가운데,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인간은 한 명뿐이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